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여천고원의 진법이 해제되지 않은 틈에 검선과 사패는 고원을 벗어나 숲을 가로질렀다.
진법 안에 들어선 이들의 감각을 흐트러트리는 안개.
거기에 온갖 환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십 자루의 검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오기도 했고 바위가 들썩이며 날아들기도 했다.
그러나 앞장서서 방향을 잡는 검선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로지 기감으로 진법의 자연지기를 읽어내며 움직이는 덕분이었다.
당화련은 자신의 발을 묶으려 드는 나무뿌리를 발로 쳐내며 사뿐히 몸을 날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실제가 아닌 허상임을 알고 있으나 진법의 힘 덕분인지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그 위력이 일류고수의 공격과 비슷한 정도라 검선과 사패는 힘으로 쳐내면서 이동 중이었다.
“진법이 온전히 개진되지 않았나. 불안정한 부분이 있구나.”
검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숲 전체에 환마종의 진법의 회색 안개가 뒤덮어 있으나 그 밀도가 옅었다.
“고원에 들어서기 전에 진축 일부를 부숴놨습니다.”
“잘했구나.”
검선은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검선의 검이 번쩍거릴 때마다 앞을 가로막던 안개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찌릉
그럴 때마다 환영이 흐릿해지고 쉴새 없이 고막을 울리는 방울 소리도 뚝 멈췄다.
간혹 밀려 나간 안개 사이로 숨어있던 환마종 마인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마인들은 당황하여 몸이 굳거나, 방울이 달린 지팡이를 급히 흔들며 환술을 펼쳐내려 했다.
허나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전에 검선의 검에 핏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시군.”
팽무성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뛰던 남궁혁도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법을 베어내는 광경을 보게 되는구나.”
본래라면 검풍이나 검기를 날려도 안개는 그저 통과시켰을 뿐 제자리를 고수했을 것이다.
애초에 검을 휘두른다고 진법이 뭉개지는 일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검선의 검 앞에서 환마종의 진법은 무력하게 길이 열리고 있었다.
검선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던 팽무성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뒤에서 바라보는 팽무성과 남궁혁의 눈길을 느꼈는지 검선은 검으로 안개의 중앙을 찔러내어 사방으로 흩어내며 말했다.
“진법은 단순히 자연지기를 비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의지도 바꾼 것이다.
너희도 내공에 의지를 실어낼 수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나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공에 의지를 실어내는 것이 절대경의 경계.
검선도 절대경에 완전히 발을 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럭저럭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자연지기를 깊이 느끼려 할 때 단순히 기운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풀잎을 타고 솟구쳐 오르는 수백의 물방울. 그 물방울들이 일제히 떠올라 암기처럼 검선과 사패에게 쇄도했다.
타타타탕
검선은 크게 원을 그려 검막을 그려내 물방울을 튕겨내며 말했다.
“유지, 순환, 파괴. 자연에도 여러 가지 의지가 내재한다. 마치 살아있는 하나의 거인으로 생각하며 그 의지를 읽어내고 소통하려고 해라.”
검선은 진법을 뚫어내면서도 무심하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검선이 느낀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가르침이었다.
이를 사패가 얼마나 수용할지는 검선도 모르는 일.
그래도 검선은 검을 휘두르면서 생각이 나는 대로 순서 없이 가르침과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자신이 던지는 조언 중 딱 한 가지만 잡아낼 수 있다면 성취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굳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훗날에 도움이 되리라.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워야 하는 것에 마음이 무거운 검선이 그나마 지금 무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놈들, 진법의 생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라. 몸을 던져서라도 시간을 벌어.”
진법의 심부에 들어서자 진법의 환영은 더욱 강해졌고 환마종 마인들도 죽음을 도외시하고 검선과 사패를 물고 늘어졌다.
찌르르릉
진법과 상관없이 내공이 실린 방울 소리가 검선과 사패에게 집중되었고.
방진을 구축하듯 기이한 형태를 이루고 서 있던 환마종 마인들은 힘을 합쳐서 강력한 환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화르륵
마인 열 명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거대한 화염구가 사패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뜨거운 열기에도 팽무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아도를 사선으로 그어냈다.
