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무림맹주가 사패를 찾은 것은 밤이 제법 깊어진 해시(亥 21~23시) 즈음이었다.
기별을 넣은 당일, 거기에 후기지수가 무림맹주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은 무림맹주도 사패와의 만남을 긴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림맹에서 숙소를 배정받고 휴식을 취한 사패는 말끔한 차림을 한 채 맹주전으로 나섰다.
맹주전은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어 한낮과 같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곳곳에 불빛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의 그림자에는 어김없이 무인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들어가시오.”
무인이 문을 열어주자 맹주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부에도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많았지만,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맹주전이라 이건가. 호위가 철통같네.’
팽무성은 맹주전을 지키는 무인의 수준과 숫자를 머릿속에 담으며 어떻게 돌파해낼지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실제로 돌파할 일은 없겠으나 단순한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었다.
‘흠.’
팽무성이 머릿속으로 그린 가상의 상황에서 맹주전의 호위를 뚫어내고 삼 층에 도달했을 때.
사패는 무인의 안내를 받아 맹주전 삼 층의 무림맹주 회의장에 들어섰다.
‘제법 많군.’
야밤이라 팽무성은 무림맹주만 만날 줄 알았다.
그런데 회의가 열린 듯이 무림맹의 주요 간부들, 오대세가와 구파의 수장 대부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대세가는 남궁, 제갈, 황보가 자리하고 있었고 구파도 소림, 곤륜을 제외한 모든 장문인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쟁쟁한 대문파 수장들을 제치고 유일한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사나웠다.
거기에 목 아래에서 왼쪽 관자놀이까지 이어진 네 줄기의 흉터는 노인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주었다.
“무림맹주를 뵙습니다.”
사패가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었고 남궁혁도 뒤이어 두 손을 포갰다.
“조부님, 강녕하셨습니까.”
무림맹주 남궁구. 남궁혁의 조부이자 무림에는 검존이라 불리는 노인이었다.
남궁혁의 말을 듣던 무각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뜨더니 팽무성에게 전음을 보냈다.
[남궁 형의 조부가 무림맹주였어?]
무각의 전음에 팽무성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너는 어떻게 된 놈이 무림맹주가 누군지도 몰랐던 거냐.]
어찌 보면 무각다운 질문이었다. 이런 데에 큰 관심이 없는 녀석이었으니.
한편 회의장에 모인 강호 명숙들은 눈을 번득이며 사패를 세세하게 살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근래에 무림을 진동시키는 사패의 명성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허허... 놀랍소이다.”
“사패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았군.”
“정파의 미래가 밝습니다.”
명숙 중에 연달아 감탄을 터트리는 이도 있었고 깜짝 놀라 눈만 부릅뜬 이도 있었다.
맹주전에 모인 이들은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니 사패의 무공 수위를 대략이나마 파악해낸 것이었다.
‘소림 제자와 당가의 여식도 대단하지만...’
‘전혀 가늠되지 않는구나.’
‘조만간 새로운 절대 고수가 탄생하겠군.’
팽무성을 본 명숙들은 자신들도 전혀 읽을 수 없는 팽무성의 무위에 경악을 삼켜야 했다.
다른 명숙들과 마찬가지로 남궁구도 팽무성에게 시선이 쏠려있었다.
원래 매서운 눈빛을 지닌 남궁구였지만, 팽무성을 볼 때는 특히 검이 쏘아지는 듯 날카로웠다.
“훌륭하다.”
팽무성을 가늠하던 남궁구는 그저 잘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짓했다.
“앉아라.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사도천의 일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할 따름이다.”
남궁구의 말에 무림맹 간부 몇은 살짝 시선을 떨구었다.
무림맹은 사패 덕분에 사도천과의 무의미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사패가 자발적으로 나섰다곤 하지만 남궁구는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든 것이 무림맹의 무능이라 여겼다.
사도천이 무림맹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정파의 일원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음.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이었으나 남궁구는 팽무성의 목소리에서 허세가 아닌 진심을 느꼈다.
