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한 치의 멈춤 없이 뻗어가던 검선과 사패가 제자리에 서버리니 주위로 천라지망이 점점 좁혀들었다.
그러나 검선은 그 압도적인 머릿수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몰려드는 인파보다는 단 한 사람. 멸세마왕를 경계하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푸근한 표정을 하는 검선이지만 지금만큼은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멸세마왕의 무공이 어떻든 웃겠지만 등 뒤에 천마신검이 있는 지금은 마냥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앞을 가로막는 마인들의 수준을 보아하니 쉽게 떨쳐낼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검선은 무사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검선은 팽무성에게 천마신검을 맡겨서 사패와 함께 도망치게 할지 고민했다.
물론 이 마인들은 자신이 잡아놔야 할 터였다.
이것을 최선이라 여긴 검선은 머릿속으로 사패가 빠져나가고 자신이 홀로 마인들을 막아내는 상황의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검선이라...”
검선이 그렇듯 멸세마왕도 검선을 눈에 담고 있었다.
서 있는 자세와 검을 잡는 파지법.
자신과 마주하는 맑은 눈빛까지.
‘확실히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것 같구나. 바람처럼.’
검선의 눈빛을 읽던 멸세마왕은 절로 고개를 까딱였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검선이 어떤 검을 선보일지 대략 감이 왔다.
검선을 가늠한 멸세마왕이 검병에 손을 가져가며 앞으로 나서자 검선도 따라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팽무성의 커다란 등이 검선의 앞을 막아섰다.
“무성아?”
“검선 어르신. 저희가 맡겠습니다.”
팽무성의 단단한 목소리에 검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뭐?”
“검선 어르신께서는 할 일이 있지 않으십니까.”
팽무성의 말에 검선은 새삼 등에 메고 있던 천마신검의 무게가 느껴졌다.
검선의 말문이 막힐 때 다른 사패도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각자 상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패의 등을 보며 검선은 살짝 벌어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왕과 마군, 거기에 종주.
그리고 바깥쪽에는 세 겹의 천라지망.
이곳은 분명한 사지(死地)였다.
그럼에도 그 걸음걸이와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패의 뒷모습을 하나씩 눈에 담던 검선은 스스로 자책했다.
‘검만 생각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구나.’
이 자리에 무사히 빠져나가야 할 것은 천마신검이 아니라 사패였다.
마교가 이리 쫓는 것을 보면 무림맹이 모르는 천마신검의 숨겨진 가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안하네. 맹주.’
그러나 검선은 천마신검보다 사패의 가치가 더 크고 무겁다고 판단을 내렸다.
검선, 자신의 목숨보다도.
“거추장스럽구나.”
검선은 등에 메고 있던 천마신검을 풀더니 역수로 잡아서 그대로 땅에 박았다.
내공을 실은 탓에 천마신검의 절반 이상이 땅에 박혀 들어갔다.
“감히 천마의 신물을! 무슨 짓이냐!”
이를 본 풍마종주가 일갈을 터트렸으나 검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검선의 돌발행동에 당황스러운 것은 사패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검선은 웃음을 싹 지우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천마신검은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라.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하거라.”
검선은 무슨 수를 써서든 사패를 살려서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에 따라 검선의 검에 조용히 한 줄기의 바람이 맴돌기 시작했다.
검선의 눈과 검을 번갈아 보던 멸세마왕이 웃음을 흘렸다.
“결정을 내렸나. 지금의 눈빛도 나쁘지 않군.”
멸세마왕이 말을 걸었지만 검선은 묵묵히 죽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답답한 바람이 불어오고 무인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대치를 할 때였다.
작은 빈틈이라도 보인다면 바로 싸움이 벌어질 터였으나 빈틈이 아니라 커다란 변수가 나타났다.
멸세마왕이 검총에 남겨둔 검마군과 환마군의 합류였다.
이에 멸세마왕은 검선에게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어찌 너희 둘이 이곳에 온 것이냐?”
“소교주께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멸세마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풍마종주는 굳은 인상으로 물었다.
“너희만 이곳으로 보내고 소교주는 어디서 뭘 하는 건가.”
검마군이 입을 열지 않자 풍마종주가 흘리던 마기가 거칠게 떨렸다.
풍마종주는 주위를 여러 번 두리번거리더니 으르렁거렸다.
“총단에 돌아가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소교주는 끝까지 구경만 할 셈인가!”
‘소교주...’
팽무성은 소교주라는 소리를 듣고 눈이 가늘어졌다.
그저 이름만 들었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음에도 상당한 경계심이 올라오고 있었다.
