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황학루(黃鶴樓)
무한에 오면 무조건 방문해야 하는 명소이기에 밤낮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장소.
강남 삼대 명루 중 하나로, 황학루 위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절경에 많은 시인이 시를 읊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분위기가 기이했다.
주변을 다니는 사람도 없이 조용했다.
간혹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림맹주를 호위하는 호천대였다.
“남궁 형님,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이에 사패가 남궁혁을 쳐다보자 남궁혁도 영문을 모르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대한 망루인 황학루의 오 층에 오르자 간소하게 차려진 술상과 두 사람이 사패를 바라봤다.
상석에는 사패를 초대한 남궁구가 있었고 그 옆에는 의외의 인물, 묵연사가 앉아있었다.
남궁구와 단둘이 자리하는 게 가시방석이었는지 묵연사는 계단을 올라오는 사패를 보며 살았다는 표정을 보였다.
“맹주를 뵙습니다.”
사패의 인사에 남궁구는 고개를 끄덕이곤 손짓했다.
“다들 앉거라. 아직 올 사람들이 더 남았으니 너희끼리 얘기 나누도록.”
묵연사의 옆에 나란히 앉은 사패는 묵연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묵 소협, 이번 천룡대회는 잘 봤습니다.”
묵연사는 팽무성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팽 소협의 조언 덕분에 천룡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소. 감사하오.”
보아하니 묵연사도 남궁구의 초대를 받고 황학루에 온 듯했다.
후기지수들은 저들끼리 가볍게 얘기를 나누면서도 전망대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웅장하네요.”
“예전에 황학루를 낮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낮에 볼 때와 분위기가 다르구나.”
달빛이 밝은 날이라 어둠이 살짝 걷힌 날이었다. 덕분에 황학루의 풍경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는데 확실히 장관이었다.
남궁혁의 말을 듣던 남궁구도 술잔을 기울이며 고요히 흐르는 장강의 물결을 바라봤다.
“나는 낮보다 밤의 황학루를 더 좋아한다. 운치가 있고 고요하지.”
“사람이 없더니 역시 조부님께서 힘을 쓰셨군요.”
이에 남궁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이렇게 야밤에 황학루에서 머물곤 한다. 무림맹주를 하는 유일한 낙이지.”
“소손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겠지, 무림맹에서도 호천대를 제외하면 극히 일부만 아는 일이니.”
황학루가 무림맹에서 가까운 곳이라곤 하나 엄연히 무림맹주의 행차이기에 언제나 극비로 이루어졌다.
“사도천주, 그자가 아직도 사도천을 휘어잡고 있으니 나도 이 귀찮은 자리를 내려놓을 수가 없구나.”
남궁구는 무림맹주의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무림맹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검존으로서 정파의 구심점을 자처하고 정파의 힘을 하나로 끌어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런 남궁구도 무림맹주의 힘을 쓰는 경우가 두 가지 있었다,
천하에 흩어진 명검을 수집하는 것,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황학루의 경치를 독점하는 것이었다.
남궁구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팽무성의 시선이 전망대 쪽으로 확 틀어졌다.
그와 동시에 남궁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올라오는 계단이 버젓이 있는데 왜 그쪽으로 오는 것이야.”
전망대 바깥쪽에서 갑자기 치솟으며 등장한 노인. 그 모습은 마치 허공답보를 펼쳐 황학루의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어깨에 걸친 피풍의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며 난간에 착지했다.
“내 걸음이 닿는 곳이 곧 길이거늘, 어디로 올라오든 내 마음이지.”
죽립을 쓰고 어깨에는 피풍의. 강호를 떠도는 낭인들과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노인은 죽립 사이로 보이는 푸근한 눈빛으로 남궁구 옆에 있는 후기지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노인의 눈이 팽무성을 보며 가늘어졌다.
순간 노인의 눈에 예기가 서렸는데 마치 검에 겨누어진 듯한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이 노인장은 누구지?’
팽무성을 한번 노려본 노인은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모두 뛰어난 아이들이로군. 이런 아이들을 보면 빨리 제자를 키우고 싶단 말이지.”
