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혼세마왕이 마기를 풀어내자 팔다리에 흘러내린 붕대가 거꾸로 떠오르며 흔들거렸다.
전신에서 퍼지는 보랏빛의 음산한 마기는 주변의 공기를 변질시키고 있었다.
영문모를 오싹함과 등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 구상을 비롯한 호위들은 조금씩 올라오는 공포를 숨길 수 없는 게 얼굴에 드러났다.
이 자리에서 평정을 유지하고 침착하게 혼세마왕을 주시하는 것은 팽무성과 일상뿐이었다.
‘마군 여러 명이 등장할 줄 알았더니 마왕이 등장하는군.’
무림에서 활동 중인 마군이 아닌 마왕을 보낸 것으로 마교가 흑상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래대로면 지금 결판이 났겠네.’
원래 일상은 무천궁의 장로를 초빙하려 했다고 말했다.
무천궁의 장로라면 초절정에 도달했겠으나 혼세마왕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었다.
“일단 자리를 정리할까.”
혼세마왕의 눈이 일상을 향했지만, 일상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허공에 꿈틀거리던 붕대가 뻣뻣해지더니 일상을 향해 쇄도했다.
촤악
일상의 목을 꿰뚫기 직전, 도풍이 붕대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이에 힘을 잃고 나풀거린 붕대는 일상의 목에 닿기만 할 뿐 목젖을 찌르지는 못했다.
일상은 붕대의 까끌까끌함을 느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허어.’
일상은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태연한 듯 행동했지만, 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팽무성은 붕대를 베어냄과 동시에 손목을 틀며 적아도로 커다란 반원을 그렸다. 그 반원의 끝에는 혼세마왕이 있었다.
쩌엉
혼세마왕이 장심으로 도를 막아내는데 커다란 쇳소리가 울렸다.
콰직
팽무성이 진각을 밟으며 적아도에 힘을 실어내자 혼세마왕의 뒤쪽 바닥이 갈라졌다.
도에 실린 힘을 두 다리를 통해 바닥으로 흘려낸 것이었다.
그 사이에 혼세마왕의 손에서 떨어진 적아도가 회오리치며 거대한 와풍을 만들어냈다.
쿠아아
일소풍생(一嘯風生)의 초식에 휘말린 혼세마왕은 그대로 산장의 벽을 뚫고 사라졌다.
팽무성은 와풍이 만들어낸 커다란 구멍을 향하면서 기습적으로 권풍을 분출했다.
뻐벅
“컥!”
“크흡!”
단발의 신음과 함께 두 명의 무인이 가슴이 뭉개진 채 쓰러졌다.
이상과 함께 마교에 결탁하기로 한 사상과 육상의 호위들이었다.
팽무성이 자리를 비워야 하기에 혹시 몰라 손을 쓴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일상도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터.
‘뒷일을 부탁하오. 팽 소협.’
일상과 한 차례 눈빛을 교환한 팽무성은 그대로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팽무성이 산장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노린 혼세마왕은 곧장 장력을 쏟아냈다.
이를 예상한 팽무성은 횡으로 장력을 베면서 다섯 줄기의 도기를 날렸다.
수직으로 솟구친 협곡에 발을 디디고 있던 혼세마왕은 그대로 협곡 위로 솟구치며 이를 피해냈다.
그러자 팽무성도 협곡으로 몸을 날렸다.
두 발에 내공을 흘려낸 팽무성은 착의 묘리로 내공을 운용했다.
팽무성과 혼세마왕은 마치 땅에 서 있듯이 절벽을 밟고 내달렸다.
후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팽무성의 머리 위로 혼세마왕의 지팡이가 떨어졌다.
꺼엉
정체 모를 짐승의 머리뼈가 조각된 붉은 지팡이. 혼세마왕의 독문병기인 맹귀곤(猛鬼棍)이었다.
적아도를 머리 위로 올려 막아낸 팽무성은 그대로 맹귀곤을 쳐올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옆구리로 쇄도하는 권력에 혼세마왕은 맹귀곤을 한 손으로 회전시켜 상쇄했다.
“크흐흐. 제법 하는군.”
혼세마왕은 음울한 웃음을 흘리며 협곡 위쪽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에 팽무성도 뒤를 따르며 도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두 고수는 그대로 협곡을 박차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쩝쩝
“크흐.”
무각은 양손으로 닭 다리와 술병을 들고 번갈아 가며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산장 앞에 모인 무인 중에 음식과 술에 손을 뻗는 것은 무각이 유일했다.
