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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막내아들-129화 (129/200)

129화

“사매들, 호흡을 골라!”

검각의 제자들 사이로 몸을 날린 검룡 연유진.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검으로 큰 호선을 그려냈다.

그러자 번득이는 은광과 함께 왜인들의 목젖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가벼운 회전과 함께 연유진이 모래사장에 착지하자 세 명의 왜인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자신들이 상대하던 왜인들을 연유진이 대신 처치해준 덕분에 검각의 제자들은 숨을 고를 틈이 생겼다.

“감사해요. 사저!”

검각의 제자들은 연유진의 뒤로 물러났다.

“후우.”

연유진은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숨을 내뱉었다.

오랜 혈투로 인해 연유진이 입은 백의는 피와 모래로 더럽혀져 있었다.

연유진만 해도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당장 눈앞의 사매들이 위태로워 보여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시네(죽어)!”

왜인들의 의미 모를 고함을 무시하며 연유진은 남은 힘을 모아서 힘껏 검을 찔러넣었다.

왜인들의 검법은 중원과 궤를 달리하면서도 지극히 실전적이라 약한 상대라도 마음을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채앵

반원을 그리며 검을 쳐낸 연유진이 상대의 가슴을 베어내려고 할 때, 앞으로 내디딘 연유진의 오른발이 모래에 푹 들어갔다.

이에 연유진의 검이 멈칫거렸고 이내 전신이 흔들렸다.

‘이런 실수를!’

연유진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래로 뒤덮인 해변에서 싸울 때는 언제나 주변의 지형을 잘 살펴야 했다.

그러나 연유진은 체력과 상황이 극한에 내몰리면서 시야가 좁혀진 것이었다.

그 틈을 왜인은 놓치지 않았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회전시켜 연유진의 허리를 베어냈다.

‘앗.’

연유진은 최대한 허리를 비틀어 피하려 했지만, 왜인의 검은 그대로 짓쳐 들어왔다.

까앙

검이 옷깃을 베기 직전, 어린표가 곡선을 그리며 솟구쳐 검을 튕겨냈다.

왜인은 조그마한 비늘이 날아들어 자신의 검이 튕겨 나가자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비켜라.”

간결한 직선이 왜인의 목 위로 그려졌다.

남궁혁의 검이 왜인을 베고 지나갔고 무각이 승복을 펄럭이며 그 뒤를 따랐다.

“무각 아우, 저기 왜인 다섯 명이 있는 쪽을 도와주거라.”

“알았어.”

남궁혁과 무각은 다른 무림인들을 도우며 왜인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겨우 두 사람이 전장에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서서히 전황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연유진이 멍하게 쳐다봤다.

“괜찮아요?”

“당 소저?”

연유진은 갑자기 등장한 당화련을 알아보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우러 왔어요. 잠시 몸을 진정시키고 따라와요.”

당화련은 연유진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더니 먼저 싸우고 있는 남궁혁과 무각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제야 연유진은 주산군도에 사패가 등장했음을 알아차렸다.

그 생각이 미치자 연유진의 눈은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틀어졌다.

사패가 왔다면 근래에 무림에서 제일 유명한 그 사내도 있을 것이기에.

콰앙

적아도가 가볍게 휘둘러지자 앞을 가로막던 왜인 몇이 피를 뿜으며 하늘을 날았다.

조무래기들은 함께 온 천랑회의 낭인들에게 맡긴 팽무성은 곧장 해변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낭왕과 바다 건너 왜국에서 검성이라 불리는 중년인이 대치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팽무성의 존재에 두 고수는 잠시 싸움을 멈추고 팽무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팽무성도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며 검성이라는 왜인을 눈에 담았다.

공교롭게도 화산파의 검성과 별호가 같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기세는 비등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화산파의 검성을 떠올릴 때마다 코끝에 매화향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과연 왜국의 검성이 이와 같은 강렬한 인상을 자신에게 심어줄 수 있을까.

팽무성의 생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검성은 무슨.”

팽무성의 중얼거림에 왜국의 검성이 미간을 좁혔고 낭왕은 누런 이를 드러냈다.

“어이, 도왕.”

팽무성은 적아도를 거꾸로 잡은 채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북팽가의 팽무성입니다.”

“도왕?”

별호에 왕이라는 단어가 붙자 검성이 경계 어린 눈으로 팽무성을 노려봤다.

