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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93화 (93/200)

93화

젊을 때부터 뭉쳐 다니며 지금까지 살아온 다섯 명의 노인.

지금까지 무림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무공은 쉽게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맏형인 일노(一老)는 초절정이고 다른 노인들도 절정의 극에 머무르니, 어느 문파를 가도 대우를 받을 만한 고수들이었다.

허나 팽무성 앞에서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팽무성은 손을 으스러뜨림과 동시에 내공을 노도처럼 쏟아냈다. 그러자 이노는 발경에 당한 듯 검은 피를 토했다.

“그 손 놓지 못할까!”

일노가 거리를 좁히며 팽무성에게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이 틈에 이노도 내상을 감수하고 다시 장법을 펼쳐내려 손을 들었다.

“어딜.”

“큽!”

팽무성이 가볍게 손목을 돌리자 이노의 몸이 휙 회전하며 뒤집혔다.

그러면서 와호장으로 일노의 주먹을 막아냄과 동시에 발을 거침없이 내질렀다.

“허업!”

솟구친 팽무성의 발차기는 어느새 일노의 단전을 노리고 있었다.

두 손을 포개어 막아낸 일노는 일곱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일노는 팽무성의 손에 잡힌 채 쓰러져 있는 이노를 쳐다봤다.

한 손으로 이노를 제압한 채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날려버리는 팽무성이 경악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다른 쪽으로 향했던 두 노인도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헛.”

“쿨럭.”

삼노와 사노가 연달아 튕겨 나오는 믿기 어려운 광경, 이에 일노의 눈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더구나 이 두 사람을 상대로 우위를 점한 것이 새파란 계집인 것이 놀람의 연속이었다.

“어린 년의 손속이 매섭구나.”

“독이다. 조심해라.”

삼노는 어깨와 팔에 박힌 어린표를 빼냈고 사노는 팔의 혈을 짚어서 손바닥의 독이 올라오는 것을 임시방편으로 막았다.

이를 본 일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년에 똥을 제대로 밟았군.’

몇 수 겨루어보지 않았음에도 패색이 짙음을 체감했다.

이 난리가 벌어짐에도 뒤쪽에서 느긋하게 죽을 끓이는 사내의 뒷모습에 일노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뭐야, 벌써 한바탕 놀고 있었네.”

수풀을 헤치고 등장한 무각은 한 노인을 질질 끌고 왔다. 일노가 혹시 몰라 숲속에 숨겨 둔 막내, 오노였다.

제대로 얻어터진 듯 얼굴 반쪽이 부풀었고 한쪽 팔은 부러진 듯 기괴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사패는 숲속에 은신한 오노의 기척을 바로 눈치챘었다. 남궁혁이 말한 작은 동물이 바로 오노였다.

이를 보던 남궁혁은 죽을 젓던 국자를 놓곤 등을 돌려 일노를 향해 말했다.

“다섯 분의 무공과 인상착의를 보아하니 산원오노로 보이는데 맞습니까.”

산원오노(山元五老)는 산원문이라는 멸문한 문파의 마지막 제자들이었다.

남궁혁이 자신들을 알아보자 일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맞네. 젊은이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것은 드문 일인데 자네는 누군가.”

그제야 남궁혁은 포권을 하며 일노에게 예를 갖추었다.

“후배는 무림에 검호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에 일노를 비롯한 다른 노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창천검호!”

“그렇다면 저 후기지수들은 사패인가.”

“어쩐지...”

사패의 명성이 산원오노 같은 노고수의 귀에도 들어갔는지 산원오노는 팽무성 일행을 보며 바로 사패라는 이름을 유추했다.

일노는 낭패를 본 얼굴을 하다가 아직도 이노의 손을 놓지 않고 있는 팽무성을 향해 물었다.

“우리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겠네. 사제를 놔줄 수 있겠는가.”

허나 팽무성은 이노를 놔주지 않았다.

“시작은 당신들이 했지만, 끝을 내는 건 우리인 것 같습니다.”

팽무성은 산원오노를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일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던졌다.

각패와 접힌 괴황지였다.

“보아하니 우리 말고도 끌어들인 이가 있더군. 그 괴황지에 위치가 적혀 있으니 그곳을 피해서 가면 편히 갈 수 있을 걸세.

