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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101화 (101/200)

101화

팽무성은 바늘처럼 피부를 콕콕 찔러오는 살기를 느끼며 물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살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실 것이라 예상했는데 말입니다.”

“살수의 진면목이라...”

잠시 옛 생각에 잠겨있던 살왕은 입을 열었다.

“아느냐, 무성아. 내가 요왕을 죽일 때 지금처럼 정면에서 상대했다.”

이에 팽무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요왕(妖王). 살왕 이전에 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고수였다.

살왕은 요왕을 죽이고 십대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살수로서 최고의 경지는 천하에 죽일 수 없는 이가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만살회는 은신술에 파고들었고 지옥련은 갖가지 암기, 독, 기관에 심혈을 기울였다.”

살왕을 중심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살기.

허리를 곧게 폈음에도 살왕의 체구는 평범한 노인보다 작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살왕이 작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본색을 드러낸 살왕의 존재감은 무척이나 거대하고 위협적이었다.

“개파조사인 천살제께서는 천하제일살수이면서 천하제일인이셨다.

그렇기에 본문은 무(武)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천하제일의 무력은 그 누구도 죽일 수 있고, 그 어떤 술수도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이 곧 살수 최고의 경지나 마찬가지였다.

살문이면서 무에 치중된 천살택문의 특이한 살법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살왕의 말에서 팽무성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이 천살택문 살수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어찌 되었든 본문의 무공은 죽이기 위한 무공이다. 정파의 무공과 다를 것이니 주의하거라.”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살기에 잔월심법(殘月心法)의 내공이 더해지니, 마치 회백색의 바다를 보는 듯했다.

그 중심에 있는 살왕의 모습은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멈출 줄 모르고 굽이치던 살기의 파도가 암초를 만나듯 출렁이며 뒤로 밀려났다.

빠지직

붉은 뇌기가 허공에서 번쩍이며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의형화된 혼원벽력신공의 내공을 보던 살왕의 눈이 초승달을 그렸다.

“역시 성깔이 좀 있구나.”

살기를 막는 것에 모자라 되려 밀어내며 영역을 넓히는 팽무성을 보며 살왕이 입을 비틀었다.

“하나뿐인 손주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살기를 흘리는 사람은 할아버님이 유일할 것입니다.”

농이 섞인 팽무성의 말에 살왕도 수염을 들썩이며 웃었다.

“어쩌겠느냐, 너의 조부가 살왕인 것을.”

쩌저정

조손이 정겹게 얘기를 주고받는 듯했으나 그 와중에도 파도와 뇌전이 격렬하게 맞붙고 있었다.

두 사내가 서로를 가늠하듯 더 힘을 끌어올리자 주변의 대기가 찢어지는 굉음을 토해냈다.

그 굉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팽무성과 살왕은 동시에 병장기를 뽑아냈다.

먼저 거리를 좁힌 것은 독문병기인 쌍아(雙牙)를 양손에 잡은 살왕이었다.

하늘의 초승달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두 자루의 곡도에 은빛 도기가 스며들었다.

갑자기 땅에서 솟구친 듯 나타난 살왕은 곧바로 팽무성의 목에 우도를 찔러넣었다.

까앙

적아도를 비틀어 쌍아를 튕겨낸 팽무성은 곧장 장법을 내질러 살왕을 밀어냈다.

허나 살왕은 기이하게 발목을 회전하더니, 되려 거리를 좁히며 도기를 날렸다.

‘분위기가 바뀌셨군. 이것도 심리전의 일부인가.’

방금까지 무력을 과시하듯 살기와 내공을 폭사하던 살왕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기세는 물론이고 기척마저 희미해졌다.

바로 눈앞에서 쌍아를 휘두르고 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 마치 귀신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솨솨사삿

어제 진영이 그랬던 것처럼 살왕도 월륜보를 밟으며 월아쌍무를 펼쳐냈다.

그러자 살왕의 신형이 희끗해지며 무지막지한 쾌도가 팽무성의 전신을 난자했다.

콰르릉

팽무성은 쾌(快)에 강(强)으로 대응했다.

적아도가 수직으로 그어지며 쌍아를 일격에 튕겨냈다. 하단을 향했던 적아도가 다시 솟구치며 다섯 갈래의 궤적을 그렸다.

세 개의 도격은 정면으로 쇄도했고 남은 두 줄기는 살왕의 좌우를 스치고 지나서 꺾이더니 배후를 노렸다.

다섯 호랑이에 포위된 형국.

오호포망(五虎捕網)의 초식에 사방이 막히자 살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오. 이것이 오호단문도.’

사방을 점한 오호포망의 도격은 다시 분화하여 촘촘해지고 있었다.