중원에 대해 바삭한 것은 아니나 왕이라는 별호를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팽무성은 그런 검성의 사나운 눈빛을 가볍게 흘리고는 낭왕을 쳐다봤다.

“낭왕께서는 허례허식은 좋아하지 않고 지극히 효율적인 것을 따진다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검성은 괜한 불안감에 왼손에 쥐고 있던 장검의 파지를 바로잡았다.

반면 낭왕은 미간을 좁히더니 팽무성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그 웃음소리에 주변의 무인들이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물론이다! 낭인에게 그런 것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지. 다만, 명문 출신인 도왕은 어떠려나?”

낭왕의 물음에 팽무성은 적아도를 천천히 상단으로 올렸다.

“저도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지라...”

“좋군.”

낭왕도 들고 있던 검을 하단으로 내렸다.

낭왕과 팽무성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한 차례 교환하곤 걸음을 옮겼다.

낭왕과 팽무성은 천천히 원을 그리며 위치를 바꿨는데 마치 검성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포위하는 형국이었다.

두 사람의 속셈을 눈치챈 검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네놈들은 무인의 자존심도 없는 것이냐?”

“노부는 그런 거 모른다. 돈이 중요하지.”

“무인의 자존심을 아는 자가 해적질을 하며 약탈을 하는 건가. 우습군.”

검성의 일갈에 맞받아친 두 고수는 동시에 모래를 박차고 앞으로 쏘아졌다.

그러자 일순간 양쪽으로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었다.

인상을 쓴 검성은 허공으로 뛰어오르더니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꽈아아앙

낭왕의 검과 팽무성의 도를 동시에 막아낸 검성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에 팽무성은 곧장 검성을 쫓았고 낭왕은 호선을 그리며 이동하여 검성의 뒤를 노렸다.

콰르릉

적아도가 수직으로 그어지며 검성의 머리를 쪼갤 듯 도기를 쏟아냈다.

뇌성과 함께 오호단문도가 펼쳐지자 이를 정면에서 받아내던 검성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무뿌리처럼 분화하며 쇄도하는 적아도를 보며 검성의 눈이 진지해졌다.

뻗어지는 도격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을 보는 것 같았다.

꽈가가강

연속으로 뻗어지는 이십여 줄기의 도격.

이에 검성은 좌우 대각선으로 검을 빠르게 휘둘러 베어냈다.

검성은 도격을 모조리 막아냈으나 다섯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나야 했다.

이 기묘한 붉은 도와 자신의 검이 맞붙을 때마다 손목이 흔들리는 충격과 저릿한 뇌기가 몰려왔다.

“흠.”

검성은 모래사장에 남은 자신의 족적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이것이 검성의 자존심을 퍽 상하게 만들었다.

‘젊어 보이는데 이런 무술을 지녔는가. 확실히 땅이 넓으니 인재가 많군.’

적아도를 맞받아치던 검성의 검이 배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검성의 검이 날카로운 바람을 품기 시작했다.

풍원류(風原流)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보이자 검성을 중심으로 짙은 칼바람이 몰아쳤다.

검성의 사방을 둘러싼 칼바람은 후미를 덮치던 낭왕의 검도 튕겨내고 있었다.

‘빠르군.’

어찌나 빠르게 휘두르는지 검이 흐릿해져 마치 맨손으로 검풍을 쏘아내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

수십 갈래로 갈라지는 도격을 검성은 일일이 쳐내고도 여력이 남는 듯 팽무성의 급소를 노리고 검풍을 쏘아냈다.

팽무성은 도막을 쳐서 연달아 쏘아지는 검풍을 막아내곤 곧바로 도기를 날려 반격했다.

콰앙

중원과 궤를 달리하는 검성의 검술에 흥미를 느낀 팽무성은 적아도를 크게 휘둘렀다.

팽무성이 일소풍생(一嘯風生)으로 와풍을 일으키자 검성도 검을 높게 치켜들더니 반월형의 거대한 검풍을 쏘아냈다.

파아아앙

대기가 찢기는 소리가 울리는 그사이에 낭왕이 검성의 검풍을 비집고 들어왔다.

“도왕에게만 집중하면 곤란하지.”

길게 솟아오른 낭왕의 검기가 비산했다.

