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진 검후.
팽무성은 급히 검후의 맥문을 잡으려 했지만, 검후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자 검후는 원래의 얼굴색을 되찾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호들갑 떨 거 없단다. 백 년을 넘게 살아왔으니 이 몸도 하나씩 고장이 나는 것이지.”
검후는 노환의 영향으로 심장에 병을 앓고 있었다.
반로환동이나 환골탈태를 하지 않는 이상 내공으로 육체의 노화를 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검후는 오래 검을 잡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팽무성은 소매로 검후의 땀을 훔쳤다.
이 정도일 줄 몰랐던 팽무성은 검후가 자신을 위해 큰 무리를 했음을 깨달았다.
‘전생에서도 나이 때문에 당하신 것 같구나.’
검후가 자리 잡은 검각이 그리 쉽게 무너졌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가는 팽무성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후.”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너도 네가 할 일을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패의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다오.”
“예.”
검후의 짧은 가르침이 끝났지만 팽무성은 한참이나 모옥을 지키다가 이른 아침에 남궁혁이 찾아오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 * *
검각에 도착하고 보름이 지나갔다.
무각은 첫날 이후로 세 개의 사찰을 전전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팽무성에 대한 검후의 가르침은 첫날에서 끝났기에 당화련과 남궁혁이 매일 번갈아 가며 검후의 모옥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옥에 가는 날은 종일을 검후와 함께 보냈고 아닌 날은 별채에서
검후의 가르침을 복기하거나 홀로 수련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검후의 가르침이 주요했는지 남궁혁과 당화련은 무공에 빠져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팽무성도 검각에 있는 동안 운기조식과 명상에만 집중했다.
검후의 화두로 키워낸 자연에 대한 깨달음을 좀 더 키워냈고 검후의 심득도 가다듬었다.
검후에게 받은 심득은 단편적인 가르침.
모든 것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팽무성은 이 심득을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자신에 맞추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낭왕과 왜국의 검성과 겪었던 일전을 복기하며 수련에 온 시간을 쏟고 있었다.
이러니 사패는 보름 동안 간단한 인사만 나눌 뿐 저마다의 무공수련에 몰두한 셈이었다.
“어느새 중추절인가.”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뜬 팽무성이 어느새 하늘에 뜬 태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화두가 있어 명상에 빠져들었는데 깨어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슬슬 놈들이 오겠네.’
팽무성이 적아도의 도갑을 만지작거릴 때 당화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후께서는?”
“검각의 내부로 옮겨서 의원의 진맥을 받고 계셔요. 큰 병은 아니고 며칠 기운을 많이 쏟으신 탓 같다네요. 휴식을 취하면 괜찮을 거라네요.”
당화련은 전날 쓰러진 검후를 옆에서 간호하다가 이제야 별채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행이네.”
당화련은 별채에 팽무성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곤 물었다.
“남궁 오라버니는요?”
“검후도 누워 계시니 어디 한적한 곳에서 홀로 명상하신다고 하던데, 확실히 길을 찾은 모양이더라.”
팽무성이 보기에 조만간 강호는 새로운 초월경 고수를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무각 오라버니도 사찰에 들어가서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눈치를 보던 당화련은 뒤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팽무성을 뒤에서 껴안았다.
검후를 걱정하는 것이 훤히 보였기에 당화련은 팽무성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했다.
두 팔로 목을 힘껏 감싼 당화련은 팽무성의 귀에 속삭였다.
“오랜만에 둘만 남았는데 오늘은 좀 놀면 안 돼요? 연 소저에게 들으니 보타산에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던데.”
팽무성은 꽃과 같은 당화련의 향기를 맡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이 달싹 붙어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가 싶더니
팽무성이 갑자기 어깨를 흔들었다.
활시위처럼 탄력 있게 어깨를 앞으로 튕기니 그 반동에 당화련의 몸이 앞으로 날아갔다.
“잉?”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당화련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팽무성을 보곤 눈매를 좁혔다.
당화련은 공중제비하며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았고, 팽무성은 곧바로 거리를 좁혀 당화련이 암기를 날릴 틈을 주지 않았다.
팽무성이 와호장을 펼치자 당화련도 독장으로 맞받아쳤다.
파앙
팽무성이 당화련의 내공을 파악하여 똑같은 수준으로 장법을 펼쳤기에 중간에서 옅은 기파만 터질 뿐이었다.
팽무성은 오른쪽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허리를 노리더니 우장으로 각법을 피하는 당화련의 어깨를 노렸다.
당화련은 이미 허리를 비틀어 각법을 피하는 와중에도 상체를 흐느적거리듯 움직여 팽무성의 수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나를 상대로도 아주 거침없네?’
팽무성의 손발에 실린 기세가 보통이 아님을 보고 당화련이 도끼눈을 떴다.
주먹을 피해낼 때 살벌한 바람이 당화련의 살갗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특유의 유연함으로 팽무성의 공세를 흘려낸 당화련은 문득 펄럭이는 소매를 팽무성을 향해 뻗었다.
이에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당화련의 소매에서 녹빛이 번득였다.
따앙
팽무성의 검지와 중지에는 어린표가 잡혀있었다. 어린표에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권장법으로 겨루어야 할 만큼 거리를 밀접하게 좁혀서 당화련은 암기를 날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당화련은 보란 듯이 팽무성에게 어린표를 쏘아냈다.
“이 수법은 처음 보는데?”
전생에 당화련이 독희라 불릴 때에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수법이었다.
“비린지라는 수법이에요.”
비린지(飛鱗指).
