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쿵쿵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며 그동안 쌓아온 팽무성의 경험과 감이 위험을 거세게 알려오고 있었다.
사천의 장심에서 나타난 주홍빛의 작은 용권풍. 빠르게 회전하며 점점 덩치를 불리더니 만사전의 지붕마저 뚫어내고 있었다.
쿠아아아앙
용권풍이 휘몰아치며 무차별적으로 토해내는 열풍(烈風)에 대들보를 비롯한 만사전 곳곳이 갈라지고 있었다.
결국, 열풍에 무너져 내린 만사전의 터에는 파편과 함께 햇빛이 조금씩 쏟아져 내리었다.
콰릉
팽무성이라고 만사전을 초토화시키는 바람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적아도가 좌우 사선으로 그어지며 쇄도하는 바람을 베어냈지만, 그것만으로도 팽무성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아직 일 초식이 펼쳐지지도 않았다.’
단전에 있는 혼원벽력신공의 심후한 내공.
팽무성은 후일을 생각지 않고 아낌없이 풀어냈다.
뿜어내는 무형의 기운이 점점 뻗어 나가며 제 영역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적아도의 붉은빛은 진해졌고 울리던 도명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십대고수의 중간은 가겠군.’
한편, 사천은 팽무성을 눈에 담아내며 지닌 경지를 훑어보았고, 확실히 젊을 때의 자신보다 성취가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확실히 팽무성은 천하제일인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때는 삼천이 죽어 사라진 다음 시대가 될 것이다.
‘허나 네놈이 세월의 장벽을 어떻게 넘어서겠느냐?’
삼천 중에 제일 빠른 성취를 보였던 사천조차도 초월경에 오르고 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절대경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십 년이라는 시간도 무림사 전체로 봤을 때 경악스러운 속도였다.
“광풍소라고 한다.”
사천이 가볍게 손을 튕기자 진즉에 만사전을 날려버리고 덩치를 키워낸 용권풍이 덮쳐들었다.
혈사풍혈공(血沙風穴功) 광풍소(狂風笑).
풍마공의 무공이 검풍, 도풍, 지풍 등의 기예에 치중된 무공이라 풍(風)자가 붙었다면,
혈사풍혈공은 바람 그 자체의 형(形)과 의(意)를 담아낸 무공이었다.
전각 크기의 거대한 주홍빛의 용권풍.
만사전을 단숨에 무너트린 광풍소는 팽무성마저 집어삼키려 들었다.
이에 팽무성의 머리칼과 무복이 거칠게 펄럭였다.
쿠아아아
거센 풍압과 소음 때문인지 팽무성의 귀에서는 커다란 이명이 울리고 있었다.
‘무공이 아니라 자연재해와 다름없구나.’
전생에 철무련이 펼치는 혈사풍혈공을 본 적이 있는 팽무성은 사천의 광풍소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절대경의 고수가 펼치는 무공은 이미 무공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뿌드득
광풍소의 엄청난 흡입력에 마침내 만사전의 대들보가 뿌리째 뽑혔다.
마찬가지로 팽무성의 몸도 순간 들썩였다.
만약 이대로 광풍소에 빨려 들어간다면 별 저항도 못 하고 온몸이 찢겨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에 경악한 팽무성은 천근추의 수법을 펼침과 동시에 용천혈로 내공을 흘려냈다.
착(着)의 묘리로 두 발을 바닥에 고정한 팽무성은 광풍소를 향해 도를 겨누었다.
쩌엉
광풍소와 적아도가 충돌할 때, 팽무성은 광풍소에 실린 사천의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사천이 내뿜는 살기를 느낀 것이 아니었다.
광풍소를 이루는 사천의 내공에서 팽무성을 죽이고자 하는 그 진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내공, 즉 기(氣)에 의지를 담아내는 절대경의 경지.
이기어검, 심검을 펼칠 수 있는 시작점이기도 했으며 자연(自然)에 의지를 투영해 자신을 일체화하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 궁극이 바로 무극, 해탈, 등선, 탈마 등의 여러 단어로 불리는 자연경(自然境)의 경지였다.
‘기에 의지를 담아내는 것.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광풍소를 대면하고 팽무성은 깨달았다.
단순히 내공을 모두 쏟아내고 강한 초식을 펼쳐낸다고 하여 광풍소를 막아낼 수는 없음을 확신했다.
