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세 갈래로 갈라져 찔러오는 묵연사의 창.
모용준은 철선을 접어 창을 연달아 쳐냈다.
까가강
쳐내는 반동으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그 순간, 묵연사는 창을 짧게 바꿔 잡은 채 거리를 좁혔다.
‘찰떡 같구나. 도무지 거리를 벌릴 수가 없군.’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는 묵연사에 모용준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철선으로 펼치는 천풍선법(天風扇法)을 익힌 모용준은 원거리에서 선풍을 날리며 싸우는 것이 특기였다.
창보다 더 긴 거리를 요하는 무공이기에 모용준은 비무 시작부터 거리를 벌리려 했다.
허나 귀신같이 눈치챈 묵연사는 모용준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도망칠 생각은 말아야지.’
창이라는 병장기를 든 묵연사는 언제나 거리를 벌려오다가 처음으로 거리를 좁히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싸움을 지켜보며 관객들은 저들끼리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풍룡이 제법 고생을 하는군. 좀처럼 거리를 못 벌리고 있어.”
“그나저나 창을 쓰는 저 후기지수는 누굴까. 무공을 보아하니 평범한 문파는 아닌 듯한데.”
“이번 천룡대회는 새로 두각을 드러내는 인재가 많소이다.”
모용준의 철선이 촤르륵 펼쳐지며 날카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후아앙
반원 형태의 불투명한 선풍이 연달아 대기를 가르고 날아들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칼바람,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피투성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허나 묵연사는 선풍으로 파고들며 창을 힘껏 내질렀다.
선풍이 무더기로 쏟아졌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공백을 묵연사는 놓치지 않았다.
“우오오!”
묵연사의 기합과 함께 백색의 창기가 창날에 집중됐다.
일점에 집중된 묵연사의 찌르기.
창은 한 줄기의 빛살이 되어 몰려오는 선풍을 꼬치 꿰듯이 꿰뚫었다.
빠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모용준이 아껴놓았던 초식, 반월낙풍(半月落風)이 묵연사의 창에 의해 파해됐다.
그 순간, 여태 거리를 벌리려 했던 모용준이 갑자기 묵연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모용준이 노리는 것은 창이 뻗어지며 생기는 오른쪽 어깨의 빈틈.
‘어깨를 못 쓰게 만들면 역전할 수 있다.’
모용준이 힘껏 철선을 찔러 넣자 묵연사는 기다렸다는 듯 창을 잡은 두 손의 간격을 좁혔다.
묵연사는 창을 회전시켜 철선을 쳐내곤 창대로 모용준의 어깨를 되려 찍어냈다.
“끅.”
모용준이 충격에 휘청거릴 때 묵연사는 하단으로 창을 쓸어내 모용준을 쓰러트렸다.
모용준이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턱밑에 창날이 들어온 상황.
“승자, 묵연사!”
“와아아아!”
“꼭 우승해라, 묵연사!”
풍룡 모용준을 꺾은 묵연사에게 이번 천룡대회 최대의 함성과 응원이 쏟아졌다.
관람석에 모인 무림인들은 대부분이 중소문파 출신이었다. 소속이 없는 묵연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전에 무명이었던 일향이 권룡을 꺾었지만 화산파라는 명문 출신이기에 은연중에는 당연하다는 시선이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관람객들은 묵연사의 활약에 제일인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멀리서 묵연사가 모용준을 꺾어낸 모습을 보던 팽무성이 피식 웃었다.
마지막 공방에서 모용준은 묵연사의 허점을 찾은 줄 알겠지만 묵연사가 일부러 드러낸 것이었다.
‘배운 것을 잘 써먹네.’
팽무성은 등용문 때부터 묵연사에 관심이 간 상황이었다. 문파에 소속된 것 같지도 않은데 사룡을 꺾는 무공을 지니다니.
전생에서도 묵연사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팽무성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전생에서는 등용문 때 죽어서 이름을 알리지 못한 건가.’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사룡이 둘이나 떨어졌네요. 그것도 사룡이 아닌 후기지수에게 말이죠.”
방금의 비무로 천룡대회 준결승에 오를 네 명이 결정되었다.
일향, 묵연사, 한선, 연유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둘이나 준결승에 오르자 귀빈석의 명숙들도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풍룡을 꺾은 저 아이의 창법을 아시는 분이 있소?”
“별다른 특징이 없어서 흐음, 마치 삼재검법을 보는 기분입니다.”