중얼거리던 노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술상에 올려진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그 자유분방한 모습에 후기지수들은 노인을 멍하니 쳐다봤고 이에 남궁구가 짤막하게 소개를 해주었다.
“검선이다.”
십대고수 검선(劍仙).
강호에는 검선에 대한 유명한 구절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넓은 천하를 집 삼아 살고, 천하의 한 가운데에서 협의를 행하니, 검선의 검은 위세와 굴복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맹자의 대장부론에서 파생된 이 문장은 검선문(劍仙門)의 정신이며 검선의 정체성을 알리는 구절이기도 했다.
“헛!”
“검선?”
후기지수들이 깜짝 놀라자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검선이니라.”
후기지수들이 급이 일어나서 예를 갖추려 했지만 검선의 기운이 후기지수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됐다. 지금 올라오는 저 노인네도 그렇고.”
검선이 손에 쥐고 있던 오리 다리로 계단을 가리키자 후기지수들의 고개가 동시에 계단을 돌아갔다.
쿵쿵
아닐까 다를까, 한 노인이 창을 지팡이 삼아 계단을 찍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검선이 시골의 평범한 촌부와 같은 느낌을 풍겼다면 창을 든 노인은 마치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회한 명장을 보는 듯했다.
창과 노인의 분위기에 후기지수들은 남궁구의 소개가 없어도 그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창성이시구나.’
검성의 오랜 호적수. 창성(槍聖).
팽무성은 연달아 등장하는 십대고수들을 보며 놀라면서도 조금씩 올라오는 호승심을 억눌러야 했다.
“어서 오게. 창성.”
“오랜만일세, 저번 밀회에 못 봤으니 이 년만이로군.”
창성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검선의 옆에 자리 잡았다.
창성은 팽무성 못지않게 매서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창성은 부리부리한 눈을 껌뻑거리며 후기지수들을 살폈다.
창성도 팽무성을 보곤 옆에 놔둔 창을 슬쩍 쓰다듬었다.
“재미있군.”
팽무성도 창성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곤 입꼬리를 올렸다. 팽무성도 적아도의 도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검선과 창성을 이렇게 뵙는구나.’
검선과 창성은 전쟁이 일어나자 무림맹에 힘을 보탰지만, 혼자서 따로 활동하는지라 전생에서도 볼 기회가 없었다.
그저 저들의 활약상을 나중에 소문으로만 들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투기에 남궁구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도천은 곤륜으로 떠났고 불존은 폐관이니 올 사람은 다 왔군.”
이 말에 이제 다 놀랐다고 생각한 후기지수들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오늘의 만남은 단순한 연회가 아니었다.
이 자리는 정파의 십대고수가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이었던 것이다.
“우리 셋만 만나기에는 적적할 듯하여 이 아이들을 불렀네. 자네들에게 소개해주고 싶기도 하고.”
창성은 사패가 무림 곳곳에서 마교와 부딪쳤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사패라 불리는 애들이지? 확실히 사룡이라는 지렁이들보다는 훨씬 낫군. 이쯤 되야 용이라는 별호를 붙일 만하지. 쯔쯧.”
“허허, 지렁이라니, 말이 심하다. 창성.”
검선의 지적에 창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사룡의 면면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던 것이 누구신가? 어설픈 무공으로 명성에만 취해 있다고 말한 게 아직도 생생하군.”
그 말에 검선은 못 들은 척을 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창성은 그런 검선을 보며 피식 웃더니 사패의 끝에 있던 묵연사를 쳐다봤다.
“그런데 맹주, 저 아이는 누구인가. 맹주가 직접 부를만한 이유가 있을 터인데.”
제법 뛰어난 무공을 지녔지만 주목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룡과 비슷해 보였다.
묵연사도 뜬금없이 자신을 부른 것에 내내 의문을 품었기에 흘끔 남궁구를 쳐다봤다.
이에 남궁구는 묵연사와 창성을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제자로 들일만 한 재목이 보이면 잡아놓으라고. 그래서 잡아서 자네 앞에 내놓은 것이네.”
“제자?”
이에 묵연사의 얼굴이 새하얘졌고 고개를 꺾은 창성은 가늘게 뜬 눈으로 묵연사를 노려봤다.
