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갑자기 흑상이라니.’
팽무성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표사를 보며 고민했다.
확실히 이 현장을 보면 기이하긴 했다.
표물을 지키는 표사도, 습격한 낭인들도 어색함이 느껴질 정도로 무공이 높았다.
“일단 상처를 치료하고 얘기합시다.”
팽무성은 표사의 옆구리에 꽂힌 검신을 잡으며 말했다.
“상처를 지져야 할 것 같은데.”
표사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이자 팽무성은 바로 검신을 뽑아냈다.
피가 터져 나오는 순간 팽무성은 장심을 가져가 상처를 막았다.
치이익
“끄으윽.”
장심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양기에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생으로 살이 타는 고통에 표사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잘 참으셨습니다.”
출혈을 막아낸 팽무성이 응급조치를 끝내자 진땀을 뺀 표사는 마차에 기대어 축 늘어졌다.
한편 팽무성이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사패는 표사들을 습격한 낭인들을 제압했다.
무각의 양손에 얼굴이 퉁퉁 부은 낭인들이 질질 끌려왔다.
“조금만 참으세요.”
당화련은 쓰러진 표사 중 살아있는 이를 찾아 상처를 살폈고 무각과 남궁혁은 낭인들에게 습격의 사주를 묻고 있었다.
“낭인들의 주인이 뭐겠나. 돈이지.”
“우리도 의뢰인은 직접 보지 못했네. 표물을 정해진 장소에 가져오라는 서신만 받았을 뿐.”
낭인들의 말에 당화련에게 치료받던 표사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오. 지금까지 이런 습격이 몇 번 있었는데 다 이러했으니.”
그 이후에도 낭인에게 몇 가지를 물었지만 그다지 도움 되는 정보는 없었다.
더 물어봐도 시간 낭비였다.
“일단 가까운 마을에 가는 게 좋겠네.”
남궁혁의 말에 옆에 있던 팽무성이 허리춤의 적아도를 뽑았다. 이에 낭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뭐 하는 건가? 우리가 아는 것은 다 알려줬는데.”
“살려준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표사들을 저리 죽여놓고 살려주길 바라다니 웃기네.”
팽무성은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을 보며 말했다. 열두 명의 표사 중 고작 세 명이 간신히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돈에 움직이는 낭인에게도 명성과 평판이 있었다.
지금 같이 표물의 탈취, 납치와 살인 같은 도의가 없는 의뢰는 낭인이 잘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임무를 한 낭인을 의뢰주가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기겠는가.
이러니 낭인들도 이런 쪽의 의뢰는 기피했고, 원래 하던 놈들이 계속 비슷한 의뢰를 맡는 것이었다.
돈을 받고 칼을 팜에도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낭인이 있었고 아닌 낭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후자의 경우였다.
“이 낭인들, 염라회의 소속이로군. 살려줄 가치가 전혀 없다.”
팽무성이 적아도를 뽑을 때 남궁혁은 낭인들의 몸을 살펴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확인했다.
염라회(閻邏會)는 돈만 주어진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낭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낭왕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천랑회(千狼會)와 대비되는 곳이기도 했다.
염라회에 속한 것만 봐도 이들이 타인의 고혈을 빨며 살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남궁혁이 베어온 염라회의 낭인도 제법 많았다.
팽무성과 남궁혁의 말에 낭인들은 되려 눈에 독기를 흘렸다.
“무공을 보아하니 정파의 후기지수들 같은데 협객 흉내를 내는군.”
낭인의 비아냥에 팽무성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희 같은 놈들을 살려 보낼 정도로 우리가 어리숙하지 않거든.”
비웃는 팽무성의 말에 낭인들은 내심 정곡을 찔렸다.
지금까지 차분하게 있던 이유가 팽무성 일행이 정파의 후기지수임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대개 정파 후기지수들은 손속이 무르고 어설프게 협객 흉내를 내며 일의 끝맺음이 어설프곤 했다.
팽무성의 도가 점점 위로 들리자 그제야 낭인들은 다급함을 느꼈다.
“잠깐!”
낭인들은 팽무성이 아닌 다른 후기지수들을 봤지만 다들 똑같은 생각인 듯 무덤덤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특히 약관부터 협객행을 하며 많은 악인을 접해본 남궁혁은 팽무성의 손을 덜어줄 요량인 듯 검을 뽑고 있었다.
“내가 당신 같은 악인들을 만날 때마다 해주는 말이 있소.”
낭인들을 보며 말하는 남궁혁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인과응보.”
