81화
오장로는 좌중을 장악하는 팽무성에게서 무림에 군림하는 절대자들의 모습을 엿보았다.
이는 단순히 무공이 높다 하여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었다.
‘팽무성? 삼장로를 곤란하게 만든 후기지수가 아닌가.’
땀을 닦던 오장로는 눈을 파르르 떨었다.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팽무성의 기세에 내상을 입은 탓이었다.
‘단순히 기세만으로,..’
경악한 오장로는 팽무성을 내려다봤다.
마치 호랑이와 같은 저 두 눈에 위축되고 있었다.
팽무성은 안장 위에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오장로를 보곤 대뜸 목을 주물렀다.
“갑자기 목이 쑤시네.”
이에 곤란한 얼굴을 한 오장로는 쭈뼛거리며 말 위에서 내려왔다.
이에 양측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 자리에서 팽무성이 한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기가 꺾인 오장로의 행동을 보는 적철혈랑대의 눈에 한기가 솟았고 무림맹 무인들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지닌 무위도 놀랍지만, 자연스레 분위기를 주도하는 힘이 있구나.’
남석태는 팽무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순히 무공이 강한 후기지수라 여겼던 남석태는 평가를 정정해야 했다.
“감히 본천의 오장로께 무슨 망발인가.”
쾅
적철혈랑대주가 내려친 장창에 바로 앞에 있던 바위가 쪼개졌다. 잘게 부서진 돌덩이가 팽무성의 발 앞까지 굴러왔다.
그에 주춤했던 적철혈랑대가 다시 살기를 피워냈고, 삼백 명의 농밀한 살기는 팽무성 한 명에게 쏟아졌다.
보통 무인이라면 당장 눈을 뒤집고 기절했을 터, 그러나 팽무성은 보란 듯이 입술을 실룩이고 있었다.
“네놈들이 얌전히 꼬리를 내릴 리가 없지.”
사뿐히 한 걸음 내디딘 팽무성의 오른발.
그와 동시에 산왕군림보의 기파가 쏟아지며 평원의 풀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압력에 적철혈랑대의 머리가 일제히 숙여졌다.
이들은 허리와 목에 힘을 주며 최대한 버티려 했지만, 몸은 점점 꺾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산왕군림보의 두 번째 발걸음이 나아갔다.
“끄윽.”
“흡.”
저마다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했지만, 폭포처럼 짓누르는 힘은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어찌 이런...’
오장로는 적철혈랑대가 아무것도 못 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키히힝.”
“커억.”
결국, 압력에 견디지 못한 전마가 다리가 부러진 채 쓰러지거나, 기수가 땅을 구르기 시작했다.
“팽 소협, 워낙 거칠게 살아온 놈들이오. 이 노물이 대신 사과할 테니 힘을 거두어 주시오.”
허나 팽무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장로는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
“오독문을 쳐야 하는데 그전에 몸이 상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지 않소.”
듣고 싶었던 말이 나오자 팽무성은 그제야 오장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렇군요. 오독문이 평지에 자리한 만큼 적철혈랑대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겠습니다.”
갑작스레 팽무성이 말을 높였으나 오장로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옳은 말이오. 그래서 본천에서도 이들을 파견한 것이니.”
“만약 적철혈랑대가 선봉을 선다면 오독문의 기세가 확 꺾일 것입니다.”
웃음을 머금은 팽무성은 산왕군림보를 거두었다.
“크흑.”
압력이 걷어지자 적철혈랑대는 그제야 거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그들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자세를 유지했다.
적철혈랑대의 마지막 고집이자 자존심이었다. 팽무성은 피식 웃더니 등을 돌렸다.
“오장로, 들어가시지요. 공격 계획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하니.”
팽무성이 눈빛을 보내자 남석태는 고마워하면서 오장로를 지휘부의 천막으로 안내했다.
* * *
사태를 정리한 팽무성은 남궁혁과 함께 배정된 천막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당화련과 무각의 상처가 온전히 아물지 않아 당가에 남았기에 두 사람만이 참전한 상황이었다.
“팽 아우가 없었다면 쓸데없이 피를 흘릴 뻔했어.”
오장로와 적철혈랑대는 단순히 기싸움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했는지는 몰랐으나 무림맹을 치려고 했던 것은 분명했다.
“원인이야 어쨌든 오독문에 정파가 나선 것이 치욕이라 여겼을 테지요.”
“나도 내키지는 않지만, 사파와 거리를 좁혀야 할 텐데 말이지.”
남궁혁은 정파 혼자 마교를 상대하기 힘들 것이라 예상했다.