“너를 배려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 모임의 존재 자체가 극비이니 미리 알릴 수가 없었다. 이해해다오.”
“아... 예.”
묵연사는 남궁구의 사과에도 간신히 대답하고 자신 앞에 있는 술잔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어지간한 일에도 기죽지 않는 묵연사였지만,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창성은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 미친 노인네, 무슨 놈의 눈빛이...’
창성은 묵연사의 뒤편에 놓인 창을 보곤 물었다.
“너도 창을 익혔구나, 그 나이에 홀로 이 경지에 도달했을 리는 없을 터, 사문이나 스승이 어디냐.”
“이 사람아, 사문이나 스승이 있는 아이를 자네에게 소개했겠나?”
남궁구의 말에 창성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군.”
실제로 묵연사가 등용문에 참가하며 낸 서류에 사문과 스승을 적는 곳에는 모두 무(無) 자가 적혀 있었다.
남궁구는 이를 미리 확인하고 묵연사를 데려온 것이었다.
천룡대회에서 묵연사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봤기에 남궁구는 이 서류가 진실임을 확신했다.
“그럼 무공은 어떻게 익힌 것이냐.”
창성의 물음에 묵연사는 차분히 답했다.
“처음에는 도를 잡았습니다.
그러다가 열다섯 때 기연으로 영약과 이름 없는 비급을 얻었습니다.
비급은 반쪽짜리였는데 원래 익히던 도법보다는 뛰어난 듯하여 창으로 바꿨습니다.”
“호오, 온전치 않은 비급으로 홀로 수련하기 고단했을 텐데 이정도면 훌륭하구나.”
가만히 듣고 있던 검선이 짤막하게 칭찬했다. 창성도 굳이 대꾸는 안 했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제법 근성과 재능은 있는 모양인데.’
“창을 들고 지금까지 무공을 익혀온 이유는?”
창성의 질문에 여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묵연사가 처음으로 창성과 눈을 맞혔다.
“고아인지라 살기 위해 무공을 익혔습니다. 지금은 지키기 위해 창을 듭니다. 무림맹 앞에 제 정인이 작은 가게를 합니다.”
마교의 소문이 점점 늘어나던 차에 묵연사가 등용문에 지원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홀로 마교를 막을 수 없지만 무림맹에 힘을 보태면 무림맹이 있는 무한은 안전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창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살고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창을 드는 데 거창한 이유는 필요 없다.”
“호오, 드디어 창성이 제자를 받는 것인가.”
검성의 말에 창성은 고개를 저었다.
“제자는 무슨, 당분간 데리고 다니면서 내가 직접 가늠할 거다.”
창성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직접 데리고 다닌다는 것에 묵연사가 제자가 되는 것은 확실시된 상황이었다.
이에 남궁구가 웃으면서 슬쩍 말을 덧붙였다.
“잘 키워보게, 저 아이가 이번에 검성의 제자에게 패배했거든.”
그 말에 갑자기 창성의 이마와 미간에 굵은 힘줄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검성과 창성은 사십 년을 경쟁해온 호적수. 남궁구에게 검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창성은 마음이 허하던 차였다.
“이거 재미있는 말이로군. 내 제자가 될지도 모르는 놈이 검성의 제자에게 패했다고? 이거 의욕이 솟는구나.”
창성의 얼굴이 더욱 살벌해지자 묵연사는 다시 시선을 깔았다.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던 팽무성은 묵연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는 창성이 제자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구나.’
전생에 비해 달라진 작은 변화가 이런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팽무성은 묵연사를 좋게 보고 있기에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묵 소협.”
“흠, 지금 내가 꿈을 꾸는지 모르겠소.”
묵연사의 어떨떨한 목소리에 옆에서 듣던 다른 사패도 입꼬리를 올렸다.
“자, 대충 정리되었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남궁구는 황학루에 모인 이들을 한 번씩 보더니 얘기를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오랜 친우를 만나 가벼운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무림맹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 얘기가 많지만, 이것부터 시작해야겠군. 염왕이 자신의 별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네.”
남궁구의 말에 훈훈했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염왕(炎王).
사도칠문 염하문의 문주이자 십대고수의 일인이었다.
갑작스러운 십대고수의 죽음에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황학루의 밀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