각패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무림에는 자신의 각패를 가져온 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때문에 무림인은 목숨과 비견된 큰 은혜를 입지 않는 이상 각패를 타인에게 주는 일은 없었다.

일노는 팽무성에게 목숨값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노의 말에도 팽무성이 별 반응 없자 삼노와 사노도 자신의 각패를 던졌다.

“우리의 것도 내지.”

“사형을 놔주시게. 부탁하네.”

이를 보던 팽무성은 절대 놓지 않던 이노의 손을 놔주곤 말했다.

“각패는 사양하겠습니다. 괴황지만 가져가지요.”

“사정을 봐주어 고맙네.”

상황이 일단락되자 부상을 입은 노인들은 당화련에게 임시로 치료를 받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팽무성은 일노를 쳐다봤다.

“이런 일은 왜 맡으신 겁니까. 산원문은 오랜 정파였고 산원오노도 그 길을 이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만약 산원오노가 일전의 염라회 낭인처럼 살려둘 가치가 없는 악인이었다면 팽무성은 가차 없이 죽였을 것이다.

산원문의 맥을 잇기 위해 협을 실천하며 명성을 쌓아온 것을 팽무성도 알기에 손속에 사정을 둔 것이었다.

팽무성의 질문에 일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의 말대로 우리는 산원문을 위해 평생을 바쳤네. 그 노력 덕분인지 이 년 전에는 산원문을 다시 개파 할 수 있었네.”

산원문이 개파 했다는 말에 일행들은 일노의 얘기에 집중했다.

“허나 문파는 무공과 제자만 있다고 굴러가는 것이 아니지.

이 년이 지나니 모아놓은 돈은 바닥났고 우리는 이 일의 제안을 받았지. 그런 시시한 이야기라네.”

일노의 얘기를 듣던 이노는 부목과 붕대를 감은 자신의 손을 보며 말했다.

“그저 문파를 위해 눈 딱 감고 한 번만 하면 될 일이라 여겼는데, 까마득한 후배들이 들으니 매우 부끄럽군.”

“그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행보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가 아는 거지요.”

이노의 말을 삼노가 받았고 사노와 오노가 일노에게 청했다.

“대사형. 선금으로 받은 것도 그냥 돌려줍시다.”

“제자들에게 신의를 가르치며 떳떳지 못한 돈으로 먹고 입히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사제들의 말을 듣던 일노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파를 하고 잠시 마음이 풀어졌나 보다. 원래 우리가 하던 대로 하자꾸나.”

치료를 끝내고 죽 한 그릇씩 얻어먹은 산원오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모로 신세만 지게 되었군. 호남에 들를 일이 있으면 찾아오시게.”

“호남의 산원문. 기억하겠습니다.”

이에 산원오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산원오노가 사라지자 일행들은 일노가 주고 간 괴황지를 펼쳤다.

이 근처의 지리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었고 중간중간 점이 찍힌 곳이 있었다.

“이 점이 고수가 대기하는 위치인가.”

“점을 피해서 가면 시간이 늦어지겠습니까?”

충분히 정면으로 돌파할 수는 있지만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게 제일 좋았다.

팽무성의 물음에 감석태는 점의 위치와 지리를 가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용할 길을 예상하고 배치를 해 놓은 것 같소. 살짝 돌아서 가도 상관없으니 경로를 조정하겠소.”

“그렇게 하시죠.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슬슬 잘 준비를 합시다.”

일행들은 모닥불을 주위로 둥글게 자리를 잡아 잠을 청했고 팽무성은 홀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팽무성은 종종 나뭇가지를 던져넣으며 넘실거리는 불꽃을 멍하니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도 틀어지면 마교가 어떻게 나올까.’

흑상을 삼키는 것은 마교도 전쟁에 앞서 중요하게 여길 사안이 분명했다.

흑상의 일까지 틀어진다면 마교도 커다란 자극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팽무성이 전생에 겪지 못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전생의 기억에 의존할 수는 없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나 팽무성은 그동안 자신이 끼친 영향으로 바뀐 낯선 미래를 마주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들 팽무성은 도를 놓지 않을 것이다. 그 낯선 미래도 전생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놔둘 수는 없으니.

“팽 오라버니.”

팽무성의 옆으로 당화련이 자리 잡았다.