검마군과 환마군까지 합류하자 마인들은 조금씩 검선과 사패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꺄아아아악
멸세마왕의 검이 귀곡성을 터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양측의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풍마종주가 검풍을 연달아 쏘아내며 무각과 당화련을 압박했고, 검마군과 광마군이 팽무성의 양측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가세하려는 남궁혁의 앞을 독마종주와 환마군이 막아섰다.
쩌엉
검선과 멸세마왕은 동시에 서로에게 검을 찔러넣으며 맞붙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후우웅
검선의 검은 휘둘러질 때마다 요란한 바람소리를 동반했다. 그 소리가 귀곡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단전을 찌르고 사선으로 올려치는 검선의 검. 거기에서 갑자기 좌측으로 그어지며 멸세마왕의 관자놀이를 베어내려 했다.
형식에서 벗어난 바람과 같은 검초.
고개를 뒤로 빼서 피해낸 멸세마왕은 검을 아래로 쓸어내서 검선의 무릎을 노렸다.
검선은 선 채로 공중제비를 돌아 피해내며 멸세마왕의 가슴을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요란한 검선의 움직임에 검선의 피풍의가 망토처럼 펄럭였고 피풍의에 순간 가려졌던 검이 날카로운 빛을 폭사했다.
까가가강
다섯 가닥으로 연달아 쏘아낸 검기를 갈라낸 멸세마왕의 검이 어지러운 궤적을 그렸다.
한 호흡에 검선을 포함한 주위의 공간을 뒤덮은 흑회색의 검기.
멸세마왕의 흑요란란이 주위를 뒤덮자 검선은 파지를 바꿔 잡아서 창을 돌리듯 검병을 한 손으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부우웅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 검이 원형으로 검풍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풍검아륜(風劍?輪)으로 흑요란란을 파훼한 검선은 멸세마왕에게 선풍장(仙風掌)을 쏘아내며 검을 뒤쪽으로 휘둘렀다.
강력하게 밀려오는 선풍장의 풍압에 멸세마왕은 뒤로 밀려나야 했고, 검선이 길게 내지른 검풍은 팽무성의 뒤를 노리던 검마군의 측면으로 날아들었다.
검선은 멸세마왕과 싸우면서도 사패를 봐주고 있었다.
검선의 간섭을 시작으로 각기 상대를 맡아서 싸우고 있던 전투의 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각법으로 검선을 옆으로 쳐낸 멸세마왕이 허공에 검을 그어내자 광마군의 팔을 잘라내려 했던
팽무성은 급히 허리를 돌려 멸세마왕의 검기를 쳐내야 했다.
독마종주와 환마군을 상대로 여유가 있던 남궁혁도 고전하고 있던 당화련과 무각을 종종 돕기 시작하니.
이것이 반복되고 엉키고 엉켜 서로가 서로의 싸움을 신경 쓰고 돕고 보조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전투의 양상이 흘러가니 주위를 빼곡하게 둘러싸던 천라지망은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벌려야 했다.
종종 눈먼 공격이 천라지망을 구성하고 있는 무인 쪽으로 날아왔는데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탓이었다.
콰앙
콰르르릉
끼아아악
멸세마왕은 검으로 검선을 상대하고 왼팔로 검결지를 지어 사패를 향해 마구잡이로 초식을 날리기 시작했다.
허나 검선이 이를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그렇게 나오는 건가.”
검선이라 불리나 검에 비하여 장법의 조예도 깊은 검선이었다.
멸세마왕이 검과 검결지의 조합이었다면 검선은 검과 장법의 조합이었다.
검선은 사패를 향한 멸세마왕의 공격을 굳이 막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은 장법을 마군과 종주들에게 쏟아냈다.
전장에 귀곡성과 바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검선과 멸세마왕의 공격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니 생사결을 이어가야 하는
다른 이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야 했다.
쩌엉
검마군의 검을 막아내던 팽무성은 옆에서 달려드는 광마군을 주먹으로 쳐내 날려버리곤 고개를 틀었다.
어느새 나머지 사패와 종주, 마군이 묶여서 여섯 명이 한데 어우러져 맞붙고 있었다.
콰아아앙
남궁혁이 초월경에 올랐지만, 구파 장문인급의 무공을 지닌 두 종주가 작정하고 수비적으로 맞서니 쉽게 기회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 검풍과 독, 환술의 조합이라 과감히 나설 수 없어 싸움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적아도를 잡은 팽무성의 두 손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갑자기 검으로 밀려오는 엄청난 힘에 자신의 발이 뒤로 밀리자 검마군은 당혹성을 흘렸다.
