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평야를 가득 메운 팽가와 언가의 무인들.
대치한 채 서로를 노려보는 무인들의 눈에는 누구 할 것 없이 맹렬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인원이 동시에 기세를 흘려내니 저 멀리서 지켜보던 무림인들도 공기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이들도 얼굴의 웃음기를 지웠다.
마치 직접 전투에 나서는 양 긴장된 얼굴로 두 세가의 진영을 바라봤다.
‘소가주의 말대로 이루어져야 할 텐데.’
공손진을 비롯한 일백의 무림맹도들은 팽가와 언가가 모인 평원에서 가장 가깝게 위치한 언덕을 차지하고 있었다.
언제든 무림맹이 나서야 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빠르게 개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문파 대전이 총력전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만큼 어느 한쪽이 극히 압도적인 양상을 보이지 않는 이상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진주언가의 가솔들은 들어라!”
내공이 실려 평원을 울리는 언사인의 목소리에 팽가 측을 바라보던 공손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언사인은 망루와 비슷한 구조물 위에 앉아서 팽가 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가는 오대세가의 한 가문으로 팽가에 많은 것을 양보하고 배려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욕과 도발뿐.
진주언가는 무력으로 팽가를 굴복시키고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울 것이다!”
언사인의 짧은 연설은 넓게 퍼져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무림인의 귀에도 명확히 들려왔다.
“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뒤이어 진주언가 무인들의 대답이 평원을 울렸다. 진주언가는 언사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언사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팽진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팽진연이 어찌 나올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주화입마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공을 복구해봐야 얼마나 했겠는가.’
언사인의 행동은 진주언가의 사기를 북돋기 위함도 있지만 팽진연의 반응을 보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저 조용히 공격 명령을 내릴까, 아니면 무리해서라도 가주로서의 존재감을 보일까.
팽진연은 그저 천천히 도를 뽑았다.
그러며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언가 무인들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지금이야말로 맹호복초의 때다.”
맹호복초(猛虎伏草)
풀밭에 엎드려 있는 범이라는 뜻으로 이 문파 대전이 바로 팽가가 일어날 시기임을 팽진연은 확신했다.
팽진연은 그저 옆 사람에게 말하듯 잔잔하게 말했으나 목소리에 실린 내공이 예상 이상으로 심후했다.
거기에 힘이 실려 있어 팽진연의 목소리는 화북평야 곳곳으로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팽진연의 모습을 보니 딱히 무리한 것 같지도 않았다. 예상과 다른 모습에 언사인의 눈이 찌푸려졌다.
팽진연은 손에 쥔 도로 당황스러운 눈을 한 언사인을 향해 겨누었다.
“팽가의 호랑이들아, 물어뜯어라!”
우레와 같이 박력 넘치는 팽진연의 함성.
팽진연은 하북팽가 가주로서 그 존재감을 화북평야에 여실히 뽐내고 있었다.
이에 몇몇 무림인들은 감탄을 흘렸다.
“존명!”
팽진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팽가는 동시에 도를 뽑아냈다.
촤아앙
수많은 인원이 동시에 도를 뽑자 예리한 도명이 커다랗게 평원을 뒤흔들었다.
곧이어 팽가의 진영에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앞다투어 언가를 향해 돌진하는 두 타격대. 바로 팽호대와 팽영대였다.
원래 가주전을 벗어나지 않는 팽영대였으나 팽진연이 전투에 참여했기에 따라서 모습을 드러냈다.
팽호대와 팽영대를 양측에 두고 팽진연이 제일 앞에서 내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언사인은 황당한 눈으로 팽진연을 쳐다봤다.
“가주란 자가 선두에 서다니 제정신인가? 막아서라!”
곧장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팽진연을 보며 언사인이 급히 명령을 내렸다.
이에 명령을 기다리던 언가의 병력도 뛰어나가 팽호대와 팽영대의 앞을 막아섰다.
언사인이 있는 중앙에 위치한 철권대와 금기대. 두 타격대는 각기 팽호대와 팽영대의 앞으로 나아가 주먹을 휘둘렀다.
“버러지 같은 팽가 놈들!”
“뭉개주마!”
콰앙
첫 충돌부터 거세게 격돌하며 무인들은 피를 흩뿌렸다. 다만, 피를 흘린 무인들이 모두 언가의 무인들이었다.
팽진연, 팽영대주, 철호가 선봉에 서서 언가의 무인들을 사정없이 베어냈다.
