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칠주야 동안의 논검연회가 끝나고 개방된 무기 창고에 들어설 수 있는 일인은 당연히 팽무성이었다.
논검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팽무성은 초대받은 모든 고수와 논검을 벌였고 연전 승리를 고수했다.
이에 팽무성이 무기 창고에 들어선다는 것에 불만을 제시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천궁주와 독대하던 팽무성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무기 창고에 들어갈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음. 자네의 적아도 역시 보기 드문 병기이니 나도 같은 생각일세.”
“사실 이 자리에는 멸세마왕이 앉았어야겠지요.”
“자네처럼 그자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개의치 말게.”
무천궁주는 주먹으로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자네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는 무천궁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 대신 영약이라도 받을 텐가?”
“나중에 마교가 발호하면 무천궁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었으면 합니다.”
전생에 무천궁은 마교가 악록산 앞마당까지 밀고 들어온 뒤에야 마교와 전쟁을 벌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마교를 상대로 무천궁은 악록산을 하나의 성으로 삼아 싸우다가 장렬히 산화했다.
이로 인해 마교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무림의 입장에서는 무천궁이 멸문해버린 것이 더욱 뼈아픈 현실이었다.
무천궁주는 잠시 고민하더니 눈매를 휘었다.
“이거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무천궁주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묻자 이에 팽무성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선물이라면 제가 기쁘게 무천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려봤습니다.”
“그래. 이 악록산에서 싸우느냐, 다른 곳에서 싸우느냐. 그 차이겠지. 마교가 본궁만 가만히 둘리는 없을 테니 말이야.”
고민하던 무천궁주는 자세를 바로 하더니 팽무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도록 하지. 다만 무림맹과 손을 잡는 것은 아니네. 정보를 교환하고 협조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는 본 궁 독자적으로 움직일 걸세.”
이에 팽무성은 포권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 정도로도 만족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백유가 폐관을 깨고 나오면 몇 수 겨루어주게. 이것이면 대충 셈이 되겠지.”
“아, 소궁주가 지금 폐관수련 중이었군요.”
무천궁의 소궁주, 한백유.
논검연회가 열리는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볼 수 없어 의아하기는 했지만 폐관수련 중인 것은 몰랐다.
“무신총에서 자네를 만난 이후에 수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지.
그런데 자네가 도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았는지 폐관수련에 들어갔네.”
무천궁주는 자극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한백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같은 도객으로서 다시 만날 날에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수련에 매진했건만
팽무성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닿을 수 없는 곳에 오른 상황이었다.
‘나중에 직접 도를 맞대보면 어떤 방향으로든 백유에게 도움이 되겠지.’
무천궁주는 지금도 비동에서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고 있을 한백유를 생각하며 턱수염을 만졌다.
“이제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닙니다. 귀주성으로 가려고 합니다.”
“귀주성? 무슨 일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귀주성이 호남성의 바로 옆에 위치하기는 했지만, 크게 특색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거기에 유명한 무림문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무천궁주는 사패가 귀주성으로 향하는 이유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이에 팽무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살수들을 두들겨 팰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 * *
논검연회의 마지막 날.
팽무성에게 한 장의 서신이 도착했다.
평소처럼 가월이 보내는 서신이 아닌 천살택문에서 날아온 서신.
일전에 조부께서 주신 천살택문의 암어표에 대입하여 서신의 암어를 해독하니 이런 내용이 나왔다.
-지옥련, 만살회의 살수들이 귀주성으로 집중. 본문의 호남지부도 움직일 예정.
지옥련과 만살회가 동시에 움직인다면 마교와 관련된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랬기에 사패도 귀주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신에는 별다른 합류 장소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귀주성으로 향하다 보면 천살택문에서 알아서 접촉해올 테니 말이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가자.”
“쉬지 않고 뛰었더니 배고파요.”
