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무림맹은 이른 새벽부터 발칵 뒤집혔다.
잡일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된 양민부터 시작해서 말단 무인, 당주 급의 간부까지 총 열 명이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죽은 이들의 신분과 위치가 다양한 만큼 사인도 제각각이었다.
시신이 발견된 곳에는 여러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지옥련과 만살회에서 살행을 성공했을 때 남기는 표식들이었다.
배정된 숙소에서 쉬고 있던 사패도 일어나서 그 소식을 접했다.
“지옥련과 만살회. 역시 잔당이 남아있었나.”
팽무성의 중얼거림에 술 한 모금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남궁혁이 입맛을 다셨다.
“요즘은 무림맹에 출입하는 인원이 야밤까지 상당하니 살수들도 그만큼 들어오기가 쉽겠지.”
“역시 무림맹도 가만히 두지를 않네요.”
“아미타불, 살수 놈들. 여천고원에서 조금 놓쳤었지. 그때 다 쳐 죽였어야 했는데.”
사도천을 외부에서 흔들고 무림맹은 내부에서부터 흔들려는 마교였다.
사패가 아침 식사를 하며 마교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패가 머무는 전각으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찾아온 손님들은 팽무성으로서도 오랜만에 보는지라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철호!”
팽무성을 찾아온 것은 하북팽가에 있어야 할 팽호대였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철호가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자 뒤에 도열해 있던 팽호대 전원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소가주라는 호칭에 팽무성도 입꼬리를 올렸다.
팽무성은 자신 앞에 서 있는 팽호대의 수준을 가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제법 고생했나 본데.”
팽무성의 호평에 도열해 있던 팽호대원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제일 앞에 있던 철호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고수하며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본가에서 제일 먼저 파견 나온 것이 팽호대인가.”
“예. 팽호대가 제일 먼저 파견되었고 추가로 타격대 셋이 칠주야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팽호대는 무림맹에 입성하자마자 사패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곧장 찾아온 것이었다.
철호는 보고하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었다.
“저희가 무림맹 앞을 지날 때 아이에게 이 서신을 받았습니다. 가월의 친구가 보낸 것이라 하면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에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팽호대는 자신과 천살택문의 관계를 모르니 그런 말을 했을 터.
천살택문에서 보내온 서신을 읽던 팽무성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팽무성은 서신을 접곤 철호에게 물었다.
“요즘 본가의 상황은 어때?”
“좋습니다. 마랑문과 진주언가는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본가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북팽가는 팽중혁이 이끄는 대무각을 통해서 계속 무공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고,
금적상단과 은하상단이라는 쌍두마차에 올라탄 팽소혁이 각지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거기에 신의와 담영약가의 지원까지.
무력과 재력이 균형을 이루며 꾸준히 성장하니 하북팽가는 계속 덩치를 키우며 옛 성세를 되찾는 중이었다.
이제 팽무성 하나에 의존하던 하북팽가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팽무성이라는 존재가 없어도 그 스스로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 하북의 패자는 명실공히 하북팽가였다.
전생의 변함없는 하북팽가라면 지금 같은 시기에 타격대 넷을 무림맹에 파견 보내는 일은 절대 불가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해냈구나. 이제야 서서히 궤도에 올랐나.’
팽무성은 달라진 하북팽가를 체감하며 뿌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팽무성도 이정도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으니 팽가의 세를 더 키울 생각이었다.
언제나 오대세가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남궁세가를 한 번 넘어서는 것은 무림세가에 속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꾸는 꿈이 아닌가.
이 꿈이 이제는 허황한 것이 아님을 팽무성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룩해낼 자신이 있었다.
‘너희들도 그 길에 앞장서야 할 거다.’
팽무성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팽호대와 눈을 맞추었다.
전생에 비하여 그 규모가 배는 늘어난 팽호대. 지금 이렇게 보니 전생에 팽호대에 속했던 이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이러니 마치 전생의 팽호대가 살아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때 덕삼이 팽무성에게 슬쩍 말했다.
“소가주, 명색이 팽호대가 소가주의 직속 타격대인데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 역시 일조장.”
이에 팽무성도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자리를 만들도록 하자. 당분간은 제법 시끄러울 것 같으니. 대신 내가 제대로 준비하도록 하지.”
호탕한 팽무성의 대답에 팽호대가 일제히 환호를 터트렸다.
