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천살택문의 본성에 들어서자 여느 성처럼 평범한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성 내에는 안개가 끼지 않네요.”
“이것도 진법 때문인가?”
당화련과 무각의 물음에도 진영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팽무성은 마을의 전경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정교하게 깎인 목검을 들고 저들끼리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과 좌판의 물건을 침 튀기며 흥정하는 사람들.
“이곳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네.”
이를 들은 진영은 팽무성이 보던 곳을 함께 바라보며 말했다.
“소왕, 혈루문을 떠올리셨군요.”
귀신같은 눈치를 지닌 진영에 팽무성은 혀를 내둘렀다.
“맞다. 그곳은 유령마을 같았는데 천살택문은 다르군.”
“아마 천살택문의 가르침이 다른 살문들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 말에 마을을 구경하던 사패의 시선이 진영으로 향했다. 팽무성도 궁금하다는 듯 진영을 쳐다보자 진영은 말을 이어갔다.
“보통 살문은 유년부터 훈련을 시켜서 감정을 마모시키고 종래에는 없애버리지요. 감정 없는 살인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영은 저들끼리 웃으며 칼싸움을 벌이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본문은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시키되 없애지 않습니다.
도구가 아닌 감정을 지닌 인간이어야 살법(殺法)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계라면?”
팽무성의 물음에 진영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암살 대상도 사람이니 그를 이해하고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
생존과 삶에 대한 열망으로 위기 시에 잠력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 밖에도 각기 다른 가르침을 여러 선임에게 받았습니다.”
무림인에게도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내면, 마음의 공부였다.
팽무성이 보기에 진영은 살수보다는 무림인에 가까워 보였다.
“사람마다 마음이 제각각이니 감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정의나 깨달음도 제각기 달랐습니다.
이것만은 남이 가르칠 수 없는 영역일 것입니다.”
팽무성 일행은 진영의 말을 듣는 것으로 천살택문의 정체성과 추구하는 살법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이것이 천살택문이 중원의 수많은 살문 위에 군림하는 이유인가.”
남궁혁은 진영의 말이 제법 감명 깊었는지 색다른 눈으로 진영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구가 아무리 예리한들 사람보다 뛰어날 수는 없으니.”
답하는 진영의 목소리에는 천살택문에 대한 자부심이 실려있었다.
살수들에게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천살택문의 살수들은 그들만의 살도(殺道)를 걷고 있었다.
“어째 내가 이곳에 있고 진영 시주가 소림에 갔어야 올바를 것 같은데 말이지.”
무각은 아무것도 없는 민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고요하고 잔잔한 진영의 분위기는 살문보다는 소림이나 무당에 더욱 어울렸다.
“그런데 이런 것을 저희에게 알려주셔도 되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천살택문의 비전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화련의 물음에도 진영은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입술의 호선을 그릴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리 거창한 비밀도 아닐뿐더러 이 마을에 있는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소왕의 일행분들이시니까요.”
마을 안으로 쭉 들어가던 진영은 어느 평범한 목조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문주께서 기거하시는 곳입니다.”
“이곳이...”
팽무성은 목조건물을 둘러봤다.
살왕이 머무는 곳은 예상외로 지극히 평범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집에 비해서 조금 크고 작은 마당이 딸려있을 뿐이었다.
“팽 오라버니, 우리는 나중에 인사드릴게요.”
당화련의 말에 남궁혁과 무각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외조부와 손주의 첫 만남이었다.
자신들의 존재는 방해만 될 터, 잠시 물러났다가 나중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맞았다.
당화련의 심도 있는 배려에 팽무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맙다.”
“뭘요.”
이에 남궁혁은 진영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 마을에도 객잔이 있습니까?”
“가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영은 팽무성에게 고개를 숙이곤 사패를 이끌고 멀어져갔다.
“흐음.”
팽무성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인지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고 괜히 마음이 출렁였다.
‘이 몸이 반응하는 걸까.’
마음을 다잡은 팽무성은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을 통해 대청으로 들어가니 작은 체구의 노인이 바깥의 마당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팽무성이 대청으로 들어서자 뒷짐을 지고 있던 노인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럼에도 노인은 등 돌리지 않고 여전히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팽무성도 아무 말 없이 노인에게서 살짝 떨어져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팽무성은 노인과 같은 시선으로 마당을 주시했다.
‘무엇을 보고 계신 걸까.’
노인이 보고 있는 마당에는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을 뿐, 전체적으로 휑했다.
