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채채챙
곤륜산의 어느 숲속에서는 어김없이 칼부림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소리의 진원에는 기다란 나뭇가지 두 개가 연달아 부딪치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 모습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뭉툭한 나뭇가지에 실린 예기.
그 날카로움과 서늘함은 바위마저 충분히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처럼 나뭇가지를 들고 싸우고 있음에도 두 사람의 싸움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나뭇가지가 닿는 곳마다 주변의 만물이 예외 없이 베어졌다.
솨악
도천의 나뭇가지가 허공을 가르자 팽무성의 의복이 살짝 갈라졌다.
팽무성은 반격을 노렸지만 도천은 가볍게 허벅지를 베어오는 도격을 튕겨냈다.
그러자 지척에서 도격을 교환하던 팽무성이 나무 뒤로 슬쩍 이동하며 도천의 시야를 가려냈다.
솨앙
그러자 도천의 나뭇가지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나무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성인 장정 두 명이 팔을 쭉 뻗어야 안을 수 있는 두께의 나무가 종이인 양 잘려나갔다.
나무를 쪼개고도 예기가 조금도 죽지 않은 도격은 그대로 그 뒤의 팽무성을 갈라내려 들었다.
팽무성은 사선으로 쇄도하는 도천의 도격과 똑같은 투로로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파악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도천의 도격을 무마시킨 팽무성의 나뭇가지가 휘몰아쳤다.
오른쪽 허리와 어깨를 동시에 베어오자 도천의 나뭇가지가 순간 살아있는 뱀 마냥 위아래로 꾸물거렸다.
반 갑자 전에 열사도(裂蛇刀)라는 사파 무인의 독문 무공인 열사십사도(裂蛇十四刀)의 한 수.
도천이 가볍게 나뭇가지를 쳐내자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팽무성은 그 움직임을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었다.
‘아직도 보이지 않은 도법이 있다니. 대체 몇 개의 도법을 알고 계신 거지.’
도법에 한해서 도천은 걸어 다니는 무공서고라고 해도 될 만큼 무수한 도법을 알고 있었다.
파지를 느슨하게 잡은 팽무성은 손목에 탄력을 주었다. 그러면서 도신의 역할을 하는 나뭇가지에는 무거운 힘을 실어냈다.
그러자 팽무성의 나뭇가지가 거센 물결 타고 오르는 연어처럼 출렁이며 솟구쳤다.
“음. 필요한 것만 쏙 빼먹었나.”
눈썹을 비튼 도천은 다시 나뭇가지를 바꿔 잡으며 크게 반원을 그렸다.
이번에는 단순한 강격.
뻗어오는 나뭇가지에는 산을 쪼갤 수 있을 만한 거력이 실렸다.
이를 본 팽무성도 두 발의 간격을 벌린 채 그대로 나뭇가지를 뻗었다.
팽무성의 도격이 도천의 나뭇가지를 휘감으려 할 때였다.
쩌억
돌연 팽무성의 나뭇가지가 중간부터 터져버렸다. 그 사이 도천의 나뭇가지가 팽무성 바로 앞에 멈춰있었다.
이에 팽무성이 입고 있던 무복이 수직으로 쩍 갈라져 맨살이 드러났다.
도천이 가만히 나뭇가지를 내리자 팽무성이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딱밤을 날리지 않으시네요.”
“나쁘지 않았다.”
도천은 팽무성이 쥐고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내려다봤다.
“슬슬 서른 개가 넘은 것 같은데.”
팽무성의 나뭇가지가 부러진 횟수였다.
“예. 이제 멀쩡한 나뭇가지를 찾는 것도 일입니다.”
처음에는 나뭇가지를 쥐고 십여 합도 못 버티던 팽무성인데 이제 백여 합은 거뜬히 넘기고 있었다.
거기에 도천이 평생 무림을 떠돌며 만난 수많은 도객들의 도법을 아낌없이 보여주니
팽무성은 그 자체로 안목을 넓히면서 필요한 것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군.’