“어떤 창법이든 어떻소이까. 예상외로 이번 대회가 아주 재미있게 흐르는군. 어쩌면 우승자가 예상 밖의 인물일 수도 있겠소.”
“내일이 기대되는군요.”
준결승 이후의 비무는 다음날에 시작되기에 귀빈석의 명숙들은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재미있네. 구경하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던데.”
“후후, 사룡 말고도 눈에 띄는 후배들이 많아서 나도 눈이 즐겁더군.”
“등용문에서 활약한 분들이 대회에서도 눈길을 끌던데요. 뭔가 뿌듯한 느낌?”
천룡대회가 생각보다 흥미로웠던 탓인지 사패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팽무성도 비무대 아래에서 몸을 점검하고 있는 묵연사의 뒷모습을 한 번 쳐다보곤 사패의 뒤를 따랐다.
* * *
천룡대회 둘째 날.
준결승에서 일향과 묵연사가 겨루었고 한선과 연유진이 맞붙었다.
풍룡도 별 무리 없이 상대했던 묵연사지만 한창 물이 오른 일향 앞에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초장부터 전력을 쏟아낸 묵연사는 일향과 오십여 합을 겨루었지만 결국 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묵연사를 상대로 여유를 보인 일향의 모습은 용투장에 모인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선과 연유진의 비무는 그야말로 용호상박. 같은 사룡으로 불리며 은연중에 경쟁해온 그들이기에 비무는 더욱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서로가 맞수임을 증명하듯 백이십 합의 긴 싸움 끝에 한 수 차이로 연유진의 검이 한선의 가슴에 닿았다.
그리하여 결승에 오르게 된 일향과 연유진.
준결승이 끝나고 두 시진의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두 후기지수는 용투장의 중앙 비무대에 마주 섰다.
“결승에서 사룡 중 하나와 맞설 줄 알았는데 의외의 상황이네요.”
“우리의 나이에는 무공의 우열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법이라 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사룡이나 아예 다른 이가 이 자리에 설지도 모릅니다.”
잔잔히 웃으며 말하는 일향을 보며 연유진도 살짝 어여쁜 미소를 보였다.
지금 용투장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후기지수는 일향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겸손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니 연유진도 일향을 좋게 보고 있었다.
“일향 도장,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네요.”
“동감압니다. 연 소저.”
비무를 시작하기 전 두 사람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화산파의 일향입니다.”
“검각의 연유진입니다.”
“시작!”
심판이 호령과 함께 뒤로 훌쩍 물러났고 두 검수는 동시에 발검하며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채챙
가볍게 십여 합을 나눈 것으로 탐색전을 마친 두 사람은 맞붙은 검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두 후기지수가 원을 그리며 서로의 빈틈을 가늠할 때 연유진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느릿하게 반원을 그리던 검의 궤적이 정점에 달할 때 갑자기 검이 빠르게 쏘아졌다.
그 모습은 마치 꼬리를 길게 늘어진 채 떨어지는 유성을 보는 듯했다.
검각의 독문검법. 은하유성검(銀河流星劍).
무당파의 태극검법처럼 부드러운 유(柔)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날카로운 쾌(快)를 선보이는 검법이었다.
연유진의 검에 은빛의 검기가 맺혔고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머리칼도 은빛으로 물들었다.
검각의 심법인 은하심법(銀河心法)을 운용할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쏴아아아
갖가지 다른 궤적의 호선을 그리며 쏘아지는 연유진의 은빛 검기는 하늘을 유영하는 유성을 보는 것 같았다.
은빛으로 물든 채 검법을 펼쳐내는 연유진의 모습은 신비한 매력을 띠고 있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월녀(月女)를 보는 듯했다.
용투장의 모든 눈이 연유진의 신비함에 쏠려있을 때 일향만이 연유진의 검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한 호흡에 북두칠성의 방위를 동시에 찌르며 쏘아지는 연유진의 쾌검.
검의 투로가 죄다 곡선이라 검이 닿는 때를 예측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제법 까다로운 쾌검이었으나 상대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연달아 다섯 번을 찔러낸 일향의 검이 계속해서 분화하며 수많은 검영을 만들어냈다.
촤르르
그대로 불어난 검영이 넓게 퍼지며 검기를 막아낼 때 일향의 매화검이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검영이 안쪽으로 꺾이며 연유진을 감싸 안으려 들었다.