“거슬린다. 이 새끼야.”
꽝그대로 검을 쳐내서 검마군을 날려버린 팽무성은 그 기세로 허리를 회전시키며 적아도를 다른 방향으로 힘차게 내질렀다.
콰르릉
도극에서 뿜어진 길고 굵은 뇌전이 비스듬히 솟구쳐서 검선과 자웅을 겨루는 멸세마왕에게 솟구쳤다.
갑자기 날아드는 오호척천의 위맹한 기세에 멸세마왕은 급히 검을 비틀어 검선의 검을 튕겨내곤
오호척천의 도기를 향해 검결지를 찔러넣었다.
꽈아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멸세마왕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폭발 속에서 몸을 회전시켜 땅에 가뿐히 착지한 멸세마왕.
별 피해는 없어 보였지만 멸세마왕의 왼쪽 소매가 어깨까지 찢겨 있었다.
‘무성이에게 신세를 졌구나.’
검선은 왼손을 쥐락펴락하는 멸세마왕을 보며 옅은 한숨을 흘렸다.
삼백여 합을 넘어가는 때에 기습적으로 뻗어온 멸세마왕의 검. 반응이 늦어서 어깨에 검격을 허용할 뻔했다.
때맞춘 팽무성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피풍의가 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왕이라는 자가 이리 강하니, 교주, 마신이라는 자들은 가늠이 되지 않는구나.’
검선은 모서리가 잘려나간 죽립을 벗어 던지곤 다시 신형을 날렸다.
검선이 안전함을 확인한 팽무성은 허리가 깊게 베여 핏줄기를 뿜으면서도 달려드는 광마군을 향해 적아도를 겨누었다.
이렇게 거칠게 움직이면 자칫하다가는 상처가 벌어져 내장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탈인순마공의 회복력과 광야마공의 광기 때문인지 광마군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팽무성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광마군은 두 손을 관수(貫手)로 뻗어 손톱을 한곳에 모아 검처럼 찔러넣었다.
콰직
조기(爪氣)까지 둘러 있어 어지간한 철보다 단단한 손톱이었으나 작정하고 휘두른 적아도에 반 토막이 나서 부러졌다.
광마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손을 뻗었고 팽무성은 광마군의 양 엄지를 한 손으로 잡아내고 복부를 그어냈다.
푸학
“광마군!”
광마군의 복부에서 솟구친 핏줄기에 팽무성도 피범벅이 되었다.
검마군이 급히 검을 뻗어오자 팽무성은 광마군을 검마군을 향해 내던졌다.
이에 검마군이 광마군을 받아내자 한 덩어리가 되어 뒤로 날아갔다.
검마군이 급히 광마군의 복부를 점혈했지만 피는 쉬지 않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기랄.”
워낙 깊게 베이기도 했지만 뇌기 때문에 탈인순마공의 회복력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크륵.”
복부의 상처에도 광마군은 피거품을 토해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복부의 상처를 포함해서 팽무성에게 당한 상처가 여섯 곳이나 되었다.
광마군의 육체가 한계에 달했는지 제힘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무리를 위해 적아도를 치켜들던 팽무성의 걸음이 멈추었다.
팽무성의 동공이 찰나였지만 흔들렸다.
광마군의 뒤로 홀연히 등장한 사내.
이를 본 팽무성은 돌처럼 굳어 한참 그 사내를 쳐다봤다.
“광마군, 걸레짝이 다 되었구나.”
천마휘는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광마군의 목을 부여잡았다.
“컥.”
광마군이 거친 신음을 흘렸으나 천마휘의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탐천마공이 펼쳐지며 검은빛이 뿜어지자 광마군의 터질듯한 근육은 이내 쪼그라들더니
한 줌의 검은 가루가 되어 광마군이 누워있던 자리에 소복이 쌓였다.
그 모습을 보던 팽무성은 이가 부러질 듯 세게 악물었다.
‘마교주!’
탐천마공을 펼쳐 광마군을 흡수하는 천마휘.
낙호곡에서 자신의 심장을 꿰뚫었던 교주의 얼굴과 똑같았다.
“소교주. 오셨습니까.”
천마휘를 소교주라 부르는 검마군의 목소리를 듣고 치솟아 오른 팽무성의 눈썹이 가라앉았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네가 소교주였나.”
살기가 짙은 팽무성의 목소리에 천마휘는 조금 전까지 광마군이었던 검은 가루를 발로 흩어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인가. 팽무성.”
콰르릉
정면에서 몰아치는 거대한 뇌전에 천마휘는 비틀린 미소를 흘리며 손을 내밀었다.
돌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