좌에서는 검이, 우에서는 도가 동시에 낭인들의 목을 노렸다. 낭인의 기대가 무색하게 두 사람의 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 *
가까운 마을의 의방에 들러 표사들의 상처를 보여주자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누구의 조치인지 모르나 훌륭하군. 내가 손을 더할 것은 없으니 약이나 처방해주리다.”
의원의 칭찬에 표사들의 치료를 책임졌던 당화련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아무리 사천당가의 가솔이라지만, 의술에도 정통하기는 어려운 법인데 당화련의 다재다능이 엿보였다.
의원에 다녀온 이들은 객잔에 잡아놓은 넓은 방에 모였다.
표사가 사패의 눈치를 보자 팽무성이 말했다.
“모두 믿을만한 이들입니다. 같이 행동할 것이니 얘기해 주시죠.”
팽무성의 말에 표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감석태라 하오. 일상의 오른팔이오.”
감석태의 말에 팽무성이 물었다.
“그 일상이라 하시면?”
“흑상은 대외적으로는 하나의 주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일상(一商)부터 구상(九商)까지 아홉 명이 흑상의 대소사를 결정하오.”
물론 그 아홉 명에도 서열이 있어 일상이 제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흑상은 원체 외부에 알려진 정보가 없어 사패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서 감석태의 얘기를 경청했다.
“지금 흑상은 내분을 겪을 위기에 처해있소. 흑상은 두 쪽으로 갈라진 상황이오.”
그 말에 팽무성이 인상을 굳혔다.
바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혹여 그 일에 마교가 관련되어있습니까.”
팽무성이 바로 마교라는 단어를 꺼내자 감석태는 살짝 놀라서 쳐다봤다.
“그렇소. 역시 일상의 말씀대로 잘 아시는군.”
전생에 흑상이 마교에 협력함을 알고 있는 팽무성은 이 내분으로 앞으로 흑상의 행보가 바뀜을 직감했다.
‘내분이라, 그래도 흑상이 무력하게 마교에 넘어간 게 아니었나 보구나.’
당화련도 흑상의 경매에서 팽무성이 금련에게 경고한 것을 기억하기에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다.
감석태는 사패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원래 일상께서는 무천궁에 도움을 청하려 하셨소. 그런데 사패의 명성을 확인하시곤 마음을 바꾸셨소이다.”
“아무래도 커다란 단체보다는 저희가 부담이 적기는 하겠지요.”
“거기에 사패는 여러 번 마교를 저지하지 않았소. 일상은 사패의 저력에 기대를 걸고 계시오.”
감석태가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일상이 사패를 선택한 이유는 거기에 팽무성이 포함된 이유가 컸다.
몇 년 전에 마교의 위험을 예견하여 흑상에 알려준 팽무성을 잊지 않았다.
일상은 사패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기에 다른 방식으로 접견하려 했지만, 우연히 감석태를 돕게 됨으로써 계획보다 일찍 접하게 되었다.
팽무성은 고개를 틀어 사패와 눈빛을 교환했다. 일행의 의중을 확인한 팽무성은 감석태에게 물었다.
“우리가 할 역할이 무엇입니까.”
무림 전역에 영향을 끼치는 흑상의 금력과 정보력. 흑상의 힘이 마교의 손에 쥐어지니 전쟁의 양상은 크게 불리했다.
기회가 있을 때 흑상이 마교에 넘어가는 것은 반드시 막아내야만 했다.
“자세한 얘기는 일상과 논의하게 될 것이오. 지금 당장 부탁할 일은 이것을 지키는 것이오.”
감석태는 품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무언가를 쪼갠 작은 조각 같은 것이 두 개가 있었다.
“흑상의 인(印)을 아홉 조각으로 쪼갠 것이오. 아홉 개의 조각을 맞추면 하나의 도장이 되오. 본래는 칠상과 팔상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오.”
이를 감석태가 가지고 있단 것은 칠상과 팔상에게 변고가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죽었습니까?”
“그렇소. 간신히 회수는 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여러 번의 습격이 있었소.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결국 뺏겼을 것이오.”
감석태는 지도를 사패 앞에 펼쳐 놓았다.
피와 땀으로 얼룩졌지만 보는 데 지장은 없었다.
“이 주변의 지세를 그린 것 같은데.”
무각의 중얼거림에 감석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들었다.
감석태의 손가락은 호북과 섬서의 경계에 위치한 평리(平利)라는 지역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구상의 회담이 열리오. 일상 또한 이곳에 계시니 일단 평리까지 이 물건들을 지켜서 가져가야 하오.”
남궁혁은 현 위치와 평리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며 생각에 빠졌다.