이는 사천이 팽무성에게 내린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 내에 단초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끝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팽무성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결국에 눈을 감았고 외부의 감각이 하나씩 차단되기 시작했다.
샤아아악
바람이 스치며 전신에 상처가 네다섯 개씩 늘어남에도 팽무성은 더욱 깊숙이 내면의 심상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하늘을 떠받치는 태산이었다.
지금 보이는 것이 팽무성의 심상인지, 아니면 단순한 환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팽무성은 산천초목 사이를 거닐며 고민했다.
“힘으로 강제하여 자연의 의지를 빼앗아야 하나.”
어느새 팽무성의 손에 들린 적아도에 도기가 석 자 이상 솟아올랐다.
팽무성이 느닷없이 태산을 향해 적아도를 휘두르자 태산에는 거대한 도상이 남았다.
그러나 태산 전체에 비하면 작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팽무성의 위맹한 도격도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작은 현상에 불과했다.
“거스르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자연의 의지를 유도한다면?”
팽무성은 고개를 저었다. 팽무성의 경지가 아무리 드높은들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었다.
이미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낸 자연의 흐름을 바꾸어 낼 힘은 팽무성에게 없었다.
답을 찾지 못한 팽무성은 그저 하염없이 걸었다.
햇빛과 바람에 만져지는 초목을 보았고, 호수를 헤엄치는 잉어를 보았다.
수많은 것이 어우러지는 자연 안에 팽무성이라고 포함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를 보던 팽무성은 문득 중얼거렸다.
“자연에 인위는 없고 스스로 존재하고 저절로 이루어지니. 나도 그러면 되는 건가.”
쿠아아아앙
듣기 좋게 지적이던 새소리가 사라지고 골을 울리는 바람소리가 팽무성의 귀를 강타했다.
“이놈.”
순간의 찰나. 사천은 광풍소를 맞닥트린 팽무성이 망아(忘我)에 빠져든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뜬 팽무성의 눈은 순간이었지만 사뭇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나 강렬한 빛을 보이던 안광은 사라졌고 그저 허허로움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지금 다시 눈부신 안광을 쏟아내고 있으나 사천은 팽무성이 내보인 그 허허로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너머를 보았느냐.”
그러나 사천의 작은 중얼거림은 광풍소의 굉음에 먹혀 사라졌다.
사천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때, 팽무성은 무의식적으로 적아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바람을 베어낼수록 적아도의 빛은 짙어졌고 두르고 있던 도기는 조금씩 길어졌다.
그것이 정점에 달했을 때. 팽무성은 미완의 초식 중 하나를 펼쳐냈다.
새롭게 그려지는 다섯 줄기의 도격은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와류를 그려내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사천이 펼쳐낸 광풍소와 흡사한 면이 있었다.
다섯 줄기의 뇌전이 휘몰아치며 하나의 거대한 빛기둥을 만들어냈다.
적뢰광주(赤雷光柱).
팽무성을 삼켜낸 주홍빛 용권풍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오며 용권풍을 찢어내기 시작했다.
* * *
팽무성이 힘겹게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해가 져서 주홍빛 노을로 물들고 있는 하늘이었다.
“큭.”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전신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복은 위아래 할 것 없이 찢어져 팽무성은 거의 나신이나 다름없었고 몸에는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
그중에는 제법 깊은 상처도 있었는데 누가 지혈을 해 놓은 것인지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왜 이리 늦게 일어난 거냐. 젊은 놈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반쯤 부서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천이 보였다.
그제야 팽무성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단 몇 시진 전까지 만사전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지금은 전각 자체가 박살 나서 그 잔해가 쌓여있었다. 그 폐허 속에서 팽무성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먹는 약을 먹였으니 안쪽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외상은 귀찮아서 출혈만 막아놓았다.”
사천의 말대로 혈맥은 멀쩡했다. 무슨 약을 먹였는지 모르겠지만 전보다 몸 상태가 좋게 느껴졌다.
“감사드립니다.”
팽무성의 감사 인사에도 사천은 다른 것을 물었다.
“보았느냐?”
사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팽무성은 고개를 저었다.
“마치 꿈을 꾼 듯 아리송합니다. 명확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마지막에 도법을 펼치던 순간뿐입니다.”
사천은 침음을 흘리더니 떠오른 듯 물었다.
“네가 펼친 도법은 무엇이냐. 하북팽가에 그런 도법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오호단문도. 새로운 하북팽가의 도법입니다.”
