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130화 (130/200)

130화

낭왕은 팽무성의 말을 듣곤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왕이라...”

낭왕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며 계산을 시작했다. 이대로 판을 벌려도 되겠는가?

‘아니다.’

낭왕이 억지를 부려가면서 남궁구를 찾은 이유는 그 명성 때문이었다.

남궁세가 태상가주, 검존, 무림맹주.

무림 전체로 따져도 남궁구의 명성은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런 남궁구와 한 수 겨루었다는 소문만으로 자신의 명성이 한층 더 끌어 올려질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승패는 아주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겨도 져도 낭왕에게 손해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왕은 어떠한가.’

젊은 나이에 권왕을 꺾고 십대고수에 오른 파격적인 인물. 근래에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팽무성일 것이다.

그렇다 한들 다른 십대고수에 비하면 아직 부족함이 컸다.

장래가 촉망되지만, 나이가 어려 아직 십대고수의 말석이라는 느낌이랄까.

낭왕은 팽무성을 다시 눈에 담으며 검성의 애병을 부러뜨렸던 그 초식을 상기했다.

과연 자신이라면 어떻게 막아내고 반격했을는지.

머릿속으로 팽무성의 백호도간을 막아내는 그림을 그려내던 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절대 말석의 실력이 아니다. 왕들의 무공을 뛰어넘었을 확률이 높아.’

팽무성이 정말 말석의 실력을 가졌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십중팔구 낭왕의 손해였다.

그저 권왕에 이어서 팽무성의 명성을 다시 띄워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할 터.

손익을 계산하던 낭왕은 머리가 욱신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무림맹주가 안 오면 창성이나 검선이 올 줄 알았더니.”

낭왕의 생각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팽무성은 그저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침 주변에 보는 눈도 많군요.”

낭왕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절강 무림인들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영 아니군.”

* * *

검성의 해적단을 격퇴한 날에는 커다란 연회가 벌어졌다.

연회는 낮에 피 흘리며 싸우던 모래사장에서 열렸는데 사람들은 이를 신경 쓰지 않고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다.

이는 절강 무림인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왜인들과 싸우던 곳에서 연회를 열어서 전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고 슬픔을 떨치고 가자는 의미였다.

특히 이번에 검성이 이끌던 해적단은 지난 사 년 동안 절강에 지대한 피해를 끼친 원흉이었다.

절강의 무림인들이라면 듣기만 해도 치를 떠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검성의 목을 베었고 왜인들에게도 재기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으니 다시 절강에 모습을 보이기는 힘들 터였다.

이러니 절강 무림인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사패도 그런 절강 무림인 사이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한편 팽무성은 낭왕과 단둘이 대작하고 있었다.

낭왕은 새까만 두 개의 술잔을 대령했다.

그 색깔이나 대접만 한 크기도 특이하지만, 재질이 흙으로 빚은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본 팽무성은 술잔을 들어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무게가 나가자 팽무성은 고개를 들어 낭왕을 쳐다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안 낭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술잔은 철로 만든 것이다. 이러면 어지간한 일에도 깨질 일이 없지.”

대체 무슨 상황에 술을 마시려고 이런 잔을 만든 것일까.

“저 항아리 안에 든 것은 술입니까?”

“그렇다.”

기이한 술잔과 엄청난 양이 담긴 술 항아리를 본 팽무성의 표정이 묘해졌다.

“설마 술로 결판을 내자는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네놈이랑 직접 칼을 맞대면, 되려 노부가 손해를 볼 판이다. 그건 곤란하지. 이 방식으로 하자.”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낭왕은 한 손으로 항아리를 가볍게 들며 팽무성을 쳐다봤다.

이에 팽무성은 자신의 술잔을 들어 낭왕 쪽으로 가져갔다.

콸콸

항아리에서 술이 거침없이 쏟아지며 팽무성이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술잔을 빠르게 채워갔다.

술잔이 채워지면서 낭왕과 팽무성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종종 연회가 벌어질 때마다 술김에 나에게 도전하는 놈들이 있었지. 그럴 때마다 쓰는 방법이다.”

“강호의 노고수들이 쓰는 전통적인 방법이군요.”

팽무성이 들고 있는 술잔에는 낭왕의 내공이 담겨 있었다. 이에 팽무성도 내공을 끌어올려 술잔을 지탱해야만 했다.

“그냥 내공으로만 찍어누르면 재미없지 않으냐. 우리는 조금 다르게 놀아보자.

