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팽무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눈에 담았다. 짙은 보랏빛이 일렁거리는 검은 하늘은 이십 장 너머까지 뻗어있었다.
환환마공(幻換魔功)의 환마계에 빠져들었다는 증거였다.
‘이 더러운 느낌은 오랜만이군.’
환마계를 가득 채운 흥건한 마기는 피부에 벌레가 꿈틀거리는 불쾌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빠지직
팽무성의 전신에서 붉은 뇌기가 휘몰아쳤다. 유형화된 혼원벽력신공의 내공이 주변의 마기를 태워냈다.
그 사이에 주변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와 팽무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벼락 다음은 검, 도, 창 등의 각종 병장기였다.
허공을 빼곡하게 채운 병장기가 팽무성에게 겨누어졌다.
슈슈슈슈슉
장대비처럼 일제히 쏟아지는 병장기들.
심지어 땅을 뚫고 솟구치는 병장기도 있었다.
쩌저정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킨 팽무성은 두 발로 병장기를 쳐내면서도 적아도를 휘둘러 병장기를 깨부쉈다.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적아도를 타고 느껴지는 철이 부서지는 느낌, 소리는 진짜와 다름없었다.
한 호흡에 백여 자루의 병장기를 파쇄한 팽무성의 눈이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전생에서는 실체를 찾을 수 없어 고생 좀 했지만.’
팽무성은 환마계를 가득 채운 마기에 섞인 혼세마왕의 의지를 읽어냈다.
전생의 도왕은 불가능했던 일, 사도천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환마계의 전경을 담아내던 팽무성의 눈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추며 안광을 번득였다.
아직 허공에 떠 있던 팽무성은 몸을 뒤집어 방향을 바꾸었다.
주변에 흩날리던 병장기 조각을 밟은 팽무성이 발목을 튕기자 숲 쪽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팽무성은 날아가는 자세 그대로 전방에 보이는 소나무를 가차 없이 베어냈다.
까앙
나무를 베었는데 쇳소리가 울렸고 팽무성의 웃음이 짙어졌다.
“보인다. 혼세마왕.”
횡으로 그어진 팽무성의 도격을 막아낸 것은 혼세마왕의 맹귀곤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혼세마왕의 눈은 사특한 마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네놈. 어떻게 꿰뚫어 본 거냐.”
팽무성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혼세마왕을 밀어붙였다. 혼세마왕도 환영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듯 파형마곤을 펼쳐내며 맞섰다.
콰콰카쾅
양쪽에서 쏟아지는 강격에 충격파가 연달아 터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흑철로 만들어진 맹귀곤은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며 적아도에 밀리지 않는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오호단문도의 도격이 연달아 다섯 번 쏘아졌지만 혼세마왕은 좌우 사선으로 맹귀곤을 휘둘러 도격을 튕겨냈다.
까가가강
환영이 깨지고 직접 맞붙었지만 혼세마왕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되려 초식 하나하나가 강력한 파혼마곤이 펼쳐지자 그 위력에 간혹 적아도가 뒤로 밀려나기도 했다.
드드득
혼세마왕의 실체가 발각됐다 하여 환영은 끝나지 않았다. 주위의 노송 줄기가 꿈틀거리며 팽무성의 뒤를 덮쳤다.
팽무성은 뒤를 보지도 않고 노송 줄기를 베어내고 맹귀곤을 막아냈다.
앞뒤로 열심히 도를 휘두르는 팽무성을 보며 혼세마왕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손을 좀 더 바삐 움직여야 할 거다. 애송아.”
“그래? 그러도록 하지.”
적아도가 크게 솟구치더니 그대로 혼세마왕을 내려찍었다.
맹귀곤 위로 연달아 폭사하는 붉은 빛.
전박자여(剪撲自如)의 초식이 맹귀곤을 때려 부술듯한 기세로 쏟아졌다.
겨우 두 번의 도격이었지만 팔목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혼세마왕이 눈을 찡그렸다.
삼 보 뒤로 물러난 혼세마왕을 다섯 줄기의 도격이 쫓자, 크게 휘둘러진 맹귀곤이 도격을 박살 내려 했다.
허나 접하는 그 순간, 미세하게 틀어지며 변화를 일으킨 오호단문도에 혼세마왕은 애꿎은 허공에 맹귀곤을 휘두른 셈이 되었다.
“하!”
눈을 부릅뜬 혼세마왕은 맹귀곤을 급히 회수함과 동시에 만영마수(萬影魔手)를 펼쳐서 연달아 베어오는 적아도를 막아냈다.
혼세마왕이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자 덩굴처럼 늘어지는 수영(手影)이 팽무성을 묶어내려 들었다.
동시에 그 위로는 하강하며 풍압을 뿜어내는 맹귀곤이 팽무성의 정수리를 노렸다.
쩌억
대기를 찢는 암귀곤의 섬뜩한 소리에도 팽무성은 산왕군림보를 밟으며 전진했다.