일다경이 조금 지났을 때, 허리가 굽은 노인, 살왕의 입술이 벌어졌다.
“너 어미가 좋아했던 목련 나무다.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심었던 거다.”
살왕의 말에 나무에 맺힌 회백색의 목련을 보던 팽무성이 작은 탄성을 흘렸다.
“제법 많이 컸군요.”
살왕에게 있어서 목련 나무는 팽무성이나 다름없었다.
팽무성의 생일이 해마다 찾아올 때마다 지금처럼 나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보며 살왕은 얼굴도 모르는 손주의 성장을 상상하곤 했었다.
“그래, 벌써 이십 년이 훨씬 지났으니. 이 나무는 앞으로 너를 볼 일이 없다 여기고 심은 것인데...”
말을 흐리던 살왕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팽무성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팽무성도 고개를 돌려 살왕을 바라봤다.
자신의 조부라는 노인은 지극히 평범했다.
얼굴의 주름과 검버섯, 굽은 허리는 강호의 여느 노인과 다를 바 없었다.
눈이 내린 듯한 흰 눈썹에 가려진 눈빛에서도 살왕이라는 존재의 흔적을 읽을 수 없었다.
팽무성이 살왕을 살폈듯이 살왕도 팽무성을 훑었다. 다만, 이목구비 하나하나 세세히 살피는 눈길에서 살왕의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는 눈길을 받는 팽무성도 진하게 느끼고 있어서 무언가 마음이 우중충해졌다.
팽무성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살왕은 팽무성의 전신을 보더니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너 어미는 순한 인상에 키가 작았는데, 너는 호랑이 같은 외모에 덩치는 장사로구나. 팽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어.”
“예. 할아버님.”
어렵사리 할아버님이라는 단어를 내뱉자 팽무성은 목이 먹먹해졌다.
어찌 보면 사공자의 조부일 뿐이지, 팽무성에게는 그저 살왕이라는 노인일 뿐이었다.
허나 팽무성의 육체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어딘가 깊은 곳에서 영문 모를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팽무성은 곧바로 큰절을 올리며 감정을 다스렸고 살왕도 처음으로 들어보는 할아버님이라는 칭호에
애써 의연한 척하며 묵묵히 손주의 절을 받았다.
조손 간의 감격스러운 첫 만남.
하지만 두 사내 모두 말이 많은 편이 아닌지라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팽무성이 말문을 텄다.
“그동안 보내주신 생일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멀리서도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음. 남들에게 내보이기 힘든 외가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저 미안할 따름이구나.”
“아닙니다.”
이 말을 끝으로 대화는 뚝 끊겼다. 또다시 적막이 감돌자 이번에는 살왕이 말했다.
“너에 관한 얘기는 월영, 아니 가월에게 꾸준히 듣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많이 변했더구나.”
살왕이 말한 그날이란 사공자가 암살에 당하고 팽무성이 눈을 뜬 날이리라.
“본래는 내가 직접 나서려 했으나 가월이 천살택문이 드러날 것을 염려해서 말리더구나. 스스로 알아보겠다면서.”
흉수를 모르는 상황에서 천살택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가 정체가 드러난다면 천살택문뿐만 아니라 팽가가 곤란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월의 판단은 당연하였다.
“그랬었군요.”
팽무성은 전생에서도 비슷한 흐름일 것이라 예상했다.
혼자서 조사한 가월이 암살의 배후를 알아차렸을 때는 천살택문은 전쟁 중이었을 것이다.
“지옥련과 만살회는 요즘 어떻습니까.”
팽무성의 물음에 살왕의 흰 눈썹이 올라갔다.
중원삼대살문은 최근 십 년 동안은 조용히 서로의 영역을 지키는 데 충실했다.
십 년 전의 살문 전쟁에서 살왕을 필두로 한 십영에 의해 지옥련과 만살회 두 곳이 커다란 피해를 입은 탓이었다.
그러나 일 년 전부터 지옥련과 만살회가 다시 천살택문을 향해 고개를 내미는 상황이 포착되고 있었다.
“뭘 알고 있는 것이냐?”
“마교가 지옥련과 만살회에도 손을 뻗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에 살짝 붉어져 있던 살왕의 눈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마교... 나의 대에서 다시 맞붙게 되는구나.”
그 말에 팽무성도 놀란 얼굴빛을 띠고 살왕에게 물었다.
“천살택문이 이전에도 마교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까?”
“마도는 무림의 역사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지.
