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쏟아지는 호우. 반 시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빗방울은 멈추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투투둑
이미 피와 비로 흥건하게 젖은 남궁혁의 무복 위로 빗방울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어깨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에 남궁혁의 신경이 절로 쏠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을 요소였지만 남궁혁의 집중력이 분산되고 있었다.
반 시진에 걸쳐 쉬지 않고 사투를 벌인 탓이었다.
그 틈을 귀신같이 파악한 월악대원들이 좌우로 달려들었다.
채챙
목과 발목을 노리고 베어오는 곡도를 튕겨낸 남궁혁은 곧장 검을 연달아 찔러 넣어 검기를 쏟아냈다.
“후우. 무각 아우. 괜찮으냐.”
남궁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등을 맞대고 있는 무각의 안위를 확인했다.
“나는 아직 팔팔하지.”
마인의 가슴에 주먹을 꽂아 넣은 무각은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호흡이 거칠었다.
남궁혁과 무각이 마인을 쓰러트리자 그 빈자리는 바로 채워졌다.
남궁혁과 무각, 두 사람을 검진으로 포위하고 있던 월악대.
이 두 사내를 포위하고 있는 마인들의 눈에는 시퍼런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듯이 고작 두 사람에게 월악대의 마인이 무려 오십 넘게 쓰러진 탓이었다.
게다가 마구잡이로 덤빈 것이 아니라 검진을 펼치다 당한 것이니 월악대의 자존심은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저놈들도 지쳤다. 피도 제법 흘렸으니 어지러울 테지, 계속 밀어붙여라.”
월악대주가 두 사람의 몸 상태를 살피며 명령을 내렸다.
그 말대로 남궁혁과 무각의 무복에는 곳곳에 찢기거나 베인 상처가 있었다.
월악대주의 명령에 멈추었던 검진이 다시 전개되었다.
두 사람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던 열두 명의 마인이 동시에 곡도를 치켜들며 쇄도했다.
채채채챙
두 사람은 검진에 포위되어 각기 열두 자루의 곡도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남궁혁의 검은 느려졌고 무각의 주먹은 힘이 빠졌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탄탄한 기본기를 자랑하며 월악대의 검진에 맞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월악대주는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마군을 쓰러트렸다더니 과연...’
이 둘을 잡으려면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할 듯 보였다. 월악대주는 두 사람에게서 잠시 눈을 돌려 좌측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월악대 절반과 이상의 무인들을 상대로 일상의 무인들이 죽기 살기로 버텨내고 있었는데 그 중에도 한 여인이 돋보였다.
월악대가 섞인 공세를 버텨내는 것은 당화련의 신묘한 암기술과 수준급의 용독술 덕분이었다.
당화련은 암기와 독을 모두 소모하자 직접 최전선에서 독장을 펼쳐내고 있었다.
꽃에 벌과 나비가 꼬이듯이 월악대의 곡도가 당화련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년도 사패의 일원이라 했던가.’
이 전투가 반 시진이나 질질 끌만 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다 죽이고 상황을 정리하는데 이 각 정도면 충분했다.
사패가 이 전장의 분위기를 바꿔낸 것이었다. 단순히 초절정고수 셋이 있다 하여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사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아니야. 본교에 들어가면 살생부에 대한 건의를 올려야겠군.’
월악대주는 지겹게 쏟아지던 비가 그치는 것을 보며 좀 더 피해가 커지더라도 싸움을 마무리해야 마음을 먹었다.
콰릉
그 순간 우렁찬 뇌성이 협곡에 울렸다.
놀란 월악대주가 하늘을 올려다봤다지만 흩어지는 비구름이 사이로 눈부신 일광이 비치고 있었다.
콰르릉
그때, 다시 한번 뇌성이 울렸다.
수평으로 날아드는 도격이 월악대의 한가운데를 휩쓸었다.
좌우로 주체할 수 없는 거친 변화를 보이는 도격은 마치 하늘의 뇌전과 같았다.
수십 명의 월악대원을 일격에 베어내며 화려하게 등장한 팽무성은 당화련의 앞을 막아섰다.
시야를 가려버리는 커다란 등짝을 보며 당화련은 든든함을 느꼈다.
“팽 오라버니!”
“고생했다. 잘 버텼네.”
팽무성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당화련을 살폈다. 중상은 입지 않았으나 몇 군데 베인 상처가 보였다.
게다가 제법 고된 싸움이었는지 지쳐있었다.
“이제 내가 정리할 테니 쉬고 있어.”
