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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120화 (120/200)

120화

화북평야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 넓은 대지 위로 하북팽가와 진주언가가 다시 집결하고 있었다.

주변의 언덕에도 어김없이 무림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예 언덕에서 야숙을 한 자들도 있었고 근처의 객잔에서 묵다가 아침 일찍 돌아온 이도 있었다.

“이제 시작하는군.”

“전날에 호되게 당해서 그런가? 언가의 분위기가 싸늘하군.”

어제 벌어진 문파 대전의 개전(開戰).

하북팽가와 진주언가는 개전의 중반까지 접전을 벌였다.

허나 팽진연이 언사인을 패퇴시킨 후 전세가 급변했다.

백호대주가 귀령대주를 베어냈고 팽호대와 팽영대는 언사인의 후퇴로 비어버린 중앙의 언가 무인들을 반파시켰다.

그 영향은 알게 모르게 전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거기에 전투가 길어질수록 팽가 타격대의 뒷심이 힘을 발휘했다.

타격대 전원이 영약을 복용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팽가의 사기와 영약의 힘이 가솔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을 터였다.

이러니 패색이 짙어진 진주언가는 우왕좌왕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날의 개전은 하북팽가의 대승이었다.

“본가에서 온 다른 소식은 없느냐?”

“예. 가주.”

오른팔과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는 언사인. 야밤에 본가에서 온 전령에게 팽무성과 언가후가 맞붙었다는 소식을 알았다.

하지만 그 승패가 아직 본가에서 전해지지 않은 상황.

그 결과에 따라 문파 대전의 향방이 갈리는 것을 알기에 계속 소식을 찾았다.

‘설마 아버님이... 아니다. 폐관수련으로 깨달음도 얻으셨지 않았던가.’

언사인은 팽진연에게 당한 상처가 욱신거림을 느끼며 괜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가주, 팽가가 시작하려는 듯합니다.”

어제는 정오에 만나서 겨루었지만, 문파 대전의 전투에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팽가는 전날의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전투를 벌이려 하고 있었다.

팽가의 깃발이 거칠게 펄럭이는 것을 무림맹의 천막에서 지켜보던 공손진은 심란한 얼굴을 했다.

‘역시 문파 대전을 하루 만에 끝낸다는 것은 무리였나.’

팽진연의 호령에 팽가의 타격대가 출격하려는 그 순간.

언덕 위에 모인 무림인들의 눈길이 한곳으로 쏠렸다. 빠른 속도로 평야를 질주하는 두 개의 신형.

마치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조와 같았다. 이를 본 공손진의 눈이 커졌다.

“저기 누가 오는데?”

“엄청난 경공. 보통 고수들이 아니군.”

무림인들이 안력을 높였으나 워낙 빨라서 그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기도 힘들었다.

무림인들 사이에 섞여 있던 검선만이 온전히 그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역시 그렇게 된 건가.’

빠르게 움직이는 두 신형을 따라 검선의 시선도 움직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두 사람의 등장에 팽가와 언가의 진격이 멈췄다.

화북평야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바로 팽무성과 언가후였다.

“소가주!”

“태상가주! 어째서 팽무성과 함께?”

“아버님!”

언가후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던 언사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언가후의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다.

이윽고 다른 가솔들도 얼굴이 굳어졌다.

“태상가주.”

“오른팔이...”

이는 팽가 측에서도 확인했다. 잠시 뒤돌아서 팽가에 얼굴을 보인 팽무성.

팽무성의 흐릿한 미소를 보고 팽진연을 비롯한 가솔들은 팽무성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막내야, 기어코 해내는구나.’

팽진연은 표정 관리를 하면서도 괜히 허리춤의 도병을 손이 붉어지도록 움켜쥐었다.

팽무성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언가후를 쳐다봤다.

이에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언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흠.”

언가후가 뜸을 들이자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 목덜미를 잡히고 싶은 건가.”

이에 언가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가후가 제 발로 화북평야까지 뛰어온 이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목덜미를 잡고 억지로 끌고 가겠다는 팽무성의 엄포가 있던 탓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치욕을 당할 수는 없기에 언가후는 스스로 이곳까지 왔다.