중지와 검지, 엄지를 이용해서 탄지공처럼 어린표를 날리는 수법이었다.
지금처럼 암기를 날릴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을 때를 위해 만들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근거리에서의 위력과 속도는 본래의 어린표보다 월등한 상승의 수법이었다.
“비급만 보고 수련할 때는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검후께서 내공 운용부터 상세하게 알려 주시더라구요.”
“그래? 검후께서 자세히 알고 계시네.”
“우내십존 중에 제일 많이 싸웠던 것이 독룡제라고 하셨어요. 얼마나 많이 봤는지 흉내도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하시던데요.”
이 말에 팽무성과 당화련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팽무성은 어린표를 당화련에게 던져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놀아도 되겠네.”
“칫.”
당화련은 작게 성을 냈지만 팽무성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내심 좋은 듯 바로 웃음꽃을 피워냈다.
팽무성에게 쪼르르 달려가 달라붙던 당화련은 문득 눈매를 좁히더니 팽무성의 등을 후려쳤다.
짜악
“그렇게 자기 여자를 날려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팽무성이 어깨를 흔들어 자신을 거침없이 날려버리던 그 순간의 어이없음은 아직도 당화련의 머릿속에 확실히 남아있었다.
“하하.”
팽무성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곤 화제를 돌렸다.
“월병을 굽나. 달콤한 냄새가 나네.”
“괜히 딴소리하지 마요.”
“내가 연 소저에게 월병을 많이 달라고 할게. 화 풀어.”
당화련은 한숨을 쉬더니 팽무성과 팔짱을 꼈다.
* * *
중추절의 밤.
중추절에는 역시 달맞이였다.
검각의 연무장에는 하나의 커다란 제사상이 차려졌다. 제사상 위로 밝은 달빛이 내려와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연꽃처럼 모양을 낸 수박을 시작으로 월병(月?)과 여러 둥근 과일들이 제사상에 올려졌고 향초가 피워졌다.
제사가 치러지는 연무장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는데 검각의 제자뿐만 아니라 보타산 밑의 마을에 사는 양민들도 있었다.
원래 이런 명절마다 검각이나 사찰에 모여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타도의 오랜 전통이었다.
제사가 끝나자 모인 사람들은 과일을 비롯하여 월병을 잘라서 나눠 먹고 있었다.
팽무성은 월병을 절반으로 쪼개서 그중 하나를 당화련의 입에 넣어주었다.
“흐음. 달다.”
월병의 바삭바삭함과 풍부한 단맛에 당화련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당화련은 다람쥐처럼 양 볼에 월병을 오물거리면서 팽무성의 팔을 쳤다.
당화련의 손짓에 따라 팽무성이 고개를 드니 새까만 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환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양민들은 달을 향해 기도하며 가족의 화목을 빌었고 검각의 제자들도 검각의 안녕을 기원했다.
팽무성이 아래로 눈길을 돌리니 당화련도 월병을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빌고 있었다.
소원을 다 빈 당화련이 눈을 뜨자 이를 보고 있던 팽무성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이에 당화련은 보름달을 빤히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도 사패를 포함한 내 주변 사람들이 다시 중추절의 달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너무 낭만적인 소원인가요.”
당화련의 질문에 팽무성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결국 많은 이가 죽어 나갈 테니.
“우리가 최선을 다하자.”
그 말에 팽무성을 쳐다보던 당화련이 물었다.
“팽 오라버니는 어떤 소원을 빌었어요?”
당화련의 질문에도 팽무성은 그저 웃기만 했다. 자신은 소원을 빌지 않았으니까.
팽무성은 소원에 기댈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할 일이었다.
팽무성은 옆에 서 있는 당화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에 당화련도 자연스레 팽무성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두 사람도 지금 달을 보고 있을까요?”
“남궁 형님과 무각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지금이 더 좋은데요?”
당화련의 짓궂은 말에 팽무성이 쓴웃음을 흘렸다.
편안하게 달을 보던 와중에 팽무성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당화련은 달라진 팽무성의 기세를 바로 느끼곤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팽 오라버니?”
“마교다.”
이에 당화련은 검각의 입구쪽으로 몸을 날렸고 팽무성은 제사상 근처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검각주에게 다가갔다.
-검각주. 미리 말씀드린 상황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팽무성의 전음에 제자들과 함께 과일을 먹고 있던 검각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검각에 들어서고 팽무성은 중추절 즈음에 마교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자네의 말을 허투루 흘렸다면 큰일이 벌어질 뻔했군.”
아직 별다른 기미가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검각주는 팽무성의 말을 신뢰했다.
“갈!”
검각주의 일갈에 달맞이를 즐기고 있던 양민들과 검각 제자들이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긴급한 상황입니다. 마을의 양민께서는 안쪽 전각으로 신속하게 대피하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은 당장 싸울 준비를 하라.”
갑작스러운 상황이나 양민들은 침착하게 움직였다.
해적들이 출몰하는 주산군도에 살면서 어지간한 위협에는 면역이 된 덕분이었다.
양민들의 피신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검각주와 연유진을 필두로 검각 제자들은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이제 확실히 느껴지는군.”
산을 타고 올라오는 지독한 마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콰앙
검각의 산문이 박살 나고 마기를 흘리는 마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검각주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오셨군.”
마인들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검각의 제자 사이에 섞여 있던 당화련이 미간을 좁혔다.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당가에서 그려낸 인상파기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검마군.’
당화련은 손가락 사이로 어린표를 꺼내며 팽무성을 찾았지만,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중추절의 불청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