쉬식
횡으로 도를 짧게 쳐내서 수영을 찢어낸 팽무성은 곧바로 도를 상단으로 쳐올렸다.
쩌엉
충돌한 도와 곤을 중심으로 거센 원형의 기파가 터지고 주변의 땅이 주저앉았다.
팽무성이 전혀 밀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혼세마왕의 얼굴을 감싼 붕대가 꿈틀거렸다.
‘십대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는데.’
밀려오는 반탄감에 동시에 물러난 두 사내는 곧바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팽무성은 뛰어오르며 맹호하산(猛虎下山)을 선보였다.
마치 천근추를 펼친 듯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꽂히는 도격에는 천근의 무게가 실려있었다.
혼세마왕은 이를 피하지 않고 맹귀곤을 하단으로 늘인 채 발뒤꿈치를 들어 몸을 회전했다.
회전력이 실린 맹귀곤이 솟구치며 회풍혼망(回風混茫)이 떨어지는 적아도를 거세게 강타했다.
“큭.”
생각보다 강맹한 맹호하산의 힘에 혼세마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콰앙
맹호하산을 막아냈지만, 그 여파로 혼세마왕은 발목까지 땅에 박혔고 팽무성은 발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적아도가 토해낸 거대한 도기가 수십 줄기로 분화하며 혼세마왕의 일대를 휩쓸었다.
적뢰소산(赤雷燒散)의 도기가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작은 번개가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콰카카캉
혼세마왕이 일으킨 바위기둥이 솟아올라 적뢰소산에 맞고 무너져 내릴 때.
그 사이로 솟구친 혼세마왕이 허공에 있던 팽무성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꽝
적아도를 비틀어서 막아냈지만 팽무성은 옆으로 밀려 날아갔다.
그때 주변의 소나무 잎이 일제히 비산하며 암기 마냥 팽무성에게 쏟아졌다.
팽무성이 적아도를 회전시켜 도막을 형성하자 도막 위로 소나무 잎이 무수히 쏟아졌다.
투두둑
잎 하나하나의 위력이 강해서 발이 주르륵 밀렸지만 팽무성은 개의치 않았다.
혼세마왕의 환영은 귀찮은 것이 사실이나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마계를 유지하는 것도 물리력을 지닌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도 막대한 내공과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혼세마왕은 착실하게 소모되고 있었다.
이백 초식 넘게 겨루었음에도 팽무성에게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하자 혼세마왕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네놈에게 이것을 보일 줄이야.”
혼세마왕의 몸에 두르고 있는 붕대의 글자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두 개의 연기 덩어리는 이내 길쭉해지며 사람의 형태를 이루더니 온전한 혼세마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혼세마왕 세 명이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에 팽무성이 적아도를 상단으로 올렸다.
“환환마공 마형혼.”
“이상하군. 네놈이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팽무성의 중얼거림을 들은 혼세마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형혼(魔形魂).
환환마공을 구성 이상 익혀야 비로소 펼칠 수 있는 것으로 내공과 마기를 섞어서 만든 분신이었다.
허나 단순한 형태만 같은 것이 아닌 무공을 펼칠 수도 환영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이런 환마종의 비기를 과연 팽무성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네놈은 살려서 본교에 데려가야겠다.”
본교의 마인들도 본 이가 드문 마형혼을 새파란 후기지수인 팽무성이 아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눈빛을 띤 혼세마왕 셋이 일제히 팽무성에게 쏘아졌다.
세 자루의 맹귀곤이 전방, 후방, 좌측으로 휘둘려졌다.
‘전에는 둘을 상대했는데, 하나를 더 만들 수 있었나.’
전생의 도왕은 두 명의 혼세마왕을 상대하는 것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만약 검제가 도우러 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터.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꾸가가강
거세게 울리는 쇳소리가 끊기지 않고 환마계 내부에서 메아리쳤다.
혼세마왕 셋은 마치 합공을 벌이듯 서로 위치를 바꿔가며 팽무성의 눈을 어지럽혔다.
셋으로 나뉘었음에도 맹귀곤에 실린 힘은 전혀 줄지 않으니 맞서는 상대는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당연지사.
허나 팽무성은 두 눈을 퍼렇게 뜨고 쏟아지는 세 줄기의 암귀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슈육
기습적으로 생성되어 쏘아지는 창을 피하며 솟구친 팽무성은 아래에서 뒤따라오는 혼세마왕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콰앙
이에 합격진이 흐트러졌지만 혼세마왕은 금세 다시 자리를 잡으며 팽무성을 압박하려 들었다.
그때 팽무성이 먼저 산왕군림보로 선수를 치며 거리를 좁혀들었다.
힘차게 휘둘러진 적아도가 맹귀곤을 연달아 받아치고 간혹 혼세마왕은 그 충격에 뒤로 물러나야 했다.