팽무성이 슬쩍 손을 들자 언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언가후는 고개를 들어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언가의 가솔들을 눈에 담았다.

“진주언가는 들어라!”

심후한 내공이 실린 언가후의 목소리.

팽가와 언가 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무림인들의 귀에도 쏙쏙 박혔다.

언뜻 듣기에는 힘이 넘쳤으나 목소리의 끝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주언가는... 이번 문파 대전을 포기한다!”

단어의 선택이 포기일뿐, 사실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가후는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붉어져 있었다. 팽무성은 언가후의 팔을 베어내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진주언가의 패배를 선언시키는 것으로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할 셈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놈 하나에 본가의 대업이... 원통하구나.’

하나 남은 언가후의 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청천벽력과 같은 언가후의 발언.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고 오직 언사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이번 문파 대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크게 흥분한 언사인이 가솔들을 옆으로 밀치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이에 언가후는 그저 눈을 질끈 감았고 팽무성이 입을 열었다.

“언가주. 현실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보면 아실 텐데요.”

언가후와 마찬가지로 팽무성의 목소리에도 내공이 실려 화북평야 널리 울려 퍼지고 있었다.

“후배가 권왕에게 도전해서 승리했단 말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언가후의 오른쪽 소매를 보며 말하는 팽무성.

언사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저 언가후와 팽무성은 번갈아 볼 뿐이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었소. 패호도가 권왕을 꺾었다는군.”

“처음에 잘못 봤다고 생각했는데, 권왕의 소매가 비어 있소.”

무공 수위가 높은 무림인은 내공으로 안력을 높여 언가후의 오른쪽 소매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있었다.

“새로운... 십대 고수의 등장인가.”

금용만이 벅차오른 목소리를 흘리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하하... 상단주!”

“음. 소가주가 인물이긴 하나 보오.”

담영약가주와 은하상단주도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잘 끝난 것 같구나.”

“역시 팽 오라버니네요.”

“이제 팽 시주가 정식으로 십대 고수의 한 자리에 오르겠어. 나도 빨리 따라가야 하는데.”

언덕 위의 모든 사람이 팽가의 승리를 기뻐했지만, 반면 사패는 그저 담담하게 기뻐할 뿐이었다.

팽무성이 고작 권왕에게 질 리가 없다는 것을 이 자리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기랄.”

언사인은 저도 모르게 짧은 욕을 내뱉었다.

권왕의 패배 소식에 주변의 무림인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언사인도 알고 있었다.

언사인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결정은 가주인 내가 내린다. 포기를 안 하면 어떻게 되지?”

“이번에는 나 혼자 진주언가를 상대하도록 하지.”

팽무성의 호언장담에 언사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권왕을 이긴 팽무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십대 고수는 그만한 위력과 무게를 지닌 단어였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언가주도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권왕처럼.”

팽무성의 살벌한 눈빛에 언사인 저도 모르게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이길 수 없다.’

팽무성이 과시하는 거대한 위압감은 언사인을 위축시켰다.

무의식적으로 팽무성에게서 두 발자국 물러선 언사인은 굳게 쥐고 있던 주먹의 힘을 풀고야 말았다.

* * *

‘팔 한 짝으로 끝을 본 것이로구나.’

검선의 눈은 바로 옆에서 보는 것처럼 언가후의 침울한 얼굴을 명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뭔가 허하구나,’

성향, 신념, 무림에서 살아온 방식.

모든 것이 자신과 반대인 권왕.

당연히 어릴 때부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세월이 지날수록 극단적으로 멀어졌다.

그럼에도 저런 언가후의 모습을 보니 검선의 마음이 마냥 좋지 않았다.

‘검성과 염왕이 죽었고, 권왕은 팔을 잃었으니, 우리의 시대가 저무는구나.’

검선은 언가후에게서 눈을 돌려 팽무성을 바라보았다.

‘후후. 허전하고 씁쓸하면서도 안심이 되는구나. 전대의 고수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새롭게 일어나는 뒷물결에 의해 서서히 밀려나고 있음이라.