마치 잔치에 온 듯한 무각의 긴장 없는 행동에 여러 무인의 시선이 쏠렸다.
“이렇게 맛있는데 다들 손을 안 대네. 아깝게 시리.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하. 무각 아우. 술은 조금만 마시게.”
“어어. 목이 막힐 때만 조금씩 마시고 있어.”
당화련은 고개를 쭉 내밀어 무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각 오라버니. 너무 긴장감이 없는 거 아니에요?”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일단 먹어야지. 배고프면 힘도 못써.”
콰앙
무각의 입에서 살이 다 발라진 닭 뼈가 튀어나오려 할 때 산장 쪽에서 폭음이 일었다.
그 탓에 깜짝 놀란 무각의 목구멍에 닭 뼈가 쏙 들어갔다.
“컥.”
닭 뼈가 걸린 것을 눈치챈 남궁혁이 손바닥으로 무각의 등을 후려치자 입에서 닭 뼈가 쏙 빠져나왔다.
“뭐야?”
닭 뼈를 뱉은 무각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각의 눈에 산장 뒤의 절벽을 밟으며 치솟는 두 사내가 보였다.
팽무성과 혼세마왕이었다.
까가강
두 사람은 수직으로 치솟은 절벽에서 마치 땅을 밟는 마냥 신법을 펼치며 초식을 겨루고 있었다.
도가 그어지고 지팡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협곡에는 커다란 흉터가 생기며 돌무더기가 떨어졌다.
고수라 불리는 이들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절한 움직임이었다.
그 광경에 산장 앞에 모인 무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고수들이군. 누구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저리 움직이려면 어떻게 발을 놀려야 하는 건가.”
팽무성과 혼세마왕은 수십여 초식을 교환하면서 절벽 위로 치솟아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모습을 보던 사패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팽무성의 상대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우리도 도와야 할까요?”
걱정된 당화련이 묻자 남궁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아하니 우리가 나설 상대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이쪽에 집중하자.”
남궁혁이 협곡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진법을 뚫고 등장하는 새로운 무리가 있었다.
뒤이어 다른 무인들도 새로운 기척을 느끼고 입구 쪽으로 하나둘 시선을 틀었다.
“보통 놈들이 아니군.”
사패의 곁에 있던 감석태는 새롭게 등장한 무인들의 흘리는 기세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 기세를 읽어낸 남궁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인들이오.”
짙은 살기를 흘려내는 백 명의 마인.
감출 것이 없다는 듯 지닌 마기를 마음껏 흘려내고 있었다.
협곡을 점점 뒤덮는 마기에 흑상의 무인들은 조금씩 위축되고 있었다.
“보아하니 보통 마인도 아니고 마교의 타격대인가 보네요.”
당화련은 마인들의 무복에 새겨진 월악(月惡)이라는 두 글자와 허리춤의 곡도를 보며 말했다.
그때, 천막에 모인 무인 중에 무복의 상의를 벗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자 안에 검은 무복이 드러났는데 무복을 벗는 이들은 마교와 손을 잡기로 한 구상이 데려온 무인들이었다.
이미 사전에 얘기가 된 듯 이들은 자연스레 진형을 합치며 남은 무인들을 서서히 구석으로 몰기 시작했다.
이를 본 감석태와 사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숫자를 보아하니 대충 구상 중 네 명이 마교 쪽에 넘어간 듯 보이오.”
무각은 무인들의 수를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말했다.
“머릿수가 두 배 차이가 나는군.”
월악대와 무복을 벗은 천막의 무인을 합하면 도합 이백이 넘어갔다.
반면 사패와 감석태 측은 간신히 구십을 넘어가니 일단 숫자에서 열세였다.
차앙
월악대가 일제히 곡도를 뽑아내자 흘려내던 살기가 더욱 진해졌다.
이에 남궁혁이 쓴웃음을 흘렸다.
“팽 아우 못지않게 우리도 고생하겠구나.”
이 자리에 사패를 제외하면 초절정고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사패가 이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숫자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무위를 보이려면 최소한 초월경의 경지에 도달해서 내공의 유한함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무림에서 초월경에 오른 무인들을 달리 절대고수라 칭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머릿수도 밀리고 함께 수련하지 않은 이들이라 검진을 펼치게 할 수도 없다.’
남궁혁이 형세를 가늠해보니 지극히 불리하여 진퇴양난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형세를 뒤집으려면 결국 사패가 새로운 수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남궁혁은 앞으로 나섰다.