그에 사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공이라는 것이 만든다고 그렇게 쉽게 뚝딱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재의 하북팽가에 무공을 창안할 만한 고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네가 창안한 것이냐?”
“저는 뼈대에 살을 붙였을 뿐입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미완성된 초식도 있었고 팽무성의 경지가 오를수록 발전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사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하지. 이 무림에 완성된 무공이 존재하겠느냐. 신공절학들도 세월을 거쳐서 발전하고 개량되는 법이거늘.”
이에 팽무성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살짝 웃음기를 보이던 사천은 다시 메마른 표정으로 팽무성을 바라보았다.
‘일대종사의 자질도 지녔단 말이지.’
지금 사천은 즐거움과 살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사천은 고심했다.
팽무성이 절대경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향후 사파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생겼다.
도천과 용천. 무림맹의 분노, 후기지수를 죽였다는 무림의 비난 따위는 사천의 고려사항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천은 오로지 자신이 즐길 천하제일의 여흥과 사파의 미래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네놈이 전쟁이 끝나면 정말 본좌를 찾아올까?”
“저도 어중간한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천주와 묶여서 이천(二天)으로 불리느니 차라리 도전해서 천하제일이 되겠습니다.”
“큭.”
입꼬리를 비틀던 사천의 웃음이 짙어졌다. 방금의 대답으로 사천도 결정을 내린 것이다.
“네놈의 제안 받아들이마. 지금 이 자리에서 천하제일을 가를 날을 기다리겠다.”
“감사합니다.”
“무림맹주도 해내지 못한 일을 후기지수인 네놈이 해내는구나. 혹여나 마교에게 죽지 마라. 그렇다면 사파의 칼끝은 정파로 향할 테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좀 질긴 면이 있습니다.”
* * *
안내를 받아 숙소로 돌아온 팽무성은 일행들의 말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만사전 근처에서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그 어떤 소음이나 기의 충돌도 느끼지 못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천주가 기막으로 감춰낸 건가.’
당화련은 얼굴을 뺀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팽무성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다쳐서 어떡해요.”
당화련은 피에 물든 붕대를 보며 마치 자신이 다친 마냥 속눈썹을 잘게 떨고 있었다.
“괜찮아. 움직이는 데 크게 지장은 없다. 당장 해원투전에 나서도 무리는 없어.”
이에 남궁혁이 못 말린다는 양 쓴웃음을 지었다.
“비무대와 관람석이 완성되지 않아서 삼 일 뒤에나 열린다는군. 팽 아우는 그동안 푹 쉬게.”
무각은 양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팽 아우는 쉬고 우리는 그동안 특훈을 하자고. 영약을 준다는데 낼름 먹어야지.”
“영약이라니?”
팽무성이 묻자 무각이 양 입꼬리를 귀밑까지 올렸다.
“이번에 해원투전에서 우리를 이긴 사파는 금을 보상으로 준다는데, 우리도 다섯을 연달아서 이기면 영약을 준다고 하고.”
“대장로가 말하길 이것이 사파 식 귀빈 대우라고 하더군.”
남궁혁의 말까지 들은 팽무성은 피식 웃었다.
“이번에 사도천이 큰 손해를 보게 생겼군요.”
“감숙까지 왔는데 영약 정도는 받아내야 이득이죠.”
팽무성 일행은 영약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을 불사르고 있었다.
“아미타불. 해원투전의 성공을 위해 술이나 한잔 할까.”
“이미 팽 아우가 일어날 때 시비에게 술상의 준비를 부탁해놨다.”
호흡이 척척 맞는 무각과 남궁혁의 모습에 당화련이 입술을 내밀며 팔짱을 꼈다.
“여기 버젓이 환자가 있는데 무슨 술상이에요?”
“하하, 괜찮은데.”
팽무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화련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조금씩 마셔요. 왜 이리 술을 좋아하는 거야.”
“너무 툴툴대지 마라. 화련아. 안주로 감숙의 별미를 준비해 달라고 했으니.”
남궁혁의 말에 당화련의 눈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어졌다.
"흠흠. 그렇다면야..."
* * *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해원투전이 개막되었다.
청빙음마는 제자가 가져온 종이를 보더니 미간을 꿈틀거렸다.
쩌적
손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종이는 단숨에 얼어서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떠오르는 사패(四覇)의 명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