도천은 주변에 쓰러진 나무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더니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좀 쉬자.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몸을 움직였더니 뻐근하다.”
팽무성이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벌써 중천에 자리하고 있었다.
팽무성은 용진이 준비해준 주먹밥을 꺼내서 도천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내는 나란히 앉아서 주먹밥을 한입씩 베어 물었다. 바람에 몸을 식히며 배에 뭐가 들어가니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으음. 밥 안에 든 것은 별로 없는데 허기가 져서 그런가, 별미가 따로 없군.”
“배고프면 뭐든지 맛있는 법이니까요.”
팽무성은 주먹밥을 절반쯤 먹을 때 도천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이 들어간 용구동이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나도 정확히 아는 것은 없다. 원래 곤륜비맥의 전승자들이 수련하는 비동이라 알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용천이 수련을 시킬지는 모르겠으나 사패도 제법 고생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용천은 언뜻 온화한 듯 보여도 무공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편이었으니.
“용진, 그 사내도 강하더군요. 처음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용천의 뒤를 이어 곤륜비맥를 이어야 하는 사내. 무림에 전혀 이름을 날린 바가 없었고 이는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런 것치고는 지닌 무공이 너무나 고강했다.
무각이나 당화련보다 한 수 위였으니.
“곤륜비맥을 이어야 하는 녀석이니 보통 인물은 아닐 테지.”
곤륜파 무학의 근원이라 전해지는 곤륜비맥. 무림의 긴 역사에서 무수한 외세의 공격을 받은 곤륜파.
그중에는 곤륜파의 경내가 전부 불살라지는 대참사도 두 번이나 일어났었다.
그럼에도 곤륜파의 무학이 온전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곤륜비맥 덕분이었다.
꺼지기 직전인 곤륜파의 불꽃을 몇 번이나 되살린 것은 곤륜비맥이 일으킨 바람이었다.
“자, 다시 시작할까.”
곤륜비맥의 이야기를 반찬 삼아 먹다 보니 금세 사라져버린 주먹밥이었다.
“예.”
팽무성은 점심을 해결하기 전에 미리 찾아놓은 나뭇가지를 들며 일어섰다.
팽무성과 도천의 나뭇가지가 교차하며 대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싸우고 밥을 먹고, 다시 싸우고 명상을 하고.
해가 몇 번이나 지고 떴음에도 팽무성과 도천의 일과는 쳇바퀴를 돌 듯 계속 이어졌다.
촤아악
팽무성이 자신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가 몇 번째인지 잊었을 무렵.
나뭇가지가 간결한 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는 상대하는 도천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쌓아온 무림의 모든 도법을 하나씩 펼쳐냈던 도천이었다.
그러나 지금 도천의 나뭇가지는 지극히 간단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종횡, 좌우사선. 그리고 찌르기.
오호단문도와 폭풍도식도 없었다.
두 고수는 직선, 사선, 곡선을 그려내며 상대와 숲속을 거칠게 거닐고 있었다.
나뭇가지의 투로는 단순해졌으나 서린 예기와 위력은 더욱 매서워졌다.
팽무성이 흘린 땀방울이 도천의 나뭇가지에 두 쪽으로 갈라졌고, 뒤따라 뻗어진 팽무성의 나뭇가지에 다시 한번 네 등분이 되었다.
쩌엉
거센 진동과 함께 팽무성과 도천이 동시에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나야 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고수는 동시에 걸음을 내디뎠다.
똑같은 자세, 똑같은 투로로 나뭇가지를 뻗어내는 두 사람.
뻐엉
나뭇가지가 그려낸 두 직선이 교환되는 순간. 거센 기파가 터지며 주변의 숲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이것으로 모자라 주변의 대지는 기파에 실린 예기에 깊게 갈라지며 맨살을 드러낸 상황.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수준의 충돌이었지만 팽무성과 도천의 나뭇가지는 멀쩡했다.
팽무성과 자신의 나뭇가지를 번갈아 보던 도천은 미련 없이 나뭇가지를 던졌다.