정사대전이 벌어지고 이십 년이 지났지만, 양측의 사이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正)과 사(邪)의 개념이 생긴 이후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제나 대립과 반목을 이어갔으니 말이다.
간혹 마교나 세외의 침범이 있을 때도 이 둘이 힘을 합친 적은 드물었다.
“남궁 형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실 것 같습니까.”
사파를 염두에 둔 팽무성이 묻자, 남궁혁도 쉬이 답을 내지 못했다.
“사도천주 한 명만 설득하면 되는 일인데, 어떻게 설득하냐가 문제군.”
무림맹과 같은 거대 연맹이지만, 사도천주의 말 한마디에 당장 전쟁을 일으킬 수도, 화친할 수도 있는 곳이 사도천이었다.
무력, 권력, 금력, 명예.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사도천주.
이런 거인을 만족시키려면 과연 무엇을 내놓아야 할까.
‘사도천, 무천궁 그리고 무림맹. 어떻게 하나로 묶어낼 수 있을까.’
마교를 막기 위해서는, 이 세 곳을 하나로 뭉치는 일은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전생과 같은 흐름이라면 동맹을 맺을 시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 결국 팽무성이 해내야 할 일이었다.
두 사람이 고심하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때 천막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시오.”
남궁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천막 안으로 들어온 것은 사천지부의 무인이었다.
사내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특히 팽무성을 볼 때는 선망 어린 눈빛을 띠고 있었다.
“지부장님의 명으로 돼지를 잡았습니다. 나와서 같이 드시지요. 두 분을 기다리시는 맹도가 많습니다.”
사내를 따라서 중앙의 야영지로 향하자 장작이 타는 소리와 침을 돌게 하는 고기 냄새가 가득했다.
본래 전투 이전의 술자리는 지양되는 편이나, 낮의 일로 날카로워진 무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남석태는 술과 고기를 풀었다.
적철혈랑대도 잠깐 몸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공격도 잠시 늦춰놨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 나왔군.”
두 사람의 등장에 무림맹 무인들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패호도, 검호. 이쪽으로 오시지요.”
“강진, 조용히 해라. 우리는 두 분께서 드실 고기와 술도 다 준비해 놨으니.”
“뭐라는 거냐, 이쪽도 마찬가지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무인들의 모습에 팽무성과 남궁혁은 중앙의 빈 곳에 적당히 자리 잡았다.
그러자 무인들이 양손에 고기와 술을 들고 모여들었다.
“팽 소협, 낮에는 정말 시원했소이다.”
“사천이 감숙과 접해 있으니 적철혈랑대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꼬리를 내린 모습은 처음 봅니다. 하하.”
“명성이 과장된 줄 알았는데 축소된 것일 줄이야.”
무인들의 칭찬과 감사가 끊임없이 쏟아졌고 팽무성은 포권지례를 하며 답했다.
“아닙니다, 쓸데없는 싸움은 막아야 하니까요.”
팽무성은 겸손한 듯 말을 하면서도 살짝 깔린 목소리로 뒷말을 붙였다.
“그놈들이 광견처럼 좀 까불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었지요.”
이에 무인들은 잠시 팽무성을 보더니 저들끼리 폭소했다.
“크하하, 팽 소협이 이런 화끈한 면모가 있었군.”
“너무 겸양만 떨어도 재미없긴 하지.”
둥글게 앉아서 모인 이들은 서로 고기와 술을 나눠 먹으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풀어냈다.
“팽 소협, 강호에 처음 나서자마자 적륜문이라는 사파를 홀로 박살 낸 것이 맞소? 그 무용담이 궁금하오.”
“나는 검호의 협객행이 듣고 싶은데 말이지.”
이에 검낙준을 마시고 있던 남궁혁이 일어나며 허리춤에 메어 둔 호리병을 풀었다.
“팽 아우의 이야기는 본인이 잘 알고 있소. 나의 협객행은 말할 것도 없지. 이 호리병이 술로 가득 채워지면 이야기를 풀어드리리다.”
“오오.”
“검호의 입이 검만큼이나 뛰어나다 들은 적이 있소.”
이에 무림맹 무인들이 호리병에 술을 채웠고, 손뼉 치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호리병에 술이 가득 차서 넘쳐 흐르자 남궁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술값을 받고 강호의 소문을 풀어놓은 호사가와 같았다.
“팽 아우가 태원에 들어설 때는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떨어지는 날이었소.”
첫 구절부터 남궁혁의 각색이 들어간 듯하지만 팽무성은 그 나름대로 재미를 느끼며 웃음을 터트렸다.
술이 들어간 남궁혁의 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하다 입이 마르면 호리병의 술로 목을 축였고 탁월한 화술로 듣는 이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남궁혁의 이야기는 호리병이 세 번이 비워지고 나서도 끝이 나지 않았다.