허나 그 도격의 그물에 걸려든 것은 없었다. 갑자기 증발한 듯 살왕이 사라지자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놓쳤다.’

순간 살왕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흠칫한 팽무성은 급히 적아도를 회전시켜 하단을 틀어막았다.

까앙

발목을 베어오던 우도를 적아도가 간발의 차로 막아냈고 오른쪽 허리를 찔러오는 좌도는 장법을 뻗어 막아내려 했다.

팽무성의 장심과 좌도가 접하기 직전, 쌍아를 휘두르던 살왕의 전신에 월륜보의 역회전이 실렸다.

그러자 좌도가 사라지더니 반대쪽에 돌연 튀어나와 왼쪽 허리를 베어냈다.

“호오.”

살왕은 옅은 혈선이 그려진 회색빛의 허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깊게 베려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얕은 상처를 낼 생각도 없었다.

이름 모를 외공에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은 쌍아가 튕겨 나간 것이었다.

“특이한 외공을 익혔구나. 팽가에 이런 무공이 있었던가.”

“철호피공이라는 무공입니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팽무성이 찰나에 펼쳐낸 것이었다. 철호피공 덕분에 살왕의 쌍아가 제대로 허리를 베어내지 못했다.

팽무성의 허리를 베어낸 살왕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암마군처럼 암무에 몸을 숨기는 것도 아니었고 혼세마왕처럼 공간이 일렁이는 전조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살왕은 그저 한 걸음 걷더니 증발한 듯 신형을 감추었다. 가공할 은신술.

천살택문이 무를 추구한다고 하나 결국 살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여태껏 놓친 것이 없는 팽무성의 기감에도 느껴지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할아버님, 무슨 무공입니까?”

“배월와법(背月臥法).”

달의 뒤에서 숨는 수법이라.

허공에서 살왕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으나 팽무성은 여전히 살왕을 찾아낼 수 없었다.

쏴악

서늘한 바람소리와 함께 팽무성의 상단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살왕.

쌍도가 기이한 간격을 유지한 채 베어지며 팽무성의 목과 왼쪽 쇄골을 노렸다.

“흡!”

팽무성은 가공할 반응속도로 적아도를 쓸어올려 쌍아를 위로 쳐냈다.

꺼엉

그러자 살왕은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집더니 되려 팽무성의 하단을 노렸다.

이에 팽무성도 무릎을 접은 채 뛰어올라 장력과 도격을 동시에 쏟아냈다.

카카캉

허공에 뜬 채로 이십여 초식을 주고받던 두 사내는 동시에 각법을 펼치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지닌 무위에 비해 기감은 아직 무른 편이구나. 초월경에 올라 이전에 비해 기감이 몇 배는 예민해졌겠으나 더욱 신경 쓰고 단련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팽무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적아도를 겨누자 살왕도 옅게 웃었다.

“짧은 시간에 성취를 높이려면 직접 위협을 느끼는 것만큼 빠른 것이 없지. 나도 어릴 적에 조부님에게 많이 베였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 말과 동시에 살왕이 다시 팽무성에게 쏘아졌다.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살왕에 팽무성은 부릅뜬 눈을 감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극성으로 월륜보를 밟아내는 살왕은 계속해서 잔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전에 진영이 만들었던 것보다 잔영의 형태가 불안정하고 희미했다.

그런데 그 잔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으니 살왕의 족적을 따라 잔영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그 기이한 광경에 팽무성은 적아도를 바로잡았다.

살왕이 그대로 팽무성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자 어느새 흐릿한 잔영이 안개처럼 뭉쳐서 팽무성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무성아, 간다. 월광육분(月光六分)이니라.”

살왕의 예고와 함께 각기 다른 방향에서 은광(銀光)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잔영에서 여섯의 살왕이 튀어나왔는데 다른 다섯은 잔영임을 알 수 있었다.

총 열두 자루의 쌍아가 월아쌍무의 각기 다른 초식을 펼치며 팽무성을 에워쌌다.

까가가강

꽈릉

이를 악문 팽무성의 손목이 반원을 그리더니 오호굉뢰(五虎轟雷)을 쏟아냈다.

둥글게 휘몰아치는 다섯 갈래의 도격이 달려드는 잔영을 찢어냈다.

‘마치 환(幻)의 극치를 보는 것 같군.’

어찌 보면 소림의 연대구품(蓮臺九品)을 상대하는 기분도 들었다.

잔영은 한 초식씩 펼치고 바로 흩어졌지만 위력만은 진짜라서 엄청난 위협이었다.

다른 잔영이 사라졌음에도 살왕은 정면에서 팽무성을 몰아붙였다.