이 셋의 활약에 첫 충돌에 벌써 다수의 무인이 뒤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이에 못지않았다.
팽영대는 명실공히 하북팽가 최강의 타격대였고 팽호대도 현재 팽가 내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대주를 중심으로 삼번진을 펼쳐! 조장들은 자리를 잡아라!”
팽호대 일조장 덕삼이 명령을 내리자 팽호대는 언가의 무인들과 싸우면서도 주변의 동료들과 눈을 맞추고 자리를 찾아갔다.
네 명의 조장을 중심으로 팽호대가 빠르게 진법을 구축하자 덕삼이 철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대주!”
“팽호대. 전진한다!”
적당히 힘을 조절하고 있던 철호는 내공을 끌어올려 철혈맹호도를 거칠게 뿌려냈다.
서걱
살벌한 파육음이 연달아 나고 피분수가 솟구쳐 올랐다. 철호는 피를 뒤집어쓰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이렇게 철호가 만들어낸 틈으로 양측에서 조장들이 달려들어 길을 넓혀냈다.
팽호대는 여섯 가지 검진을 훈련했는데 그 중 삼번진(三番陣)은 철호를 중심으로 적의 대열을 뚫어내는 검진이었다.
금기대도 격렬하게 반항했으나 전력 자체가 팽호대가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금기대주가 철호를 막아서며 간신히 팽호대의 전진이 느려졌지만, 금기대주는 이미 철호에게 두 번이나 베인 상태.
금기대주는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금기대를 밀어붙이는 팽호대는 중간중간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 압도적은 아니었는데.’
‘우리가 많이 강해진 거지.’
팽호대는 자신들의 성장을 실감하자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으며 도를 휘둘렀다.
이에 팽호대의 사기가 끓어 올랐지만, 간혹 너무 흥분해서 제 위치를 벗어나는 자들도 있었다.
그때, 철호가 어찌 알았는지 금기대주의 주먹을 쳐내며 소리쳤다.
“팽호대! 뭐 하는 거냐!”
철호의 고함에 팽호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없었으나 그 고함의 의미를 팽호대는 잘 알고 있었다.
조장들이 급히 대원들을 지휘하며 검진을 다시 재정비했다.
“컥.”
금기대주의 복부에 도를 박아넣은 철호는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팽영대는 팽진연을 보좌하며 철권대를 휩쓸고 있었다.
그 위용에 비하면 아직 팽호대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철호는 그 모습을 보며 짧게 덧붙였다.
“어제 소가주께 들었던 말을 잊지 마라.”
그 말과 함께 철호는 다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팽호대도 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지만 덕삼을 비롯한 대원들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대주...’
덕삼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팽호대는 수련을 끝내고 나온 팽무성에게 한 가지 청을 올렸다.
문파 대전에서 팽무성을 지키며 뒤를 따르게 해달라는 청이었다.
‘하지만 거절당했지.’
팽무성이 자신의 계획대로 날뛰려면, 지금의 팽호대는 아쉽지만 그저 방해일 뿐이었다.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지만, 아직 팽무성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같은 전장에 설 마음이 들지 않는다.
팽무성의 단호한 말에 팽호대는 결국 이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을 상기한 덕삼은 이를 갈더니 소리쳤다.
“팽호대!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할 셈이냐!”
이에 팽호대원의 악 받친 대답이 들려왔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싸워라! 이번 전투로 소가주께 증명하는 거다!”
“예!”
덕삼의 명령에 팽호대는 눈에 독기를 품고 달려들었다.
이러니 강해지고자 하는 일념 하나에 팽무성의 밑으로 모여든 팽호대다운 눈빛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팽호대가 빠른 속도로 강해진 것은 개개인의 열망도 있었지만 나날이 강해지고 명성이 드높아지는
팽무성이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있었다.
팽호대가 아무리 강해져도 팽무성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부질없는 일.
‘소가주께서 부족하다 하시면 더 강해지면 그만이다.’
철호는 뒤에서 올라오는 팽호대의 열기를 느끼며 힘차게 도를 휘둘렀다.
팽호대는 초장의 기세보다 더욱 맹렬히 도를 휘두르며 전진했다.
철권대를 거의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버린 팽영대주는 도를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팽호대의 기세가 좋습니다.”
“왜 저리 끓어오르는 건가.”
팽진연은 주변의 전황을 살피며 물었다.
“팽호대가 아직 소가주의 눈에 못 든 모양입니다.”
“훗.”