검선이 팽무성에 이어서 다른 언덕에 있는 사패를 바라볼 때, 언덕의 끝에 있던 무각이 입에 두 손을 가져간 채 소리치고 있었다.

“어이! 도왕(刀王)!”

내공을 실은 탓도 있지만, 목소리 자체도 우렁찼기에 무각의 외침을 못 들은 이가 없었다.

“도왕이라? 그렇군. 이제 패호도가 아니라 도왕이군.”

“권왕을 이겼으니, 당연한 것이지요.”

“도왕이라는 새로운 십대고수의 등장을 이렇게 보는구려. 하북까지 오기를 잘했어.”

무림인들도 팽무성의 도왕이라는 별호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검선도 도왕이라는 단어를 홀로 읊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왕. 나쁘지 않구나.”

팽무성은 멀리서 들려온 무각의 목소리에 피식 웃더니 적아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면서 등을 돌려 하북팽가의 가솔들을 눈에 담았다.

“문파 대전, 하북팽가의 승리다!”

염원하던 순간을 직면한 하북팽가.

가솔들은 팽무성을 따라 도를 뽑아 들고 하늘 높이 들었다.

깃발을 잡고 있던 기수는 힘차게 팽가의 깃발을 펄럭였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아아!”

“하북팽가에서 십대고수가 탄생했다!”

환호를 지르는 가솔들의 얼굴은 이상했다.

기뻐하면서도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

팽무성은 그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몰락하는 하북팽가.

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가솔들.

그저 무력하고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전생의 팽지혁도 그러했으니.

가솔들은 함성을 지르며 기쁨이 아니라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것이리라.

팽무성은 가솔들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마지막으로 팽진연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 눈빛을 교환한 부자는 입가에 웃음이 만연했다.

‘이제야 토대가 마련되었구나. 하북팽가는 이제 시작이다.’

그렇지 않아도 옛 가세를 빠르게 되찾던 하북팽가.

이번 문파 대전으로 얻을 이득도 막대했으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팽가 가솔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울고 웃는 모습을 보던 공손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문파 대전을 하루 만에 끝내버렸군.”

문파 대전이 어제 정오에 시작되었으니 시간으로 따지면 아직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지부장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하북팽가가 이렇게 화려하게 비상할 줄이야.”

무림맹 맹도들은 팽무성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홀로 진주언가에 쳐들어가 권왕을 꺾다니. 이번 문파 대전 보고서가 무림맹에 올라가면 난리가 나겠군.’

* * *

수하의 보고에 중년인은 눈을 찡그렸다.

“문파 대전은 겨우 하루 만에 끝나버렸고, 팽무성은 도왕이라 불린다고?”

“예.”

목소리에서 언짢음이 흘러나왔기에 보고를 하던 이는 고개를 더욱 깔아야 했다.

중년인은 팽가와 언가의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쳐들어가 두 세가를 동시에 쓸어버리려 했었다.

그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흐응. 우리가 준비했던 재미있는 장난을 못 치게 되었네요?”

중년인의 뒤에서 코웃음이 섞인 끈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중년인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바로 얼굴에 살기를 띠었다.

“문파 대전이 닷새 정도 지속할 것이라 말했던 놈의 입을 찢어라.”

“존명.”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걱정했던 수하가 재빨리 방을 나갔고 중년인은 바로 뒤에 있던 여인에게 손을 뻗었다.

“하아.”

손길을 느끼며 교태를 부리던 여인은 중년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대로 무르기에는 아깝지 않나요? 팽가도 큰 피해를 보았을 거예요. 상대는 오대세가였던 진주언가니까요.”

“그렇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세를 회복하기 전에 쳐버리는 것이죠. 마랑문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잖아요? 사도칠문이잖아요.”

“더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자신의 몸을 탐하는 중년인, 마랑문주를 보는 요마군의 새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마랑문주는 이미 판단력을 잃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후훗. 세상의 모든 사내가 내 장난감이나 다름없지. 팽무성, 네놈이라고 다를까?’

요마군은 마랑문주의 어깨를 만지며 자신의 발을 핥는 팽무성을 상상했다.

‘팽무성, 네놈도 내 장난감으로 만들어줄게.’

다시 되찾은 그 이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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