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막내아들-131화 (131/200)

131화

적당한 높이로 출렁이는 파랑.

날씨와 바람이 좋아서 주산군도의 보타도(補陀島)로 향하는 배는 순항이었다.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파도가 잔잔하게 부서지고 갈매기가 지저귀는 사이, 음울하고 힘없는 불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금강경을 읊고 있는 무각의 몸은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설마 내가 뱃멀미를 앓을 줄이야.”

한숨과 함께 불경을 멈춘 무각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각 스님. 조금만 참으세요. 이 각 정도만 있으면 도착할 것 같네요.”

연유진이 무각을 다독이는 모습에 배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남궁혁은 웃음을 흘렸다.

“무각 아우가 저런 모습도 보이는군.”

“흔히 볼 수는 없는 모습이지요.”

옆에서 바닷바람을 쐬던 팽무성도 축 처져있는 무각의 등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무림인도 은근 뱃멀미를 많이 하더라구요. 우리 셋은 다행이네요.”

당화련은 어린표를 하나 꺼내서 바다 위에 올려다 놓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무각을 제외한 사패는 선상 위의 흔들림과 소금기 섞인 바람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바다 위에서 마시는 술이 색다른 맛이 있군.”

남궁혁은 호리병의 술을 홀짝이더니 팽무성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받아서 한 모금 마신 팽무성은 장난스레 무각을 쳐다봤다.

“무각, 너도 마실 거냐?”

팽무성의 제안에 무각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먹으면 진짜 올라올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이는 무각에 당화련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무각 오라버니가 술까지 마다하다니. 제가 신경 계통의 독 좀 처방해드릴까요?”

“독이 약도 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화련의 장난에 그나마 남아 있던 무각의 핏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무각은 아예 갑판에 누워서 배의 흔들림에 몸을 맡겨버렸다.

“아미타불...”

그러는 사이에 보타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 불정봉(佛頂峰)이 점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으리들, 이제 곧 도착합니다요!”

선주의 외침에 몸을 벌떡 일으킨 무각은 보타도의 선착지와 배의 거리를 가늠하더니 용천혈에 가득 내공을 실어 도약했다.

어기충소의 수법으로 하늘 높이 솟구치던 무각은 선착지에 발을 딛고 데굴데굴 굴렀다.

“으하하, 역시 땅이 좋구나.”

계속 흔들리는 배에서 벗어나 땅에 발을 옮긴 것만으로 뱃멀미가 절반은 가신 것 같았다.

무각은 땅의 포근함을 만끽하다가 선착지 주변에서 자신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의식하곤 승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는 사이에 배는 선착지에 도착하고 사패를 포함한 검각의 제자들이 차례대로 하선했다.

“사패 여러분, 보타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연유진은 보타도 한가운데에 솟아오른 보타산을 보며 자부심 가득한 웃음을 보였다.

무림에서는 보타산이 검각이라는 고절한 검문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양민들에게는 불교의 사대 명산 중 하나로 더욱 잘 알려져 있었다.

산 모양이 팔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보타산은 관음보살의 영지로 불리고 있으며

보제사(普濟寺), 법우사(普濟寺), 혜제사(普濟寺) 등의 오래된 사찰이 자리 잡은 청정도량이었다.

“세 사찰의 주지 스님이 모두 법력이 높다고 들었어요. 무각 스님도 한번 방문해 보시죠.”

“아... 아미타불.”

연유진의 제안에 무각은 떨떠름한 얼굴로 불호만 욀 뿐이었다.

일단 불가에 몸을 담고 있지만, 무각은 천생 무인이라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사색과 법회보다는 주먹과 발을 뻗는 것이 더 좋았다.

그 어색한 웃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안 연유진은 마을 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시죠.”

보타산 아래에는 작은 어촌 마을이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검각 제자들을 보던 마을 사람들은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반가워했다.

“아이고, 이제야 오시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 해적단 두목의 목을 베었다는데 당분간은 조용하겠어.”

이에 연유진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 덕분에 이번 중추절은 마음 편히 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팽무성은 마을 사람들을 보더니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마을 사람 중에 무공을 익힌 이가 제법 되는데.”