팽진연은 웃으며 다시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언가도 가만히 당하지 않는다는 듯 새로운 병력이 막아섰다.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철권대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을 보며 팽영대가 조용히 앞으로 나서 팽진연의 앞을 가렸다.
“팽진연! 정말 미쳤나 보군. 이렇게 깊게 들어오다니.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라.”
언사인은 팽진연과 팽영대의 앞을 막아선 암권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문파 대전에 언사인은 전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전에 팽가를 급습하려 했던 유령대와 같이 언가후가 음지에서 직접 키워낸 타격대를 모조리 끌고 왔다.
암권대도 그중 하나였다.
암권대의 등장을 시작으로 중앙의 전투를 관망하던 언가의 타격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익과 우익의 병력이 움직였지만 팽진연은 오로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팽영대, 뚫어라.”
“존명!”
팽진연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언사인은 팽진연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상상을 했다.
‘너희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느냐.’
언사인은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 * *
“언가의 좌익과 우익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에 팽호대와 팽영대의 퇴로를 막으려는 의도 같습니다.”
수하들의 보고에 본진에서 지휘를 맡고 있던 팽연후도 명령을 내렸다.
“흑호, 적호, 풍도대는 언가의 좌익. 묵선, 진도대는 우익을 맡아라.”
팽호대와 팽영대의 분전에 피가 끓고 있던 팽가의 타격대는 팽연후의 명령이 전달되자마자 앞으로 나아갔다.
“백호대와 천뢰대는 중앙으로. 팽호대와 팽영대를 돕다가 좌익과 우익이 열세에 처한다면 지원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팽연후는 전장 전체를 눈에 담더니 용병술을 바탕으로 세세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팽연후가 눈을 좁히더니 입을 열었다.
“원로원주님.”
팽연후의 부름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팽가호가 다가왔다. 문파 대전인 만큼 원로원도 문파 대전에 가세한 상황.
“전장 곳곳에 언가의 장로들이 보입니다. 원로원에서 저들을 맡아주십시오.”
군데군데 보이는 언가의 장로들은 전장을 누비며 팽가의 무인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벌써 장로들이 나섰나. 저들도 이번 대전에 사활을 걸었군. 다들 가세나.”
팽가호를 필두로 원로들도 전장에 합세하자 전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언가가 본격적으로 나서는데?”
“초반에는 팽가의 기세가 대단했는데 지금은 언가가 치고 올라오는군. 역시 쉽지 않아.”
언덕 위의 무림인들은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각 세가의 타격대가 하나둘 전장에 참여하면서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팽가가 잘 버티고 있소.”
“선전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오. 잘 보면 팽가의 타격대가 우세를 잡은 곳이 제법 많소.”
“솔직히 언가가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모르는 일이군요.”
관람객들은 저마다 평을 내놓으며 결국 어떤 세가가 승리를 거머쥘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패호도가 보이질 않는군.”
“호쾌하다는 소문이 있어서 초반부터 나설 줄 알았는데 아니구려.”
이를 듣던 다른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문파 대전이 시작됐소. 나중을 위해 팽 소협도 힘을 아껴두지 않겠소.”
“음. 일리가 있군. 하긴 권왕도 나서질 않았으니.”
“그런데 권왕이 나오면 다 끝나는 것 아니오?”
“하긴 십대고수가 나서면 그대로 끝이지.”
그러자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던 검선이 입을 열었다.
“팽무성이 십대고수에 필적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러자 시선이 검선에게 쏠렸지만, 이 평범한 노인이 검선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소문은 본인도 들었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지 않소?”
“개인적으로 팽무성은 초절정의 중턱에 머무르지 않을까 싶소.”
“하하, 이렇게 의견이 나뉘니 빨리 팽 소협이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군.”
다른 이들도 같은 마음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이 자리에 팽무성은 없다.’
검선의 기감이 팽가와 언가가 싸우는 전장 주변을 쥐잡듯이 살폈지만 권왕은 물론이고 팽무성의 기척마저 찾을 수 없었다.
‘뭔가를 준비하는 것이냐? 아니면...’
검선은 팽무성을 머릿속에 그리며 계속 생각을 하다가 어떤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흐음... 그 아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검선의 중얼거림을 이번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중앙에서 벌어지는 이변에 온 신경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어엇?”
“넘어진다.”
무림인들은 눈을 크게 뜨고 전장을 바라봤다. 그에 검선도 고개를 내밀고 앞을 바라봤다.
언사인이 타고 있던 이동식 건축물이 절반으로 쪼개져 쓰러지고 있었다.
문파 대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