퍼져나가는 다섯 줄기의 도격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세 명의 혼세마왕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놈, 이백 초식을 겨루는 동안 실력을 숨겼나.’
점점 거세지고 현란해지는 팽무성의 도를 보던 혼세마왕의 눈이 잘게 떨렸다.
마치 지금껏 숨겨놓은 힘을 마음껏 풀어내는 것 같았다.
솨악
적아도에서 붉은 도기가 폭사하며 거대한 반월형의 도기를 횡으로 질러냈다.
적호거아(赤虎巨牙)의 초식이 펼쳐지자 그 힘에 밀린 혼세마왕들이 일제히 맹귀곤을 휘둘렀다.
콰앙
그 여파로 삼 장 밖으로 밀려난 혼세마왕이 일제히 환영을 펼쳐내자 하늘에서 우렁찬 울음과 함께 세 줄기의 뇌전이 강타했다.
혼세마왕이 셋이니 환영의 숫자도 세 배였다.
음산했던 환마계가 다시 한번 번쩍거렸지만, 그 빛을 뚫고 붉은 선이 그어졌다.
‘벽력일섬(霹靂一閃).’
중단으로 그어진 벽력일섬은 세 줄기의 뇌전을 쪼개고 혼세마왕 하나를 기어코 꿰뚫고 지나갔다.
아쉽게도 본체가 아닌 마형혼이었는지 두 쪽으로 갈라진 혼세마왕의 몸에서 피 대신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흠.”
마형혼 하나가 깨지자 혼세마왕도 타격을 입었는지 입가의 붕대가 붉어졌다.
“슬슬 힘에 부치는 건가.”
“아직 멀었다!”
혼세마왕의 내공에 맹귀곤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든 채 적아도를 두들겼다.
거암도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위력에 적아도의 도신도 진동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도기와 곤기가 폭풍우처럼 쏟아지며 주변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백여 초식을 주고받은 순간.
화르륵
갑자기 팽무성의 등 뒤로 거대한 불꽃의 장벽이 솟구치며 퇴로가 차단되었다.
어느새 마형혼을 거둔 혼세마왕은 다시 홀로 팽무성과 맞붙었다.
우우웅
끼이잉
병장기에 집약되는 막대한 양의 내공.
적아도와 맹귀곤이 울음을 터트렸고 두 병장기는 중앙에서 다시 한번 격돌했다.
꽈앙
허나 두 병장기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병장기를 통로로 삼아서 팽무성과 혼세마왕이 내공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거칠게 뿜어지는 붉은 뇌전과 보랏빛의 마기. 혼원벽력신공과 환환마공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네놈의 정신이 얼마나 굳건한지 볼까.’
팽무성을 보던 혼세마왕의 눈이 휘어졌다.
환마계를 유지하면서 팽무성과 싸우는 동안 쉬지 않고 환영을 쏟아냈다.
거기에 마형혼을 둘이나 불러냈으니 아무리 혼세마왕이라도 내공의 소모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혼세마왕은 이 내공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혼세마왕이 숨겨놓은 비장의 한 수였다.
‘심마영청마공(心魔靈聽魔功).’
혼세마왕의 입을 막던 붕대가 찢어지자 말라서 갈라진 푸른빛의 입술이 드러났다.
입 주위의 붕대를 찢어낸 혼세마왕은 기이한 법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에 팽무성은 눈을 좁히며 내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화르륵
혼세마왕의 법문에 팽무성 뒤를 막고 있던 불의 장벽이 커다랗게 일렁거리며 어떤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그 울음소리는 오직 팽무성에게만 들리는 귀곡성이었다.
-대주. 우리만 죽게 두고 홀로 사는 거요?
-지금이라도 우리와 함께하자.
-가슴에 구멍이... 살려주세요. 대주!
여러 사내의 비명이 팽무성의 머릿속을 울렸고 뒤이어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
-팽 아우. 나는 아우를 구해줬는데 자네는 왜 나를 지키지 못했나.
-오라버니. 너무 아파요. 피가 멈추지 않아요.
-시주. 소림사를 지키지 못한 것은 너 때문이야.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혼세마왕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른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지가 찢긴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팽호대.
그리고 외팔의 남궁혁과 가슴이 뚫려있는 당화련, 피투성이의 무각까지.
현재의 모습이 아닌 전생의 모습들을 하고 팽무성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살려줘!
-너 때문에...
팽무성은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나타난 이들은 팽무성의 몸에 들러붙었다.
-그만 포기해. 같이 죽자.
-내공을 거둬.
팽무성의 주위로 몰려든 수십의 인원들은 온갖 원망과 저주, 달콤한 말을 번갈아 쏟아내며 팽무성의 마음을 흔들려 했다.
이를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던 팽무성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귀곡성이 난무했음에도 팽무성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부동을 유지하며 불굴의 안광을 흘려냈다.
“닥쳐라. 이 빌어먹을 심마들아.”
미동도 하지 않던 적아도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세마왕(混世魔王).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