“잘했다. 잘했어. 이제 내 손을 벗어났다.”
도천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칭찬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 팽무성은 말없이 포권을 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천의 독문무공인 폭풍도식을 전수하지 않았을 뿐, 도천은 도(刀)에 대한 모든 것을 팽무성에게 전수했다.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이미 도천과 팽무성은 사제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도천도 감회가 새로운지 예를 갖추는 팽무성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도천이 걸음이 멈춘 앞에는 팽무성이 나무에 기대어 놓은 적아도가 있었다.
도천은 직접 팽무성의 요대에 적아도의 도갑을 매어주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평생을 도에 매달렸지만, 결국 삼천에 그쳤다.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할 것이다. 네가 벨 수 없는 것은 이 천하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팽무성은 도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다.
“도천의 도를 이었으니 당연히 천하제일이 되어야지요.”
이에 도천의 눈매가 슬며시 휘었다.
“암, 그렇게 못한다면 딱밤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팽무성과 나란히 서서 용두봉의 봉우리로 돌아가던 도천은 중얼거렸다.
“이제 내공을 채우는 것만 남았나.”
용두봉에 돌아가니 마침 용천을 비롯한 사패도 용구동에서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오늘도 용천의 가르침이 꽤나 혹독했는지 사패의 얼굴은 살짝 핼쑥해져 있었다.
“무슨 일로 빨리 돌아왔나. 도천. 맨날 해가 지기 전에 오더니만.”
“내가 할 일은 끝냈다.”
“호오. 빠르군.”
도천의 말뜻을 알아들은 용천은 짧게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은 내가 무성이와 함께 용구동에 들어가야겠군.”
* * *
“다들 모이셨군.”
야명주로 빛을 밝히고 있는 어두운 비동 안에 천마휘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마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종주들이었다. 종주들의 면면을 살피던 천마휘는 빈자리를 보며 웃었다.
“역시 검마종주께서는 오지 않으셨군.”
“검마종주는 충성심이 강한 자이니 교주가 무슨 짓을 해도 교주의 편에 들 테지요.”
요마종주의 말에 천마휘도 예상한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음을 정해놓은 듯 천마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정말 아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검마군.”
이에 천마휘의 뒤에 서 있던 검마군이 살짝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마휘가 무슨 명령을 내릴지 아는 탓이었다.
“네가 검마종주가 되어야겠다.”
검마군은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존명.”
검마군의 대답을 들은 천마휘는 자연스레 회의를 이어갔다.
“괴세마왕의 죽음으로 비어버린 권마종주의 자리도 내 사람으로 채울 것이오.”
“그렇다면 풍마종을 제외한 여덟 마종이 소교주의 편에 서는 것이로군요.”
암마종주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가만히 듣고 있던 독마종주가 천마휘에게 물었다.
“멸세마왕과 곤세마왕께서도 찬동하셨지만, 마신들의 의중은 어떠한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좋은 질문이오. 독마종주.”
자신 있게 답하는 천마휘의 태도에 종주들이 기대가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천마신께서는 상관하지 않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셨고 지마신께서는 한번 해보라고 하셨소.”
한 명은 방관, 다른 한 명은 지지.
이제 천마휘는 꺼릴 것이 없었다.
“이제 시간을 끌 것이 없소.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소.”
“존명.”
천마휘의 명령에 다른 종주들과 함께 고개를 숙이던 독마종주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천마휘의 협박으로 반강제적으로 편에 서기는 했지만 설마 대부분의 종주들이 천마휘의 아래에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거늘, 어느새 종주들을 이리 포섭했단 말인가.’
본교 안에서 마이각의 눈을 피해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니, 잠깐.’
회의 내용을 들어보면 본교의 주요 타격대도 천마휘의 손에 넘어간 쪽이 많았다.
‘설마 마이각도 소교주가?’
단순히 무공을 뛰어넘어 은밀하게 천마신교를 삼키고 있는 천마휘의 수완에 독마종주는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공포를 느꼈다.
독마종주가 느끼기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천마신교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듯싶었다.
절대의 경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