본문의 개파 조사이신 천살제(天殺帝)께서도 당시의 마도인 묵야천(?夜天)을 막아내셨고
그 이후로도 본문은 마도가 나설 때마다 무림에 은밀히 힘을 보탰다.”
“천살택문에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팽무성은 천살택문의 비사를 듣고 나서야 전생의 일이 이해가 갔다.
전생에서 만살회와 지옥련의 힘을 무림맹에 향하게 했다면 전쟁은 더욱 수월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굳이 음지에 숨어있는 천살택문을 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지금에서야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마도가 창궐할 때마다 은밀히 무림에 힘을 보태는 천살택문을 눈엣가시로 여길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님, 남이 무어라 하던 소손은 천살택문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 말에 살왕은 잠시 윗입술을 벌리더니 이내 호선을 그렸다.
천살택문이 이전에 무슨 일을 했든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살문이었다.
그렇기에 명문 세가의 피를 이은 손자의 걸림돌이 되지 않고자 했다.
그랬던 손자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그동안 쌓아온 마음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살왕은 손을 조심스레 뻗어 팽무성의 손등 위에 살며시 얹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렇게 분위기가 한결 풀어지자 살왕은 손주의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팽무성에 대한 정보는 주기적으로 받아서 최근에 흑상과 접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살왕은 팽무성의 입으로 직접 그 얘기를 듣고 싶었다.
팽무성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살왕은 어느새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성아, 아무래도 너와 마교와 악연이 깊은 것 같구나.”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팽무성이 옅게 웃자 살왕도 헛웃음을 흘렸다. 마교라는 강대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즐겁다니.
“마교가 본격적으로 준동하면 본문도 나서서 너를 도울 것이다.”
“사양치 않겠습니다. 할아버님.”
* * *
팽무성과 살왕은 늦은 점심때에 만나서 해가 저물 때까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리를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이제 어색한 벽이 사라지고 제법 조손지간의 느낌이 나고 있었다.
마을의 객잔에 들어서자 사패가 진영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주.”
팽무성과 함께 들어선 살왕을 본 진영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패도 뒤이어 일어났다.
“됐다. 앉아라.”
살왕이 손을 휘젓자 천살택문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았지만 사패는 여전히 서 있었다.
“말학 후배들이 살왕을 뵙습니다.”
남궁혁이 대표로 말하며 포권을 취하자 당화련과 무각도 예를 갖추었다.
이에 살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패를 한 명씩 바라봤다.
“너희의 얘기는 많이 들었다. 들은 대로 출중하구나. 앉아서 얘기하자.”
살왕은 사패 옆에 자리를 잡곤 점소이를 불렀다.
“명아야, 원래 먹던 것으로 두 그릇 가져오거라.”
“예, 문주.”
살왕은 객잔에 와서 자주 식사하는 듯 점소이가 알아서 국수 두 그릇을 말아왔다.
국물이 없는 비빔국수인 열건면(熱乾?)이었다.
“제법 맛나다. 먹어봐라.”
“예. 할아버님.”
팽무성과 살왕이 나란히 앉아서 젓가락질하는 모습을 보며 사패는 저들끼리 눈빛 교환을 하며 웃었다.
“참깨 때문인지 고소함과 감칠맛이 대단하네요.”
“성을 넘나들 때마다 맛집을 들른다고 하더니 맛을 느끼는 혀도 경지에 올랐나 보구나.”
그때 당화련이 계란탕이 담긴 그릇을 살왕의 앞으로 조심스레 밀었다.
“제가 방금 같이 먹어보니 더욱 맛있더라구요. 한번 같이 드셔보세요. 할아버님.”
“할아버님? 으하하.”
당화련의 귀여운 애교에 살왕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당화련이라는 아이로구나.”
“네.”
살왕의 반응이 괜찮자 당화련도 웃음이 짙어졌다.
살왕은 팽무성과 당화련을 한 눈에 담으며 흐뭇한 웃음을 보였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다.’
살왕은 돌연 자신의 딸이 팽진연을 데리고 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제는 손주가 장성하여 여인과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니 보기가 좋았다.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손주가 장성한 것을 봤으니 여한이 없다.’
잠시 아련한 눈빛을 하던 살왕은 당화련을 지나쳐 무각과 남궁혁을 바라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아이들도 마교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겠지. 오히려 앞서서 활약을 해야 할 터.’
그러곤 사패를 보며 씩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천살택문에 왔으니 한 번 암살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살왕의 한 마디에 객잔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무각이 눈을 껌벅거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천살택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