그 사이 팽무성은 소매에서 사천의 서신을 꺼내서 남궁구를 향해 내밀었다.
“사도천주가 보낸 서신입니다.”
팽무성의 말에 명숙들은 저들끼리 쳐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놀랍군.”
“그 오만한 사도천주가 갑자기 서신이라니?”
남궁구가 손짓하자 팽무성의 손에 있던 서신이 두둥실 떠올라 남궁구를 향해 날아갔다.
허공섭물로 서신을 받아낸 남궁구의 안광에서 강렬한 안광이 쏟아졌다.
사천을 떠올리자 남궁구는 얼굴의 흉터가 근질거렸다. 이 흉터를 남긴 장본인은 다름 아닌 사천이었다.
정사대전에서 사천과 맞붙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그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흉터를 만지작거리던 남궁구는 천천히 서신을 뜯어서 읽어보았다.
“흠.”
의미 모를 침음을 흘린 남궁구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서신을 내려놓은 남궁구는 팔짱을 끼더니 팽무성에게 물었다.
“이것을 사도천주가 그냥 내줬을 리는 없지. 어떻게 받아낸 것인가.”
“사패가 해원투전에 나서서 사파인과 맞섰고 저는 사도천주의 한 수를 받아냈습니다.”
그 말에 남궁구를 향해 있던 강호 명숙의 시선이 일제히 팽무성에게 틀어졌다.
“뭣이?”
“믿을 수 없는 얘기로군.”
“후기지수가 어찌...”
명숙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뱉었지만 이내 정면으로 보이는 팽무성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듯하면서도 그 수면 밑에 느껴지는 강렬한 당당함과 자신감을 읽어냈다.
이에 무당파 장문인, 영산 진인이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나 거짓이나 과장을 했으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 의심한다면 저 아이가 쌓아 올린 무(武)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소.”
점창파 장문인, 각선 진인도 덧붙이자 다른 명숙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남궁구가 팽무성에게 물었다.
“사도천의 일을 설명해줄 수 있겠나?”
“예.”
팽무성은 천하제일에 대한 얘기는 빼고 순서대로 천천히 풀어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명숙들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의 앞에 앉아있는 사패를 다시금 바라봤다.
‘사도천주가 왜 굳이 정파의 후기지수를 사패라는 별호를 붙여 치켜세웠는지 알겠다.’
‘적진에 단 넷이 들어가서 적의 인정을 받고 왔구나. 그야말로 훌륭한 패기로다. 이런 아이들을 사패가 아니면 무엇이라 부른단 말인가.’
사패라는 별호가 후기지수에게는 과하다고 생각했던 명숙들도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맹주전에 모인 명숙들은 별 반응 없이 팽무성의 얘기를 들었지만 하나같이 사패를 인정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렇군. 얘기는 잘 들었네. 그래서 사도천주는 무림맹에 동맹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고.”
팽무성의 얘기가 끝나자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사패에 대한 평가는 공통적이었으나 사도천과의 동맹에 대한 의견은 갈리는 탓이었다.
실제로 사도천과 동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팽무성을 언짢게 보는 명숙도 몇몇 있었다.
“팽 소협, 자네의 의기는 훌륭하나 일개 후기지수의 신분이었네. 무림맹의 조율 없이 사도천주에게 동맹을 건의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었네.”
어느 명숙의 말에 팽무성은 차분히 답했다.
“무림맹에서 이미 동맹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의견이 갈렸지만 결국 반대 의견이 컸었지요.”
“음, 잘 아는군.”
명숙은 무림맹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팽무성이 맹의 상황을 훤히 꿰고 있자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사도천주가 무림맹의 손을 잡을 리가 없다는...”
이에 동맹에 반대하는 다른 명숙도 덧붙였다.
“비현실적인 방안에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지, 그것이 아니라 한들 그들은 사파이네.