“그렇군.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기초는 제대로 잡은 것 같구나.”

팽무성과 남궁혁의 말을 들은 연유진이 마을 사람들과 고개 인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이 마을에는 어렸을 때 검각의 기본 무공을 익힌 분들이 제법 됩니다. 굳이 따지자면 속가 제자라 할까요.”

검각의 무공은 여성이 익히기에 알맞았다. 검각의 제자 대부분이 여제자인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하지만 기본 무공의 경우 성별의 차이와 제약이 없어 남녀 상관없이 마을 사람들이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 때문인가요?”

당화련의 질문에 연유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주산군도가 워낙 험한 곳이니 제 몸을 지킬 최소한의 수단은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본문에서는 기본 무공은 아무 대가 없이 가르치고 있어요. 검각이 개파했을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팽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소문파 규모의 검각이 언제나 무림에 조용하고도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은하유성검법이라는 고명한 검법을 가진 덕택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검각 제자들을 보는 양민들의 시선에 호의가 가득한 것이로군요.”

“아미타불. 별거 아니듯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훌륭한 일을 꾸준히 이어서 해오셨군.”

땅 위를 몇 걸음 걸은 것만으로 뱃멀미가 싹 날아갔는지 무각은 어느새 멀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연유진에게 검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보타산에 오르다 보니 어느새 검각의 단출한 산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각의 산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산문 안에 있던 제자 대부분이 모여있었다.

연유진은 검각의 제자들 가운데에 서 있는 중년의 여인, 검각주 사향윤을 보고 예를 갖추었다.

“스승님.”

“유진아, 고생했구나. 다른 제자들도 모두 무사히 돌아와서 기쁘구나.”

사향윤은 검각의 제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곤 그 옆에 있는 사패로 눈길을 틀었다.

맨 앞에 있던 팽무성이 포권하자 사향윤도 포권으로 답했다.

“하북팽가의 팽무성이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각주.”

“팽 소협, 아니 이제 대협이라 불러야겠지. 팽 대협, 그리고 사패. 검각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이니 편히 쉬다 가시게.”

사향윤이 사패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검각의 제자들은 사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보타도의 검각에도 사패의 명성이 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번에 해적단을 격퇴하는 데 사패의 도움이 컸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호감까지 생겨난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사패에게 달려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사향윤의 눈치가 보여서 다들 자중하는 중이었다.

그 대신 경외와 호감이 담긴 눈빛을 숨김없이 흘리고 있어 사패도 흐뭇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검각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궁혁이 따로 인사를 올리자 검각주도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검존의 손을 잡고 보타산을 오르던 꼬마가 이리 커서 검호가 되었으니 감개무량하네.”

사패는 검각에서 귀빈의 대우를 받으며 편히 쉴 수 있었다.

* * *

검각은 문파의 크기가 크지 않고 산중이라 조용했다.

조그마한 방 네 개로 이루어진 별채 하나를 배정받은 사패는 전각의 대청에 나란히 앉아서 산중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치 소림사에 돌아온 기분이야.”

“그러네요. 소림사에서 몇 달 머물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풀만 나오는 것 빼고는 괜찮았어요.”

“그래서 사흘에 한 번씩은 객잔에 내려가야 했단 말이지.”

“후후, 그때 제법 재미있었나 보군. 내가 없었던 것이 아쉽구나.”

간혹 들리는 제자들의 기합 소리와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처음 방문한 이들은 분명 검각을 사찰이라 여겼을 것이다.

사패와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던 팽무성은 문득 마교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보면 중추절에 급습할 생각인가.’

팽무성은 전생의 기억을 열심히 되짚었지만 검각의 습격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정보가 없었다.

검각이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했지만 당대의 검각주와 검후가 죽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연유진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어린 제자들도 검각주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졌기에 자세한 전말은 아는 것이 없었다.

‘검후가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지만 그래도 우내팔존이었던 전대 고수다. 어지간한 고수로는 꺾기가 힘들었을 텐데.’

팽무성이 검각을 급습할 마교의 전력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연유진이 별채로 찾아왔다.