너는 그 술을 들이켜고 내가 불어넣은 내공보다 더 많은 내공을 술에 실어라.”

술잔뿐만 아니라 술에도 내공을 주입한다. 재밌는 제안이었다.

팽무성은 그제야 낭왕이 왜 철로 술잔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얼마나 버티나 볼까.’

낭왕은 팽무성이 내공마저 자신을 앞서리라 여기지 않았다.

세월의 차이도 나지만 낭왕도 무림을 돌아다니며 기연을 제법 많이 얻었기 때문이었다.

변변찮은 배경도 없는 삼류낭인이 십대고수에 올라 낭왕이라는 별호는 얻는 것은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미있군요.”

“아, 주독은 빼내지 마라.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그래서 딱 보기에도 이런 독한 술을 가져오신 것이로군요.”

팽무성은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목젖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낭왕의 웃음이 비릿해졌다.

‘하북팽가에서 제법 영약을 주워 먹었겠지만 쉽지 않을 거다.’

팽무성은 목이 화끈해짐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낭왕이 가져온 화주 자체도 만만치 않았지만, 진짜는 술에 실린 내공이었다.

보통 무림인이 이런 식으로 내공을 과시할 때 내공을 보통 술잔에 주입한다.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액체 내공을 주입하는 것은 보통 공부가 아니었다.

이처럼 술에 내공을 주입하여 서로의 내공을 겨루는 것은 서로가 초월경에 오른 팽무성과 낭왕의 대작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대결이네.’

낭왕의 내공은 술에도 온전히 담겨 있었고 그 술을 마시니, 마치 침투경에 당한 듯 혈맥에서 낭왕의 내공이 날뛰고 있었다.

팽무성은 혼원벽력신공을 끌어올려 빠르게 낭왕의 내공을 제압해냈다.

찰나에 내공을 해소해내자 낭왕이 짧게 감탄을 흘렸다.

“노부의 내공이 마구잡이로 섞인 것이라 정파와 달리 제법 혼탁할 텐데 잘 버티는구나.”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어디 제 내공도 맛보시지요.”

팽무성이 손을 뻗자 허공섭물에 의해 항아리가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낭왕은 술잔을 잡아 팽무성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내공이 실린 탓에 술 자체의 무게도 상당해졌다.

그 묵직함에 낭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디 한번 맛을 볼까.”

팽무성이 그러했듯이 낭왕도 쉬지 않고 한 번에 술을 모두 들이켰다.

낭왕의 코에서 거친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 이놈. 뇌기를 다루었지.’

화주의 화끈함도 잠시였고 혈맥이 저릿거리기 시작했다.

술에 실린 혼원벽력신공의 뇌기가 꿈틀거리며 낭왕의 혈맥에서 난장판을 피웠다.

제법 강한 기운이지만 이 정도는 낭왕의 선에서 가볍게 해소할 수 있는 정도였다.

낭왕이 술을 마시고 눈을 떴을 때는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짜릿하구나. 좋은 느낌이군.”

도검을 맞대지 않았을 뿐이지 결국은 팽무성과 낭왕은 서로의 무를 겨루고 있었다.

손해 보기를 꺼려서 몸을 사리던 낭왕도 정작 승부에 돌입하니 호승심으로 눈빛을 불사르고 있었다.

낭왕은 누런 어금니를 드러내며 다시 팽무성의 술잔에 술을 채워내기 시작했다.

팽무성과 낭왕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저들끼리 즐기던 무림인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낭왕께서 또 시작하신 건가.”

“상대가 도왕이니 제법 볼만하겠는데.”

무림인들은 술과 안주를 들고 자리를 옮겨 팽무성과 낭왕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최고기록이 누구지?”

“일 년 전에 소혼검문의 문주가 다섯 순배를 버텼지 않았나.”

“다섯 순배? 대단하군. 보통 세 번을 버티기가 힘든데.”

검각의 제자들과 술을 마시던 사패도 소식을 듣고 다가와 팽무성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팽무성과 낭왕은 서로 열 번이나 술잔을 주고받은 상황.

“뭔가 이상한데, 팽 시주. 술을 마시고 눈을 뜨는 시간이 길어지지 않아?”

“팽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낭왕도 마찬가지시네요.”

무각과 당화련의 대화에 술잔을 돌리는 횟수에만 신경을 쓰던 다른 무림인들도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네, 뭐지?”