팽무성과 팽호대가 가볍게 회포를 풀고 있을 때 대문을 넘어서 호천대의 무인이 들어왔다.
호천대의 무인이 직접 왔다는 것은 남궁구의 부름이 있다는 것이었다.
“팽 대협. 맹주님께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를 원하시는데 괜찮으신지요?”
* * *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무림맹답게 본성의 곳곳에는 보기 좋게 꾸며진 정원이 많았다.
호천대 무인은 사패를 맹주전과 가장 가까운 정원으로 안내했다.
이 정원에는 넓은 연못 위에 커다란 누각이 지어져 있어 무림맹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누각의 근처에는 호천대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사패는 계단을 올라 누각의 위로 향했다.
누각 위에는 상석에 앉은 남궁구 뿐만 아니라 무림맹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자리했다.
“말학 후배가 여러 선배님을 뵙습니다.”
팽무성을 비롯한 사패의 인사에 간부들은 호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하나같이 훌륭하구만.”
“껄걸. 하북팽가에서도 보기 힘든 체격이라더니, 과연.”
“어서들 오시게.”
그동안 사패 덕분에 원래라면 골머리를 앓았어야 할 일들을 쉽게 풀어낼 수 있었던 무림맹이다.
사패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간부들이 여유롭게 앉아있을 수도 없었을 터.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사패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부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사패를 반길 때 남궁구는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리 불러서 미안하구나. 이 자들이 너희들을 그렇게 보고 싶다 하길래 식사나 같이할까 하여 불렀다.”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나. 자리에 앉거라.”
사패가 남은 자리에 앉자 한참 회의 중이었는지 천안각주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어서 말하자면 광서와 광동은 마교의 손에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방금 앉은 사패도 천안각주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천안각주는 누각의 한쪽에 걸려있는 중원 전도를 기다란 막대기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전의 운남과 귀주, 그리고 이번에 호남과 광서로 올라오고 있는 새로운 병력의 진로를 확인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마교의 병력은 운남과 사천을 공격했을 때에 비해 훨씬 많은 수였다.
거기에 병력의 수도 그렇지만 군단을 이끄는 마왕들도 모습을 드러낸 상황.
본격적인 마교의 침공이 시작된 것이었다.
“새롭게 들어온 정보는 있나?”
“호남은 무천궁이 있기에 아직 잘 버티고 있습니다. 남부의 전선이 유지되는 중인데.”
천안각은 말끝을 흐리더니 호남성 옆에 있는 강서성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강서성은 파죽지세로 쭉쭉 밀리고 있습니다. 사도천 강서지부와 사도칠문의 묵현산장이 있지만, 아무래도 마왕의 존재가 큰 듯합니다.”
호남성에 등장한 마왕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있지만 강서성에 등장한 마왕은 직접 전방에 나서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팽무성은 천안각주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자리에 놓인 종이를 살폈다.
그 종이에는 현 무림에 대한 상황과 간부들에게 올라오는 정보가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남궁구가 팽무성에게 물었다.
“무성아, 호남과 강서에 각기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다. 호남에는 난세, 강서에는 곤세라고 하던데 아는 바가 있느냐?”
낭왕과 창성이 이 마왕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기 무림맹 본성을 벗어난 상황.
‘난세마왕...’
팽무성은 처음 들어보는 마왕의 이름에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숨겨진 전력인가. 뭐 상관없겠지. 만나면 베어버리면 되니.’
“난세마왕은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곤세마왕은 식마종의 마공을 쓰는 자인데 아마 십대고수의 왕보다 강할 것입니다.”
“흐음.”
남궁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다행히 강서성에는 창성이 가는 중이지만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때 누각 위로 숙수들이 준비한 음식들이 차례로 올라오고 있었다.
향긋한 음식의 냄새에 다소 진지했던 누각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먹으면서 하지.”
남궁구가 먼저 젓가락을 들자 다른 간부들도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기 시작했다.
“이번에 감히 무림맹 본성에서 암살을 한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식사하면서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익숙한 듯 간부들은 입을 계속 움직이면서도 귀에 집중을 쏟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살수들을 찾고는 있지만, 아직 묘연합니다.”
“외성 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송구합니다. 맹주.”
이번에 벌어진 살행은 외성과 내성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이에 각기 내성과 외성의 경계를 책임지는 내산각주와 외암각주는 고개를 숙였다.
“지옥련이나 만살회. 둘 다 만만한 곳이 아닌데.”