이십 년 전에 전쟁까지 벌였지. 그들과 정파가 어찌 손을 잡겠나.”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놈들이야.”
동맹을 반대하는 명숙들이 하나씩 입을 열자 팽무성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생도 이런 식이었다.
정파는 협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무인들이고 이런 이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무림맹이다.
허나 이런 정파의 가치에 매몰되어 오로지 정파만 깨끗하고 옳다는 굳은 생각으로 사파나 무천궁을 낮춰 보는 자들도 많았다.
이렇기에 현실을 보지 못하고 무림맹은 마교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저는 사도천 뿐만 전 무림이 힘을 합쳐야 마교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파가 홀로 마교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몇몇 명숙이 목소리를 높였다.
“허허. 남의 힘을 빌린다는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하는가, 어리군, 어려.”
“정사대전을 겪지 않아서 그런 게지요. 사도천의 칼날이 전에는 정파를 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네.”
“정파의 자존심이 있지, 어찌 사파 나부랭이랑... 쯧쯔.”
팽무성의 말을 무시하며 제 할 말만 하는 명숙들을 보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무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꼰대들을 보았나.’
당화련과 남궁혁도 이 상황을 마냥 좋게 보지는 않고 있었다. 다만 배분이 높은 명숙들이다 보니 말을 아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인가.’
영산 진인을 비롯하여 동맹에 찬성하는 명숙들도 가만히 팽무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팽무성이 어떤 답을 내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번에 처음 무림맹에 방문하며 의명석을 봤습니다. 정말 많은 분이 협의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더군요.”
팽무성은 동맹을 반대하는 명숙들을 한 명씩 눈을 마주쳐 말을 이었다.
“그들의 희생과 피로 무림은 지켜졌습니다.
그런데 그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시는 것 같군요. 줄일 수 있다면 한 명이라도 줄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사패도 차례로 입을 열었다.
“사파가 정파와 다른 길을 걷는 것은 사실이나, 마교는 마도(魔道)라는 인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혹여 무림맹이 패배한다면 무림뿐만 아니라 무공을 모르는 민초 같은 약자들도 모두 마교에 집어 삼켜질 것입니다.”
“사파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선을 지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본가의 습격 때 마교는 당가타의 양민들을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자들입니다.”
“마교는 지옥에서 올라오는 야차와 마귀 같은 자들입니다. 어찌 손바닥 하나로 모든 악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사패가 저마다 의견을 피력하자 명숙들은 잠시 말을 멈추곤 생각에 잠겼다.
이에 팽무성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후배가 보기에 지금 무림맹이 협의와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지, 정파를 위해 싸우려는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명숙과 선배들께서 후배들이 따라갈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 말에 남궁구와 양선 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팽무성의 마지막 말에 저마다 다른 의미의 침묵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자들도 있었고 얼굴이 살짝 붉어진 자들도 있었다.
명숙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협의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파.
어느 순간부터 그 순서가 바뀌지는 않았는지, 정파라는 좁은 틀에 갇히지는 않았는지.
팽무성이 던진 화두가 명숙들의 심상에 거친 파형을 일으켰다.
* * *
사패는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회의 중간에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명숙들의 판단에 달린 것이었다.
팽무성이 던진 화두가 명숙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전생과 결과는 달라질 터.
지금은 그저 숙소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혹시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지요.”
허락이 떨어지자 한 중년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젯밤 맹주전 회의에 참여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묵룡당주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남궁혁이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오자 묵룡당주는 눈짓으로 인사하며 말했다.
“맹주께서 자네들에게 부탁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왔네.”
맹주의 부탁이라는 말에 사패가 한자리에 모이자 묵룡당주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등용문은 묵룡당에서 맡았는데 자네들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네. 맹주께서 부탁한 일이시기도 하고.”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팽무성의 물음에 묵룡당주가 씨익 웃었다.
“자네들이 직접 용이 될 물고기들을 골라보겠나?”
묵룡당주의 말에 팽무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 등용문은 특히 오르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무림맹.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