“화련아, 너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다른 무인들의 뒤를 봐주거라. 전열 전체를 눈에 담아야 하니 제법 고될 거다.”
“네. 오라버니들도 조심하세요.”
당화련의 독과 암기라면 다수를 상대로 커다란 힘을 발휘할 터.
당분간은 숫자에 휩쓸려 진형이 붕괴하는 일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남궁 형, 그럼 우리는?”
“우리야 별다를 게 있겠느냐?”
남궁혁은 힘차게 검을 뽑으며 서서히 접근하는 월악대를 노려봤다.
“베고 또 베어야지. 단순하게 말이야.”
“그거 좋네. 밥값을 할 때인가.”
무각은 주먹을 움켜쥐며 남궁혁의 옆을 지켰다.
앞으로 나서는 남궁혁과 무각을 확인한 월악대주는 곡도로 두 사람을 겨누며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존명!”
월악대주의 명령과 동시에 검은 파도가 협곡의 끝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백 단위가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정면에서 맞서는 상단 무인들은 위압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촤자작
콰앙
제왕검형의 푸른 검기가 커다랗게 솟구치며 마인들의 가운데를 쓸어냈고, 아라한신권의 권력이 마인들의 진형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무각 아우, 좌측에 둘, 후방에 셋이다.”
“알고 있다고!”
사방에서 곡도가 예리한 빛을 뽐내며 쏟아졌지만 두 사람의 걸음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남궁혁과 무각은 서로의 틈을 봐주며 월악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자신들보다 삼십 보는 더 앞에서 마인들의 돌진을 막아서는 두 사람의 모습에 상단 무인들은 이를 악물었다.
남궁혁과 무각의 선전이 상단 무인들의 가슴에 불을 피워냈다.
“우리도 갑시다!”
무인들과 뒤에 있던 감석태가 소리치며 앞으로 뛰쳐나가자 다른 무인들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 * *
쩌엉
허공에서 팽무성과 혼세마왕이 한 차례 충돌했다가 양쪽으로 떨어졌다.
절벽을 타고 올라서 협곡 위의 평지에 올라선 두 고수는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어디서 갑자기 너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건지. 네가 어지간한 마군보다 낫구나.”
네 명의 마군이 죽고 다섯이 남았지만 팽무성과 비견될만한 마군은 한 명뿐이었다.
‘광마와 검마는 벽을 넘기 직전이니 아직 무리고 권마가 그나마 해볼 만하겠어.’
비록 적이지만 혼세마왕은 내심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교의 마군들이 상식을 벗어나는 성장 속도를 보이는 이유는 마공의 힘 덕분도 있지만, 마교의 엄청난 지원을 집중적으로 받은 영향도 컸다.
그 지원의 수준은 무림의 명문이나 대문파를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이런 지원도 몇백 년을 힘을 비축한 마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혼세마왕은 자신에 비해 뒤지지 않는 팽무성의 내공을 느끼며 웃었다.
그러자 팽무성에게도 혼세마왕 입 부근의 붕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온갖 기연이 겹쳤나 보군. 간혹 무림에 그런 이들이 있지. 하늘의 축복을 받은 놈들이.”
혼세마왕은 맹귀곤을 땅에 꽂으며 양손으로 기이한 손짓을 취했다.
그러자 맹귀곤을 중심으로 보랏빛 마기가 솟구치더니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그와 동시에 혼세마왕 주변의 공간이 꿈틀거리더니 혼세마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팽무성은 무언가 진법에 갇힌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전생에 혼세마왕과 싸웠기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환마종의 환마계(幻魔界).
혼세마왕의 마기로 만들어낸 환마의 결계.
결계에 빠진 이를 온갖 사특한 환영과 환청으로 현혹하는 공간이었다.
“자. 그 하늘이 이번에도 너를 보살피는지 보자.”
아무것도 없는 위쪽에서 혼세마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쿠르릉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더니 새하얀 뇌전을 떨구었다.
한 줄기가 아닌 수십 줄기의 뇌전이 떨어지니 순간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갑작스레 변화하는 천지조화에도 팽무성은 차분히 도를 휘둘렀다.
꽈릉
그 순간 하얀 세상에 붉은빛이 번졌다. 적천관뢰가 펼쳐지며 솟구친 붉은 벼락이 하얀 벼락을 찢어냈다.
실제 벼락이 아닌 혼세마왕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했다.
“진짜 벼락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혼세마왕(混世魔王).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