“안 자고 있었네.”

“잠이 안 오더라고요.”

팽무성은 낮에 당화련이 삼노와 사노를 상대로 싸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암기는 최대한 자제하고 오로지 권장으로 두 노인을 상대했었다.

“요즘은 장법을 수련하는 것 같던데.”

당화련은 요새 암기보다는 녹연독장을 비롯한 권장법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전에 독마군과 싸우면서 느꼈어요. 제가 근접전이 많이 부족해요.”

지닌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점을 보완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했다.

“좋은 생각이야.”

당화련은 팽무성의 눈빛이 평소와 다름을 바로 알아차리곤 슬쩍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냥 마교를 생각하고 있었다.”

팽무성은 전생의 부분은 빼놓고 마교에 대한 얘기를 이어갔다. 당화련도 팽무성의 이야기를 듣곤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꼬았다.

“확실히 우리 때문에 마교가 실패한 적이 많았죠? 울분이 터질 만하죠. 화가 쌓여서 갑자기 들고 일어날 수도 있겠네요.”

당화련의 농담이 섞인 말에 팽무성도 실소를 지었다. 당화련은 손가락에 꼬아진 머리카락을 풀며 말했다.

“굳이 마교의 움직임을 예상하려 하지 마요.”

“응?”

“팽 오라버니가 제갈세가처럼 머리가 아주 뛰어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다가 잡생각이 많아지거나 헛발질을 할 수 있어요.”

당화련은 팽무성을 보며 무릎에 턱을 괴었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해요. 앞을 가로막으면 부수고 다시 나아가고. 마교도 그런 식으로 상대하면 언젠가 끝이 보이겠죠.”

당화련의 말을 듣던 팽무성은 흠칫한 얼굴을 하더니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낮에 그 어르신들도 그랬잖아요. 안 하던 짓을 하니 호되게 대가를 치렀다고 하면서요.”

팽무성은 손을 들어 당화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에 당화련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팽무성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손길을 타는 귀여운 여우를 연상시켰다.

“그래,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지금껏 그래왔듯이.”

당화련은 슬쩍 눈을 치켜들어 불꽃에 비친 팽무성을 바라봤다.

처음 볼 때는 저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팽무성의 눈빛도 잘게 떨리는 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단단했고 불굴(不屈)의 기세가 담겨져 있었다.

호수처럼 고요한 눈빛을 띤 팽무성을 보며 당화련의 눈꼬리도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 * *

일노가 준 괴황지를 참고한 덕분에 몇 번의 습격은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길을 바꿨음에도 조우하는 적이 있었지만 사패는 손쉽게 격퇴하고 앞으로 향했다.

덕분에 시간에 맞춰서 흑상의 회담이 열린다는 평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별일 없이 도착했군요.”

“모두 당신들 덕분이오.”

감석태와 두 명의 표사는 안도하는 얼굴로 평리의 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원오노 이후로 나타난 이들도 하나같이 쉽게 볼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경이로운 무공을 지닌 사패가 아니었다면 감석태는 길 한복판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가십시다. 일상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바로 안내해 드릴 테니.”

감석태가 사패를 이끌고 온 곳은 평리에 있는 흔한 객잔 중 하나였다.

의외였기에 무각은 객잔을 살피며 말했다.

“돈이 그리 많다고 들었는데...”

무각의 중얼거림에 감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상은 언제나 평범한 곳을 선호하시오. 세상에는 범인(凡人)이 제일 많으니 그들의 돈을 가져오려면 자신도 평범해져야 한다고 하셨소.”

그 말에 남궁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흑상의 일상(一商)이 평범이라... 재밌는 분이군.”

잠시 말을 나누는 사이에 사패는 일상이 머물고 있다는 방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흔한 호위조차 없었다. 감석태는 문을 열어주며 자신은 옆으로 물러났다.

“들어가시오.”

사패가 들어선 방은 제법 넓었다. 그 넓은 방 한가운데에 홀로 차를 끓이는 반백의 중년인이 있었다.

인기척이 나자 중년인은 일어나서 사패를 한 번씩 보더니 팽무성에게 시선이 멈췄다.

중년인이 미소를 짓자 팽무성도 살짝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당신이 일상이었군요.”

혼세마왕(混世魔王).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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