* * *
사도천의 병력이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정비를 끝낸 적철혈랑대가 전선에 섰다.
회의를 통해 선봉은 적철혈랑대가 서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오장로는 내키지 않았으나 팽무성의 말이 신경 쓰여 어쩔 수 없었다.
무림맹은 적천혈랑대의 뒤를 받쳐줄 병력을 제외하곤 그대로 포위망을 유지하는 데 투입되었다.
‘다행히 무림맹의 피해는 줄일 수 있겠구나. 팽 소협 덕분이다.’
남석태는 오장로가 팽무성에게 호되게 당한 만큼 회의에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런데 저놈들은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군요.”
“사도천도 합류했음을 알 것인데, 조용하니 더욱 걱정이 큽니다.”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오독문을 보며 정파는 걱정했으나 오장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수작질이야 벌여놓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겠지. 슬슬 시작합시다.”
이에 남석태가 고개를 끄덕이곤 신호를 보냈다. 혈랑의 깃발이 펄럭이고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
“짓밟아라!”
적철혈랑대주의 외침과 함께 적철혈랑대가 오독문을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
지축을 흔드는 진동에 들꽃이 열 번 정도 꽃망울을 흔들 때, 일대가 오독문의 지척에 달했다.
“파(破)!”
이동 중에 서로의 간격을 벌리던 적철혈랑대는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장창을 찔러넣었다.
슈우욱
콰카캉
무더기로 쏘아지는 창기에 오독문의 벽이 비명을 질렀다.
한 곳에 집중된 창기에 오독문의 벽에 금이 그어지고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적철혈랑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창기를 쏘아내더니 벽에 가까워졌을 때 합을 맞춘 듯 일제히 장창에 내공을 실어 휘둘렀다.
콰르륵
무너지는 벽의 파편이 적철혈랑대를 덮쳤으나 입고 있는 철갑이 가볍게 튕겨냈다.
“쓸어버려라!”
잠깐의 멈춤도 없이 벽을 뚫어버리고 진입하는 모습에 그 뒤를 따르던 무림맹 무인들은 기가 찼다.
“저 무식한 놈들! 저들끼리 먼저 돌진하다니.”
본래 무림맹과 일정한 간격을 두기로 했던 적철혈랑대였으나 기존의 작전을 무시하고 저들끼리 속도를 높이고 돌진한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엄청난 돌파력이군.”
오독문으로 진입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욱한 독무였다.
안개처럼 오독문 전역을 뒤덮고 있는 독무를 본 적철혈랑대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독무는 독마종의 것인가 보군.’
오독문은 독무를 흩뿌리며 싸우는 방식과는 멀었다.
촤르륵
독무 사이로 들리는 사슬 소리.
“히힝!”
모습을 감춘 낫은 낮게 날며 전마들의 다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공이 실려 팽팽해진 사슬은 전마들이 걸려 넘어지게 했다.
슈웅
뒤이어 튀어나온 오독문도의 쌍륜(雙輪)은 위아래로 날아들며 기수와 전마를 동시에 노렸다.
쌍겸과 쌍륜 모두 원거리에서 사용하는 병기였기에, 오독문과 독마종은 독무라는 이점 속에서 몸을 숨기며 집요하게 전마를 노렸다.
채챙
“어림없다!”
장창으로 날아오는 병기를 튕겨내며 적철혈랑대가 돌격을 이어갈 때였다.
촤악
“키히힝!”
갑자기 전마들이 크게 휘청이며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뒤따르던 전마들이 연속적으로 충돌을 일으켰다.
“큭, 기름입니다!”
바닥을 구른 기수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바닥의 군데군데에 기름칠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기수를 노린 독을 머금은 모래가 바닥에 가득 뿌려져 있었다.
오독문이 이중삼중으로 준비한 함정에 적철혈랑대의 돌진은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거기에 적철혈랑대의 철갑도 독에서는 그들을 지켜낼 수 없었다.
“이까짓 잡기술에 멈출 것이냐, 말에서 내려라!”
기어코 전마를 포기하고 직접 움직였지만, 전세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독무와 끊임없이 날아드는 쌍겸과 쌍륜. 적철혈랑대가 천천히 죽음에 말려들 때.
“기세 좋게 돌진하더니 뭐 하는 건지.”
“하하, 너무 그러지 말게.”
쐐애앵
적철혈랑대의 머리 위를 지나가는 두 줄기의 검풍과 도풍. 깔끔하게 독무를 밀어내며 상쾌한 시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시야 사이로 드러난 두 사내의 등장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파의 하늘.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