팽무성이 날린 반월형의 도기는 화염구를 갈라내고 날아들어 마인들의 허리를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좌측이다.”
팽무성보다 자연지기를 능숙하게 읽어내는 검선 덕분에 진법의 돌파 속도가 빨라졌다.
거기에 진법을 빠져나오는 길과 진축 하나가 겹쳐서 이를 부수고 나아가니 더욱 수월해졌다.
쉬지 않고 내달리던 검선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안개를 지긋이 노려봤다.
우웅
검날에 옅은 검기만 둘렀던 검선의 검에 짙은 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검선이 서 있는 곳은 이 진법의 생문.
환마종이 막아놓았지만, 뚫으면 그만.
본래 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 만큼 억지로 길을 열기도 다른 위치보다 수월했다.
수평으로 겨누어진 검선의 검 주위로 선명한 바람이 모여들었다.
쑤아앙
찔러지는 검과 함께 한 줄기 돌풍이 몰아쳤다. 돌풍은 막혀있던 생문을 시원하게 뚫어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강제로 열린 생문으로 나온 검선과 사패는 자연스레 숲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검선은 곧바로 걸음을 옮기지 않고 눈앞의 전경을 바라봤다.
“많이도 몰려왔구나.”
가마단, 지옥련, 만살회로 구성된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었다.
바글바글하게 몰려 있는 것이 마치 먹이를 발견하고 몰려드는 개미 떼를 보는 듯했다.
등에 메고 있는 천마신검이 잘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한 검선은 비틀어진 죽립을 고쳐 썼다.
“가자꾸나.”
“예.”
천라지망을 향해 달려드는 오인.
이에 고요히 자리를 지키던 천라지망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슛슛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비가 내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폭우 대신에 머리 위로 화살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훈련받은 만살회의 살수들이 내공을 실어 화살을 쉴새 없이 쏘아내니 활시위가 튕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만살회의 살수들은 검선과 사패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십 장(十丈 30M)의 공간에 화살을 박아넣고 있었다.
이러니 화살을 피해서 경공의 속도를 높여도 결국 화살비에 마주해야 했다.
파파팍
이에 팽무성이 공중에 뛰어올라 적아도를 그어내서 수평으로 길게 도기를 만들어냈다.
도기가 하늘로 솟구치며 화살비의 일부를 밀어냈지만, 여전히 떨어지는 화살은 많았다.
넓은 장력이 솟구치기도 했고 검풍이 날아들기도 하며 꽂히는 화살을 튕겨냈다.
천라지망의 일선과 거리가 좁혀지자 궁술을 익히지 않은 살수들이 암기를 꺼내 들었다.
수수숙
쐐앵
퍼엉
처음 보는 갖자기 종류의 암기가 사방에서 쇄도했고 검선과 사패의 진로 앞에 색색의 독무가 터져서 퍼지고 있었다.
콰앙
거기에 지옥련에서 중요한 살행에만 간혹 사용하는 화탄도 섞여 있었다.
화탄이 터지면서 폭발과 함께 그 안에 있던 작은 암기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팽무성의 눈에도 간신히 식별할 정도로 작은 모래와 같은 암기들.
팽무성이 일소와풍을 펼쳐내 바람을 일으켰고 무각도 장력을 일부러 넓게 내질러서 방패로 삼았다.
“이렇게 쏟아붓는데 상처 하나 줄 수 없다니.”
“조급해하지 마라. 천라지망은 이제 시작이다. 천천히 힘을 빼라. 마군과 마왕들께서 오실 때까지 버티는 거다.”
천라지망을 조율하는 환마종 마인들은 빠르게 일선으로 돌진해오는 사패를 바라보며 차분히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암기와 화살의 포화를 뚫고 천라지망의 일선에 도달한 검선과 사패.
암기에 더불어 가마단 무인들의 검풍과 검기 수십 가닥이 사패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군의 피해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사패를 요격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선의 검이 반원을 그리자 날아들던 검풍이 죄다 방향이 뒤틀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간혹 아군의 등으로 날아드는 검풍도 있었다. 그 사이에 팽무성이 적아도를 높게 들어서 대지를 후려쳤다.