“이거 우리가 흑상의 표행을 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어떤 놈들이 또 몰려오려나. 기대되네.”
“처음에 우리도 오십의 인원으로 시작해서 중간중간 병력을 충당했지만, 이제 겨우 셋뿐이오. 사패도 조심하는 것이 좋소.”
감석태의 우려에 팽무성은 자신 있게 말했다.
“오십의 인원보다 더욱 든든할 것입니다.”
* * *
하루를 쉰 팽무성 일행은 바로 평리를 향한 표행을 시작했다.
감석태를 비롯한 세 명은 전웅표국의 무복을 벗고 평범한 무복을 입었다.
팽무성 일행이 입은 무복과 똑같아서 마치 같은 문파의 제자들로 보였다.
감석태는 지역을 넘나들 때마다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정체를 줄곧 바꿔왔다.
전웅표국도 그중 하나였기에 그에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하루 정도는 아무런 습격도 없어 빠르게 평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느 숲에 들어선 일행들은 곧 해가 지기에 야영할 자리를 찾고 있었다.
“저기 공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석태를 따라온 표사 중 하나가 제법 좋은 자리를 발견했지만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이미 피워놓은 불을 중심으로 네 명의 노인이 있었다. 노인들은 팽무성 일행이 왔음에도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노인만 있는 무리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에 감석태는 불길함을 느꼈다.
‘보통 노인들이 아니다.’
긴장한 감석태가 병장기에 손을 가져갈 때, 팽무성이 말했다.
“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나 하지요.”
느긋한 팽무성의 말에 감석태는 어찌할 줄 모르다가 결국 그 말을 따랐다.
보아하니 다른 사패도 별 경계 없이 마른 나뭇가지를 가져오거나 식기 도구를 꺼내고 있었다.
“남궁 형님. 오랜만에 솜씨 좀 보여주시죠.”
팽무성이 작은 솥에 물을 채워오며 말하자 남궁혁은 양 소매를 걷었다.
“그럴까, 어디 육포랑 건량이 어디 있나.”
남궁혁은 오래 무림을 돌아다닌 경험 덕분에 노상에서 하는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같은 재료를 써서 요리함에도 맛의 차이가 커서 밖에서 야영할 때는 남궁혁이 사패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남궁혁은 있는 재료를 죄다 때려 박더니 능숙한 솜씨로 끓여내며 말했다.
“무각 아우, 숲에 들어오며 살펴보니 작은 동물이 있는 것 같더군. 몇 마리 잡아 오게.”
“음, 역시 고기가 있어야 입맛이 돌지. 금방 다녀올게.”
무각이 숲속으로 홀로 사라지자 남궁혁은 죽이 타지 않게 계속 저어줬고 다른 일행들은 주변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슬슬 맛있는 향이 올라오자 이를 맡은 일행들은 허기가 올라왔다.
그때, 가만히 이쪽을 지켜보던 노인 중 하나가 몸을 일으켜 걸어왔다.
“제법 향기가 좋군.”
“여러 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더군요. 노인장께서도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남궁혁의 말에 노인의 주름이 꿈틀거렸다.
“처음 볼 때 인사 한마디도 없던 것 치곤 예의가 밝군.”
노인의 뼈가 있는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팽무성이 받아쳤다.
“갈 때 가더라도 한 그릇 정도는 괜찮겠지요.”
이에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어디를 간단 말인가.”
“어디를 갈지는 노인장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이놈. 돌려서 말하지 마라.”
노인이 역정을 내자 팽무성은 불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포기하고 돌아가면 집에 가는 것이고 욕심을 내면 저승에 가는 것이지.”
팽무성은 물론이고 사패는 노인들을 처음 볼 때부터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노인들은 감석태가 가지고 있는 조각을 탈취하러 온 이들이 분명했다.
“어린놈이 감히!”
노인은 일갈과 함께 팽무성의 관자놀이를 향해 장법을 펼쳐냈다.
“컥.”
파악
팽무성도 똑같이 좌장을 뻗었는데 접장의 순간 팽무성의 손가락이 벌어지며 노인의 손을 잡아챘다.
노인은 급히 손을 빼려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뿌드득
“크윽.”
팽무성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노인의 손바닥에서는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 가겠다면 한 그릇은 주려 했더니. 어이, 노인장. 말년에 너무 욕심을 부리는군.”
“흐음. 좀 더 끓여야겠군.”
그 와중에도 남궁혁은 여유롭게 죽의 맛을 보고 있었다.
“죽여!”
노인의 외침에 모닥불에 모여있던 세 명의 노인이 뛰어올라 팽무성 일행을 덮쳤다.
뜻밖의 표행.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