팽무성이 전방으로 시선을 옮길 때 곧바로 눈이 마주치는 사내가 있었다. 바로 월악대주였다.
‘혼세마왕께서 패배하셨단 말인가.’
교주와 천지마신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사세마왕이거늘.
그런 사세마왕의 일인이 새파란 후기지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월악대주는 믿을 수가 없었다.
촤악
팽무성의 도에서 뿜어지는 붉은빛을 보는 그 순간. 월악대주는 죽음을 확신했다.
‘성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허무하게...’
머리와 몸이 분리된 월악대주는 마지막 생각을 끝내지 못하고 뒤로 허물어졌다.
“대주!”
“달라질 것은 없다! 검진을 유지해라!”
월악대주가 갑작스레 죽었음에도 부대주가 침착하게 지휘를 이어갔다.
그 덕분에 월악대는 다시금 전의를 되찾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콰르릉
팽무성은 월악대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왜 무림이 초월경에 오른 고수들을 묶어서 십대고수, 혹은 절대고수라 부르는지.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음에도 천둥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 * *
팽무성이 다시 산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내부의 상황도 정리되어있었다.
마교에 결탁을 찬성했던 네 명의 상인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었다.
일상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이제 구상 중 살아남은 이는 일상을 비롯한 세 명뿐이었다.
“이제 빈 자리가 많이 늘어났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일상은 한때 제자였던 이상의 시신을 잠시 바라보더니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 죽음은 흑상에 속한 모든 이들이 알게 될 터, 마교에 대한 흑상의 강경한 자세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일상을 비롯해 자리에 앉아있던 세 명의 상인은 팽무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팽 소협 덕분에 흑상이 커다란 위기를 넘겼습니다.”
“우리도 흑상의 도움이 필요하니 개의치 마십시오.”
직설적인 팽무성의 말에 일상도 빙그레 웃었다.
“물론입니다. 팽 소협과의 약조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팽무성은 인사를 하곤 탁자의 빈자리를 보며 물었다.
“흑상을 움직이는 구상의 절반이 자리를 비웠으니 당분간은 흑상도 힘들겠군요.”
팽무성의 말에 오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소이다. 흑상은 무림 전역을 무대로 삼는 만큼 그만큼 인재도 많소.”
오상의 말에 일상도 덧붙였다.
“아마 세 자리 정도는 바로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자리를 금적상단의 소단주에게 권유할까 합니다.”
금용만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팽무성이 눈을 반짝였다.
“소단주가 벌써 그렇게 컸나 보군요.”
“회담에 오기 전에 금적상단이 적화상단을 삼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빙음마의 견제에도 계속해서 적화상단을 압박하던 금용만이었다.
그러던 차에 팽무성에 의해 팔이 잘린 청빙음마가 힘을 잃으니 금용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듯했다.
“이제 금적상단은 태원제일상단으로 불리고 짧은 시간에 상단을 이리 키운 소단주는 상계에서 금왕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훗, 이는 본가에도 좋은 소식이로군요.”
이미 하북팽가는 금적상단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금적상단이 커질수록 그 수혜는 점점 커지리라.
금용만을 선점한 팽무성의 선택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일상은 옥패 하나를 팽무성에게 건네주었다.
“흑상의 옥패입니다. 물건을 구매하실 때 가격의 삼 할을 깎을 수 있고, 구하시는 물건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구매권이 제공될 것입니다.”
소문으로는 무림에 이 옥패를 가진 이는 채 열 명이 넘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잘 쓰겠습니다.”
팽무성은 사양하지 않고 옥패를 챙겨 들었다.
팽무성이 자리를 비우자 일상은 삼상과 오상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흑상의 방식대로 전쟁을 준비합시다. 삼상은 무림에 지원할 전쟁 물자를, 오상은 마교의 자금줄 추적을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 바쁘겠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도록 하겠소.”
* * *
주변을 살피던 남궁혁은 웃으며 일행들을 돌아봤다.
“드디어 호북이구나.”
동쪽으로 계속 향하며 섬서의 경계에 있던 이름 모를 산 두 개를 넘자 드디어 호북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사패는 관도 중간에 있는 객잔에 들러서 간단히 요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무한은 머네요.”
만두를 집어 먹으며 당화련이 말하자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무한은 호북의 동쪽에 있으니 좀 더 가야겠지.”
호북성 무한에는 무림맹 본성이 위치했다.
사천의 서신을 전하기 위해 무림맹에 향하고 있지만 팽무성은 그전에 방문할 곳이 있었다.