사패는 신속하게 귀주성에 들어서기 위해 계속 경공을 펼쳐서 이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더 빨리 호남성과 귀주성의 경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도 이 속도로 하루 동안 이동한다면 충분히 귀주성에 들어설 수 있을 터였다.
사패가 들어선 곳은 산속 이름 없는 마을의 낡은 객잔이었다.
객잔의 시설도 많이 낡았고 음식도 파는 것이 소면과 만두, 동파육뿐이었다.
그래도 밖에서 밤이슬을 맞는 것보다는 나은 편이기에 사패는 이에 만족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객잔에서 술을 팔지 않다니, 믿을 수가 없다.”
“술이 다 떨어졌다 하지 않느냐. 오늘은 내 호리병의 술로 만족하자.”
“애초에 객잔에 술이 다 떨어지는 게 말이 되냐고. 슬프군. 아미타불.”
무각이 계속 투덜거리는 와중에 객잔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들어온 사람들은 객잔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이 각 정도가 지나자 어느새 객잔의 몇 없던 자리가 만석이 되었다.
그럼에도 객잔은 사패가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패의 수다를 제외하면 뭔가를 먹는 소리나 젓가락이 접시와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팽무성이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입맛이 떨어지네.”
“왜? 팽 시주. 만두에 있는 독 때문인가?”
“그건 아닐걸요. 독이 아니었어도 맛없는 만두예요.”
“이거 참... 객잔이 아니라 무덤 앞에서 밥 먹는 기분이구나.”
사패의 말소리에 객잔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뚝 그쳤다.
팽무성은 사패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사람인데 사람같이 행동할 줄을 모르는군.”
스릉
객잔에 모인 무림인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았고 상인들은 봇짐에서 숨겨놓은 단검이나 협봉검을 꺼내 들었다.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살수들인가?”
“지옥련과 만살회의 살수치고는 너무 엉성하구나. 마치 살아있는 인형 같군.”
남궁혁의 평가에 팽무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전에 말한 그놈들과 비슷합니다. 가마단.”
“아아. 생각해보니 팽 아우의 묘사와 비슷하군.”
사패도 팽무성에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가마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흑상의 경매에서 한 번 마주쳤던 가마단.
그 이후로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팽무성은 이들이 가마단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팽무성의 말을 듣고도 객잔의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다.
사패와 거리가 십 보 안으로 좁혀들었을 때, 객잔에 있던 이들이 사패를 덮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객잔의 문을 박살 내며 튕겨 나온 중년인은 그대로 절명했다.
객잔에 있던 스무 명을 단숨에 처리해버린 사패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백여 명의 무인들이 객잔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사패는 이미 기척을 느끼고 있기에 덤덤하게 앞으로 나섰다.
밖에 있는 백여 명의 무인들도 객잔에 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건조한 눈빛과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팽무성은 포목점 지붕 위에 서서 사패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인을 쳐다봤다.
이 중에 유일하게 사람 같은 행색을 한 놈이었다. 그리고 그 중년인에게서는 진득한 마기가 느껴졌다.
“역시 가마단이었나.”
중년인은 미간을 좁히며 팽무성에게 물었다.
“사패, 이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냐.”
이 마을은 중원에 퍼져있는 가마단의 숨겨진 지부 중 한 곳이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산속에 마을을 지은 것이라 그동안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사패가 이 마을에 등장한 것이었다.
중년인의 입장에서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사패는 예측할 수 없는 재해와 같았다.
“사패, 본교에서 모르는 정보력을 가진 건가.”
사패가 빠르게 귀주로 향하기 위해 관도나 산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직선으로 이동한 것을 모르는 마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마인의 말을 듣던 사패는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저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아무래도 우리가 우연히 쥐새끼들을 잡은 것 같네.”
팽무성이 마인을 보며 헛웃음을 흘리자 무각이 양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뭐 어떻게 되었든 결론은 똑같지 않나?”
“무각 아우의 말이 옳다.”