콰카카캉
적아도가 닿은 지점을 시작으로 주변의 땅이 갈라졌다. 이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순간 지진이 일어났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땅이 갈라지며 돌과 바위가 비산하는 사이로 도기가 솟구쳐 올라 가마단 무인과 살수들이 휩쓸렸다.
광범위한 공격으로 단번에 몇십을 쓸어낸 팽무성의 무위에도 물러서는 이들이 없었다.
가마단 무인들은 폭마공을 운용하며 사패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고 살수들은 그 틈으로 암기를 날리거나 직접 머리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가마단 무인과 살수들.
이들에게는 목숨을 버리는 데 있어서 조금의 망설임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콰카캉
늑대 무리인 양 끝없이 몸을 날리는 살수들.
당화련은 이들을 지풍으로 요격했고 무각은 부상을 도외시하며 오로지 일격만 노리는 가마단 무인들을 권풍으로 날려버렸다.
퍼퍼펑
사패가 천라지망을 뚫으면서도 거리를 좁힐 틈을 쉽사리 주지 않자 가마단 무인들은 조금만 거리가 좁혀지면 곧장 폭마공을 펼쳤다.
사방에서 펼쳐지는 폭마공. 피와 살점이 암기가 되어 끝을 모르고 쇄도했다.
가마단은 옆에 다른 동료들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러니 섣부른 폭마공의 시전에 돌진하던 가마단이 도리어 폭발에 휩쓸리는 일도 있었다.
그렇다 한들 가마단의 자폭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허허. 아비규환이로다.”
검선은 가마단 무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빠르게 간파하곤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수록 검선의 검이 머금고 있던 바람은 더욱 살벌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검선과 팽무성, 남궁혁이 각자 맡고 있던 방향으로 각기 초식을 펼쳐냈다.
바람과 뇌전이 사방으로 난무했고 그 사이로 거대한 검기가 먼지를 쓸 듯이 가마단 무인과 살수들을 쓸어냈다.
거대한 흙먼지가 솟구치며 이에 휩쓸린 이들의 신형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러자 순간 앞이 시원하게 뚫렸고 검선과 사패는 쉬지 않고 그 길을 파고들었다.
천라지망의 이선을 뚫어내기 시작했고 일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쉬지 않고 검선과 사패의 뒤를 따라붙어 등 뒤를 노렸다.
이선부터는 환마종 마인들도 섞여 있었다.
환마종 마인들은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먼 거리에서 방울 소리와 환술로 철저히 검선과 사패를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바로 앞에서 폭마공의 폭발이 연달아 세 번 터지는 사이 검선이 사패를 둘러보며 말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집중력을 유지하거라.”
수아앙
검선의 검풍이 회오리치며 마침내 천라지망의 이선을 뚫어내고 마지막 삼선만을 남겨놓을 때였다.
밀려드는 검선의 검풍이 하늘에서 떨어진 흑회색 검풍과 맞물리더니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검선, 얼굴 보기가 참 힘들군,”
천라지망의 이선과 삼선 사이의 빈 공간.
그 가운데에 멸세마왕이 홀로 자리를 지켰는데 또 하나의 두터운 벽이 생긴 느낌이었다.
검선은 멸세마왕을 바라보며 자신을 경계하게 만들던 기척 중 하나임을 확신했다.
“누구신가?”
“멸세마왕이라 하네.”
“음, 생각보다 빨리 왔구만.”
“그러게 말일세. 두 걸음만 늦었어도 놓칠 뻔했어.”
자신을 소개한 멸세마왕은 검선의 뒤에 서 있는 팽무성을 보며 수염을 올렸다.
검선과 멸세마왕이 대치하는 사이, 광마군과 두 종주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
“쥐새끼 같은 놈들.”
“겨우 이런 꼼수로 도망칠 것이라 여겼나. 순진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검선과 사패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 뒤를 일선과 이선의 가마단 무인과 살수들이 움직여서 하나의 벽을 다시 만들어냈다.
바깥쪽에서 진을 치고 있던 천라지망의 삼선도 거리를 좁혀서 포위망을 더욱 견고히 했다.
멸세마왕은 검선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것을 보며 물었다.
“검선, 그것이 천마신검인가?”
멸세마왕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두 종주의 눈이 반짝였다.
돌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