팽무성에게 집중하던 검성은 흠칫하며 급히 허리춤의 단검을 역수로 뽑아냈다.

“크흠.”

“단검으로 막겠다고?”

낭왕이 단검을 겨누는 검성의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낭왕의 검은 피비린내 나는 실전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것. 어중간한 대처로 막을만한 만만한 검이 아니었다.

낭왕의 낭아검법(狼牙劍法)이 그 흉포한 검초를 아낌없이 드러내자 검성은 진땀을 흘렸다.

검성의 신체를 보호하는 갑주가 갈라지며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이리 떼처럼 끊임없이 몰아치는 검을 막아내는가 싶더니, 결국 마지막 검초가 갑주를 뚫고 검성의 허리를 베어냈다.

불에 덴듯한 고통이 허리에서 올라올 때 적아도가 검성의 어깨를 노리고 내려꽂히고 있었다.

검성은 장검으로 적아도를 받아냄과 동시에 단검으로 낭왕의 검을 흘려냈다.

‘빌어먹을 놈들!’

검성은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으나 입밖으로 내뱉을 여유도 없었다.

양쪽에서 벌어지는 합공에서 검성은 대응의 어려움을 느꼈다.

두 사내 모두 고절한 고수인지라 절묘한 때에만 찌르고 들어왔기 때문.

이를 악문 검성은 결국 쌍검으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본래 검성이 사용하는 풍원류는 양손 검술.

허나 괜히 검성이라 불리는 것은 아닌지 한 손으로 펼쳐내는 검법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압!”

단검으로 검풍을 날려 낭왕을 밀어낸 검성은 팽무성을 눈에 담았다.

단검을 땅에 박고 다시 양손으로 장검을 잡아낸 검성은 일격필살을 노렸다.

이런 합공에서 시간을 끌면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젊어서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팽무성의 숨을 먼저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풍원류의 필살기로 끝내주마.’

검성의 검에 주변의 바람이 한데 모여 고요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이에 팽무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검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팽무성의 자세가 낮춰지고 적아도가 비틀어지더니 검성을 향해 겨누어졌다.

샤악

검성의 검극에서 아주 얇고 기다란 한 줄기의 바람이 분출될 때.

꽈릉

붉은빛이 한 번 터져 오르고 뒤이어 뇌성이 울렸다.

섬광과 함께 펼쳐진 백호도간(白虎跳澗).

이에 풍원류의 필살기가 파훼 됨은 물론이고 검성의 애병인 촌정(村正)의 검신도 부러져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에 검성은 허망한 눈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차.’

검성은 필살기를 펼치기 위해 단검을 모래에 박아넣은 것을 떠올렸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이어진 검성의 실책.

그 대가는 목 뒤로 날아오는 낭왕의 검이었다.

“하하.”

헛웃음을 흘린 검성은 직접 보지 않고도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예기로 죽음을 예감했다.

‘이런 타지에서 덧없이 죽는구나.’

푸학

낭왕은 조금의 멈춤도 없이 그대로 검성의 목을 날려버렸다.

검성의 죽음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이에 왜인들은 부리나케 도망가기에 바빴고 무림인 중 일부는 추적에 나섰다.

“검성이라는 이름이 아깝군요.”

“화산의 검성과 인연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럴 만도 하지.”

낭왕은 대꾸하면서도 속마음을 감췄다.

‘이 어린놈, 왕의 실력이 아닌데?’

아무리 십대고수 둘이 합공을 펼쳤다지만 검성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이 검성과 승부를 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검성이 다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은 팽무성이 예상보다 뛰어난 무공을 보인 탓이었다.

이에 낭왕도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팽무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절강의 무림인들은 나란히 마주 선 팽무성과 낭왕을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십대고수가 설마 합공을 펼칠 줄이야.”

“해적 두목 놈도 십대고수 두 명의 합공에는 버티지를 못하는군.”

“패호도가 도왕이라 불린다더니 이렇게 보니 낭왕에 비해 밀리지 않는데.”

대부분의 시선은 팽무성에게 향하고 있었다.

낭왕은 제법 오랫동안 봐서 익숙했지만 팽무성은 여러모로 이목을 끌기에 딱 좋았다.

“낭왕. 무림맹의 일로 왔습니다.”

팽무성이 숨김없이 말하자 낭왕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네놈이 검존 대신 왔단 말이지?”

낭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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