촤자자작
파파팡
사패는 약속이나 한 듯이 사방으로 흩어져 가마단의 무인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이에 지부를 책임지고 있던 마인이 도리어 당황했다.
설마 백여 명을 상대로 먼저 덤벼들 줄이야.
잠시 고민하던 마인은 이를 악물더니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폭마공의 사용을 허락한다. 저놈들을 다 죽여라!”
“존명.”
가마단은 본래 아무런 마공도 익히지 않았다.
허나 이번에 가마단 전체가 배정받은 임무로 인해서 가마단은 두 개의 마공을 허락받았으니.
바로 폭마공과 광혈마공이었다.
광혈마공을 펼쳐서 무위를 폭증시켜도 사패에 비할 수는 없으니 마인은 이곳의 가마단을 폭마공으로 폭사시킬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사패를 죽일 수는 없어도 부상은 입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마단의 무인들이 폭마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며 가마단의 얼굴에 처음으로 괴로운 듯한 표정이 보였다.
폭마공으로 무인의 몸이 터져나가려고 할 때.
푹
남궁혁의 검이 심장과 단전을 동시에 관통했다.
그러자 폭마공의 운기가 막혀 가마단의 무인은 온전히 시체를 남기고 숨이 끊어졌다.
“편히 가시오.”
비록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지만 가마단이 마교에 의해 억지로 인성과 인생을 빼앗긴 자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남궁혁은 이들에게 연민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인정을 베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어설프게 베푼 인정은 자신이나 혹은 다른 아우들에게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 마음을 대변하듯 가마단을 베어내는 남궁혁의 검은 시리고 거침이 없었다.
남궁혁은 그저 이들이 죽을 때만은 아무 고통 없이 사람답게 죽게 해줄 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가마단의 무인들을 격퇴하고 있는 무각과 당화련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무각과 당화련의 손이 빨라지며 무인들이 폭마공을 펼치기 전에 절명시키고 있었다.
당화련은 어린표 대신 대침을 들어 사혈을 노렸고 무각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내가중수법으로 무인들의 심장을 터트렸다.
“극락왕생하시길, 아미타불.”
노도처럼, 그러면서 고요히 몰아붙이는 사패에 의해 가마단의 마을에서는 파공음과 파육음이 들릴 뿐, 비명이나 폭음이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경악한 마인은 가마단이 모두 죽기 전에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붉은빛이 쇄도하고 있었다.
“크악!”
첫 비명을 지르는 마인은 자신의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베어진 것에 눈물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악에 받친 마인은 핏발이 선 눈으로 팽무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를 막아도 가마단의 일부에 불과하다. 너희는 결국 실패하겠지.”
팽무성을 저주한 마인은 곧바로 폭마공을 펼치려 했으나 적아도가 먼저 심장에 박혀 마인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아까부터 혼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인의 말을 곱씹던 팽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중원에 흩어진 가마단이 어느 한 곳으로 모이는 모양이었다.
“귀주성인가...”
지옥련, 만살회 그리고 가마단까지.
팽무성은 귀주성으로 마교의 세력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 많은 병력을 어디다 사용하려는 것일까.
“빨리 귀주성에 가야겠군.”
팽무성이 고개를 들 때 사패는 마을에 깔려 있던 가마단 무인을 모두 쓰러트린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귀주에 가마단도 모이는 모양인데.”
“그럼 빨리 가야겠네요.”
무각은 마을에 가득한 시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시주들을 보내주고 출발하자고. 이대로 두면 역병이 돌 수도 있으니.”
이에 남궁혁도 검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구나.”
무각의 의견으로 사패는 시체를 마을의 중앙에 모았고 불교의 장법인 화장(火葬)을 진행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시체를 태우는데도 화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아미타불...”
무각이 짧은 법문을 읊으며 영혼들의 넋을 달랜 이후에야 화염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무각이 넋을 달래준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장을 위해 피운 화염이 절정에 달했을 때 사패는 등을 돌려 귀주로 향했다.
천라지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