살왕이 연달아서 기이한 수법을 보여주었으나 팽무성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쏴앙

백호도간(白虎跳澗)을 펼쳐 팽무성이 빛줄기가 되어 쏘아지자 살왕은 쌍아를 비스듬히 들어서 흘리듯 막아냈다.

그럼에도 살왕은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제법 빠르구나.”

차앙

다시금 적아도와 쌍아가 부딪치며 작은 불똥이 튀자 팽무성은 손등으로 적아도의 등을 쳐내 쌍아를 떨구어냈다.

그와 동시에 팽무성은 적아도를 높이 들어 사선으로 베어냈다.

“이제 손주가 재롱을 부려보겠습니다.”

꽈앙

거력이 실린 도격에 이를 막아낸 살왕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멀리 날아갔다.

‘덩칫값은 제대로 하는구나.’

새삼 느끼는 엄청난 파괴력에 살왕은 허공에서 몸을 틀며 힘을 흘려보냈다.

그때 팽무성이 산왕군림보를 밟으며 살왕을 바로 따라잡았다.

“흐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산왕군림보의 압력에 살왕은 눈매를 좁혔다.

운신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확실히 거슬렸다.

콰가강

적아도와 쌍아가 충돌할 때마다 폭음이 요란하게 일었다.

살왕의 수법을 파악한 팽무성은 이전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도록 무소처럼 밀어붙였다.

산왕군림보도 극성으로 펼쳐내어 최대한 살왕의 움직임에 지장을 주었다.

“재미있구나.”

살왕도 팽무성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곤 입꼬리를 올렸다.

월륜보를 밟는 살왕은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물러나며 쌍아를 휘둘렀고 팽무성은 곧장 직선으로 쫓으며 도격을 쏟아냈다.

채채채챙

뒤로 월륜보를 밟으면서도 살왕은 팽무성에 비해 속도가 뒤처지지 않았다.

거기에 검무를 추는듯한 월아쌍무는 회전을 멈추지 않은 채 은빛 도기를 쉬지 않고 뿌려냈다.

‘살왕은 무슨, 살존이라는 별호가 어울리시는구나.’

무림에서는 살수 출신인 살왕을 십대고수의 말석으로 취급했다.

허나 살왕이 보여준 무공은 이미 왕(王)의 수준을 넘어섰다.

내심 감탄하는 것은 살왕도 마찬가지였다.

‘배우는 것도 빠르지만, 제 밑천을 다 드러내지 않았구나.’

살왕은 뒤로 빠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배월와법과 월륜보의 잔영을 통해 팽무성의 눈을 어지럽혔다.

처음에는 말리기만 했던 팽무성이었으나 서서히 정면으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허허허.’

쌍아를 통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반탄력에 살왕은 월륜보를 밟는 간격을 조금씩 넓혔다.

그러자 살왕의 신형이 뒤로 쭉쭉 늘어나며 빠르게 멀어졌다.

살왕이 속으로 웃으며 배월와법으로 다시 몸을 숨겼다. 허나 팽무성은 곧바로 진각을 밟더니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냈다.

까강

어깨를 베어오던 쌍아를 막아내는 팽무성을 보며 살왕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감을 잡았나 보군.’

본래라면 더욱 느리게 반응하여 어깨를 베였어야 했다.

의도한 대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살왕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만약 팽무성이 천살택문에서 태어났다면 천살택문은 또다시 천하제일살수를 배출해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살수의 신분으로 무림에 군림했던 천살제의 전설이 다시 한번 재현되었을 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살왕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상상이로다.’

홀로 이렇게 자립한 팽무성이었다.

이리 훌륭하게 자라주었으니 살왕은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무성아, 천하제일이 되려고 하느냐.”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팽무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할아버님.”

“그래.”

무인은 도검을 맞대며 상대를 알아가는 법.

첫 만남의 대화로 팽무성이 살아온 인생을 알았고 이번에 도를 부딪치며 팽무성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무도(武道)를 알았다.

살왕은 팽무성의 목표가 저 멀리 위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이다. 무성아.’

살왕의 흰 눈썹이 순간 찰랑거렸다.

쉬쉬식

순간 쌍아가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회전하며 쇄도하는 다섯 갈래의 벼락을 갈라냈다.

살왕은 적아도를 거칠게 쳐내고 뒤로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우웅

검명을 토해내는 쌍아에 찬란한 은빛 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날갯짓을 하듯 두 팔을 곧게 펼친 살왕은 그대로 쌍아를 겨눈 채 자세를 낮추었다.

“요왕을 죽일 때 썼던 초식이다. 받아 보아라.”

지금 한순간은 팽무성의 조부가 아닌 오로지 살왕으로서 도를 뻗을 심산이었다.

무림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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