“남궁 형님, 혹시 죽산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죽산? 아, 특이한 곳이라 알고 있지. 산 전체에 대나무가 빼곡하게 자란 곳이 아닌가.”
죽산(竹山)은 제법 산세가 높은 산인데 산에 자라는 나무가 대부분이 대나무였다.
그리하여 산의 이름도 자연스레 죽산이 된 것이었다.
남궁혁은 제법 짙어진 수염을 쓰다듬다가 문득 물었다.
“죽산에 일이 있나?”
“예.”
“그래? 그 근처에 뭐가 있었던가? 횅한 곳인데.”
“그곳에 천살택문이 있습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사패의 시선이 팽무성에게 향했다.
“팽 오라버니, 천살택문은 왜요? 싹 밀어버리게요?”
무각은 입에 넣었던 소면을 다시 빼면서 미간을 좁혔다.
“잠깐, 거기 살왕이 있는 곳이잖아. 팽 시주, 좀 귀찮겠는데?”
“음, 살왕이 아니더라도 천살택문은 쉽지 않은 곳인데.”
“하하.”
자연스레 천살택문에 쳐들어가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사패의 반응에 팽무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팽무성은 일행들을 한 번씩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천살택문이 제 외가입니다.”
“네?”
“이건 몰랐군.”
당화련은 토끼눈이 되어 깜짝 놀랐고 남궁혁의 눈썹도 위로 솟구쳤다.
무각은 소면을 씹던 입이 벌려지더니 옆으로 국물이 새고 있었다.
팽무성은 사패에게 사정을 가볍게 설명해주었다. 가솔들도 모르는 비사였지만 이들에게는 믿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렇다면 가서 외조부를 뵈러 가야지.”
“예.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객잔에서 나온 팽무성 일행은 살짝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죽산으로 향했다.
죽산은 장강의 지류에 걸쳐있었는데 그 탓인지 짙은 안개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죽산은 일 년의 절반 이상이 안개가 껴있었다.
사패가 도착했을 때도 죽산에 낀 자욱한 안개가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앞이 거의 안 보이네요.”
“안개 때문인지 햇빛도 잘 들지 않는구나.”
대낮임에도 안개가 낀 죽산은 스산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사패는 죽산 내에 있다는 천살택문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무작정 안쪽으로 향했다.
반 시진 정도 산을 올랐을 때, 팽무성의 걸음이 멈추었다.
“기의 흐름이 이상하네.”
이 주변의 기가 다른 곳과 달리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팽무성의 말에 다른 일행들도 기감을 끌어올려 확인했다.
눈을 다시 뜬 무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팽 시주, 진법 같은데?”
남궁혁은 주변의 안개를 유심히 살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안개와 진법이 발생시킨 안개가 섞인 듯한데.”
육안으로는 구별할 수 없었지만 보통 무림인보다 훨씬 예민한 기감을 지녔기에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것 같습니다.”
“들어갈까요?”
당화련의 물음에 팽무성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각패 하나를 꺼냈다.
예전에 천살택문 산서지부에서 받은 천살택문의 각패였다.
팽무성은 도병에 각패를 묶어서 고정하곤 적아도를 진법 안으로 날렸다.
“소왕이 천살택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팽무성은 내공을 실어서 진법 쪽으로 소리쳤다.
반 각 정도 기다리자 한 사내가 진법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소왕.”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는 적아도와 각패를 팽무성에게 정중히 건네곤 고개를 숙였다.
“진영(振影)이라고 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진법 안으로 들어선 사패는 진영의 걸음을 똑같이 걸으며 진법을 통과했다.
진법을 빠져나와도 짙은 안개는 그대로였는데 안개 너머로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진영의 안내로 가까이 가자 그 그림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안개 너머로 드러난 광경에 팽무성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마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성벽이었다.
이전에 봤던 사도천의 성벽만큼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산세와 맞물려 조화를 이룬 산성(山城)인지라 무림인도 돌파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살문이 이렇게 현판을 걸어놓은 곳은 처음 보는군.”
남궁혁의 시선은 성문 위에 걸려있는 천살택문이라는 글씨가 적힌 현판을 보고 있었다.
“지옥련과 만살회도 현판은 걸어놓지 않습니다. 살문이 보란 듯이 현판을 걸어놓은 곳은 무림에서 본문이 유일할 것입니다.”
설명하는 진영의 목소리에는 천살택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끼익
그 사이에 성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성문 사이로 천살택문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살택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