마치 거대한 꽃망울에 연유진이 삼켜지는 모습이었다.
“하!”
이에 연유진은 좌우로 좁혀오는 검영을 연달아 베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검을 휘두를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양 일향이 암향표(暗香飄)를 펼치며 접근하자 연유진은 급히 검기를 쏘아냈다.
급히 내지른 검기임에도 네 줄기의 검기가 연달아 날아들고 있었다.
이에 일향의 매화검에도 붉은 검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꽈앙
정면에서 검기를 베어낸 일향은 멈추지 않고 전진하며 검영을 뿌렸고 그 사이로 틈틈이 검기를 날려냈다.
일향의 검이 연유진의 검을 하나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물샐 틈 없이 압박하는 거다.’
일향은 차분하게 매화검으로 검로를 그려냈다.
일향은 은하유성검의 쾌검을 화산파 특유의 변칙적이고 화려한 검초로 찍어누르고 있었다.
“허어, 이번에 눈호강을 제대로 하는군.”
“이렇게 화려한 비무를 다시 보기는 힘들겠지.”
은하유성검법과 이십사수매화검법.
두 무공 모두 특징이 명확하고 화려하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무공이었다.
이 두 무공이 충돌하니 이를 구경하는 관람객들은 비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일향의 검을 상대하던 연유진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자신의 검이 다섯 개의 검영을 분쇄하면 그 뒤로 열 개의 검영이 추가로 날아들고 있었다.
연유진의 쾌검이 점점 빨라질수록 눈앞을 채우는 일향의 검영과 검기의 숫자도 배로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끝을 모르는 꽃밭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아득한 느낌이었다.
후기지수를 상대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적수라 불리던 운룡도 이런 느낌을 줄 수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먼저 지쳐서 쓰러지겠어.’
연유진은 몇 번 검을 맞댄 것으로 일향의 내공이 자신에 비해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일향 도장은 절정의 벽을 넘어선 게 아닐까.’
검을 부딪칠수록 연유진은 일향의 검이 자신의 검과 다른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정의 극에 머물러 있는 연유진은 일향이 초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순간 주위를 살피던 연유진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아.”
연유진은 여러 감정이 섞인 탄성을 짧게 흘렸다. 비무대의 중앙에서 시작했는데 자신은 어느새 비무대의 끝으로 몰린 상황.
다섯 걸음만 뒤로 더 걸어간다면 비무대를 빠져나와서 장외패가 될 판국이었다.
그 와중에도 일향의 검은 쉬지 않고 뻗어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매화까지 피어나고 있었다.
“후흐.”
이대로 밀리는 모습만 보이다 패배할 수는 없는 노릇.
연유진의 검이 크고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 끝에서 시작한 유성이 연유진이 그린 원을 타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은빛 검기가 유성처럼 물굽이 치며 일향이 피워낸 매화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성만하(流星灣河).
연유진이 펼쳐낸 은하유성검의 절초를 직면했음에도 일향은 그저 차분히 매화를 피워냈다.
붉은 매화가 잘게 찢어지며 허공에 분분했다. 그 붉은 빛이 유성만하의 영롱한 은빛이 가리더니 이내 연유진마저 삼켜버렸다.
매화혈우(梅花血雨).
비무대를 한껏 채운 매화가 사라지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연우진이 보였다.
일향은 그 앞에서 매화검을 하단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심판의 선언은 없었으나 관객들은 천룡대회의 우승자가 결정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일향의 손을 잡고 연유진이 일어나는 모습에 관객들은 참아왔던 환호성을 아낌없이 터트렸다.
“우아아아!”
일향의 승리를 선언하는 심판의 목소리는 관객들의 폭발적인 환호에 가볍게 쓸려버렸다.
그때, 남궁구의 웅장한 목소리가 용투장 전체에 울리는 환호를 단번에 잠재웠다.
“천룡대회의 우승자여, 마지막 비무를 벌일 준비가 되었는가.”
관객들도 남궁구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천룡대회의 우승자는 결정이 났지만 천룡대회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천룡대회의 우승자에게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지니, 바로 귀빈석의 강호 명숙 한 명을 지명하여 비무를 벌일 수 있었다.
이 비무가 천룡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미였다.
남궁구의 말에 일향은 귀빈석으로 시선을 틀어 한 사람을 지목했다.
새 물결을 만드는 정파의 인재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