“여러분, 지금 시간 괜찮으실까요?”

“연 소저, 무슨 일이 생겼나요?”

당화련의 물음에 연유진은 고개를 젓고 차분하게 말했다.

“사조께서 여러분을 만나고 싶다고 하시네요.”

연유진의 사조라 함이면 검후를 칭하는 것이었다.

“검후께서...”

사패는 우내팔존이었던 전대 고수를 대면할 수 있다는 소식에 들뜨는 분위기였다.

사패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연유진은 검후의 거처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연유진이 검각 밖으로 나서서 잠시 산길을 오르니 그 근처에 작은 모옥이 있었다.

모옥의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한 노파가 쭈그리고 앉아 텃밭을 돌보고 있었다.

“유진아, 고생했다. 돌아가 보렴.”

“예, 사조님.”

연유진은 사패에게 말없이 인사를 하곤 검각으로 돌아갔고 검후는 텃밭에 흙 묻은 손을 털더니 등을 돌려 사패를 바라봤다.

수수한 비녀로 정돈된 검후의 은발은 햇빛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머리칼의 절반 정도만 은발이던 검각주에 비해 검후는 완전한 은발을 하고 있었다.

검각의 독문심법인 은하심법을 대성했다는 뜻이었다.

당화련부터 시작하여 팽무성을 끝으로 사패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던 검후는 자글자글한 눈매를 휘었다.

“근래에 흉몽만 꾸며 잠을 설치다가 어젯밤에야 단잠을 잘 수 있었단다. 그런데 그것이 너희 덕분인 듯하구나.”

“검후,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존의 손자인 남궁혁입니다. 기억하실는지요?”

“물론이지.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어 기쁘다.”

남궁혁의 인사에 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더니 무각을 바라보았다.

“네가 불존의 제자로구나?”

이에 무각도 급히 반장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예. 무각이라고 합니다.”

“검존과 불존. 그 아이들의 후손과 제자가 이렇게 잘 컸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체감이 되는구나.”

그 말에 남궁혁과 무각이 실소를 감추었다.

현 강호에서 검존과 불존을 아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검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후는 당화련을 보고 싱긋 웃더니 팽무성으로 시선을 옮겼다.

팽무성과 검후는 찰나였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을 교환했다.

‘검후, 역시 강하구나.’

팽무성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검후의 눈주름이 더욱 깊어지더니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자, 이리 와서 다들 앉아 보거라.”

검후가 모옥의 마루로 걸어가며 손짓하자 사패도 그 뒤를 따랐다.

모옥의 마루가 좁아서 검후와 사패가 간신히 앉을 수 있었다.

“검각이 무림의 동쪽 끝에 있지만, 소식은 간간이 들려온단다. 근래에 마교가 다시 발호했다지?”

“예, 하지만 무림에서 활동하는 것은 마교의 일부 세력뿐입니다.”

팽무성은 이리 말하면서도 마교의 본격적인 준동을 걱정하고 있었다.

마교의 선봉대나 마찬가지였던 구마군이 사패에 의해 거의 몰살한 상태.

마교에서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구마종주를 비롯한 마교의 군단이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마교와 가장 많이 접했다고 들었다. 마교에 대해서 듣고 싶구나.”

이에 사패는 남궁혁을 쳐다보았다. 사패 중에 남궁혁이 이야기를 잘 풀어내기 때문이었다.

“검후,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침으로 입술을 적신 남궁혁이 마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서야 이야기는 끝이 났고 목이 마른 남궁혁은 습관적으로 호리병에 손을 가져갔다가 검후 앞이라 자제했다.

“얼핏 들어보면 구마군이라 하면 마교의 후대를 이을 자들인데 그렇게 죽어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니 역시 마도는 종잡을 수가 없구나.”

“그것이 마도의 무서운 점일 것입니다.”

팽무성의 말에 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는 인외의 길을 걷는 자들.

지닌 사상과 무공이 모두 상식을 벗어나니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검후는 잠시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몇 없는 이를 드러내며 바람이 새는 웃음소리를 냈다.

“홀홀홀. 너희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도 나잇값을 해야겠구나.”

검후의 가르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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