“보니까 따로 주독을 해소하지 않은 것 같은데 취한 건가.”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남궁혁은 정답을 찾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술잔뿐만 아니라 술에도 내공을 주입하여 겨루고 있던 것이군.”

“술에 내공을요?”

당화련의 질문에 남궁혁이 설명해주었고 이를 옆에서 듣던 다른 무림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내공을 주입해서 겨루다니 노는 물이 다르구만.”

“술을 마실 때마다 내공이 밀려오는 거면 장력을 얻어맞는 거랑 다를 바가 없겠군.”

“생각만 해도 구토가 쏠리는데. 먹은 것이 안 넘어오는 게 신기하군.”

팽무성과 낭왕의 대작에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자 무림인들은 더욱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제법 잘 버티는군.”

“마찬가지이십니다.”

팽무성과 낭왕은 서로 붉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진지했다.

“후우...”

낭왕은 정신이 알딸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커다란 술잔으로 서로 스무 번이 넘는 양의 술을 비워냈다.

이러니 항아리에 채워온 화주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몸에 쌓인 주독은 배출할 수 없고 팽무성의 내공을 해소하느라 상당한 내공이 소비되었다.

생각보다 팽무성의 내공은 심후했고 낭왕도 이제는 승부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간만에 제대로 술에 취한 낭왕이었다.

낭왕이 저도 모르게 말끝이 꼬아졌을 때, 팽무성이 바로 대답했다.

“이번이 서른 번째입니다.”

팽무성의 명확한 목소리에 낭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팽무성의 얼굴도 홍조를 띠고 있었지만, 자신에 비해서 훨씬 멀쩡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나보다 내공을 해소하는 시간이 여전히 빠르구나.’

반면 낭왕은 순배가 늘어갈수록 내공을 해소하는 시간이 더욱 지체되고 있었다.

패배감을 느끼기 시작한 낭왕이 윗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때, 술을 따르던 팽무성이 넌지시 물었다.

“평생 모으신 돈은 이미 어지간한 상단보다 많은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 돈을 더 모아서 어디다 쓰려고 하십니까.”

팽무성의 질문에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낭왕은 취기가 오른 듯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나 사도천처럼 오직 낭인들을 위한 연맹을 만들기 위함이다.”

“천랑회를 더 키우실 생각이시군요.”

“천랑회도 연맹을 만들기 위한 토대에 불과하지. 내 목표는 무림의 모든 낭인을 감쌀 수 있는 거대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기녀의 아들로 태어나 살기 위해서 검을 잡았다.

심법도 검법도 저잣거리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익히며 직접 보완하며 더해 나가야 했다.

낭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저 혈혈단신으로 묵묵하게 버텨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낭왕이지만 그런 낭인의 인생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늑대처럼 강호를 떠도는 게 낭인이라지만 최소한 낭인의 시작과 마지막에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는 곳은 필요하지 않겠느냐?”

팽무성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항아리 안을 살폈다.

“마지막 잔입니다.”

이에 낭왕은 힘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몇십 명은 먹을 양이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우리가 다 털어 넣었군.”

낭왕이 술잔으로 손을 뻗으려고 할 때 팽무성이 먼저 술잔을 잡았다.

이에 낭왕이 팽무성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분명 본인이 마실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잔은 후배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대신 낭왕께서도 무림맹의 의뢰를 받아주시지요. 제가 맹주께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음...”

팽무성도 알고 낭왕도 알았다.

지금은 명확하게 승패가 나지 않았지만 이대로 승부를 이어간다면 팽무성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팽무성이 모른 척 물러서며 자신을 배려하니 낭왕은 이미 붉어진 얼굴임에도 화끈해짐을 느꼈다.

“후우.”

낭왕은 살짝 몸을 뒤로 젖히더니 후련하게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하지. 자네 덕분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던 것 같군. 재미있는 승부였네.”

“저도 그렇습니다.”

낭왕이 주변에 있던 낭인에게 손짓하자 낭인이 술병을 들고 걸어왔다.

“이제 좀 순한 것으로 천천히 즐겨보지.”

“그러시지요.”

팽무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낭인이 들고 온 술병을 잡았다.

* * *

하룻밤의 짧은 연회가 끝나고 낭왕은 천랑회의 피해를 수습하고 무림맹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사패는 연유진과 동행하여 주산군도의 보타산에 있는 검각으로 향했다.

고요한 파랑이 사패를 맞이하고 있었다.

검후의 가르침.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