“역시 마교의 소행이겠지요. 귀찮게 되었습니다. 살행을 멈추지 않을 테니 빨리 대책을 만들어야겠습니다.”
한참 무차별 살행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질 때였다.
“크음?”
간부 하나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더니 붉어진 얼굴로 목을 부여잡았다.
“철진각주! 괜찮나!”
“독인가!”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각자 몸상태를 확인하게!”
“커억.”
철진각주에 이어서 다른 두 명의 간부도 독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팽무성이 직접 극양의 기운으로 독을 태우려고 몸을 일으킬 때, 팽무성의 귀가 쫑긋거렸다.
콰아아앙
누각을 지탱하고 있는 여덟 개의 기둥에서 일제히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누각의 바닥에도 화탄을 달아놓았는지 솟구치는 화기가 느껴졌다.
다른 이들은 화탄의 폭발에 채 반응조차 못 한 찰나의 시간. 먼저 움직이는 것은 팽무성과 남궁구, 남궁혁이었다.
이들은 각기 호신강기를 펼치면 화탄의 폭발은 거뜬히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간부들은 그대로 폭염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각기 나눠서 막아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순간의 찰나를 십여 개로 쪼갠 시간 속에서 서로 눈빛을 교환한 세 절대고수는 가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궁구와 남궁혁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서서 기둥을 타고 올라오는 폭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팽무성은 그대로 산왕군림보를 펼쳐낸 진각을 누각의 바닥에 찍어눌렀다.
발끝에서 쏟아지는 산왕군림보의 압력이 누각의 바닥을 태워 부수고 올라오는 폭염을 짓눌렀다.
촤아아아
압력에 짓눌러진 화력이 그대로 밑에 있던 연못으로 강하하자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진 듯 연못이 크게 들썩이며 짙은 수증기를 뱉어냈다.
기둥 쪽의 화염도 마찬가지였다.
남궁구와 남궁혁이 촘촘하게 만들어낸 검영의 벽을 뚫지 못한 폭염은 결국 힘을 잃고 허공에 열기만 남긴 채 사라지고 있었다.
쿠르릉
그 틈에 간부들은 무너져 내리는 누각 속에서 급히 몸을 뺐고 독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간부들은 팽무성이 허공섭물로 밖으로 옮겼다.
“맹주님!”
“다들 괜찮으십니까!”
누각 밑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호천대 무인도 일부는 폭발에 휘말렸는지 그 무복이 새까맣게 타거나 옅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남궁구는 검을 집어넣고는 팽무성이 맥문을 잡는 간부의 얼굴을 확인했다.
빠르게 혈색을 도는 것을 보고 남궁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중얼거렸다.
“화탄이라... 지옥련인가.”
무림맹 한복판에서 이런 꼴을 당했으니 맹주와 간부들의 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무림맹주를 호위하는 호천대도 마찬가지였다.
“꼴사납게 제대로 당했어. 어제 일도 그렇고 오늘까지. 무림맹이 제대로 농락을 당했구나.”
남궁구의 굳은 목소리에 호천대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맹주님.”
팽무성은 극양의 내공으로 독을 다 태운 뒤에 당화련에게 맡기곤 몸을 일으켜 남궁구에게 걸어갔다.
“아마 맹주님을 노렸던 것은 아닐 겁니다.”
방금과 같은 폭발이라면 맹주와 간부들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있어도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겠지. 나도 그렇고 다른 간부들도 그렇고 화탄 몇 개 터트린다고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이에 팽무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이 우리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군요.”
무림맹 한복판에서 맹주와 간부들에게 손을 댄 것으로 만살회와 지옥련은 무림맹 전체에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 어느 곳에든 자신들이 찾아갈 수 있다고.
“살수들 덕분에 간만에 피가 끓는구나.”
남궁구는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제법 화가 난 듯 눈썹 끝이 살짝 치솟았다.
이에 팽무성은 아까 회의에서 하려던 얘기를 지금 꺼냈다.
“맹주님. 아무래도 살수들은 살수끼리 놀게 하는 게 제일 좋지 않겠습니까.”
팽무성의 말에 치솟았던 남궁구의 눈썹이 슬쩍 내려왔다.
* * *
축(丑 오전 1~3시) 시가 되었을 무렵.
남궁구는 맹주전의 집무실에 남아서 홀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했고 집무실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간혹 흔들리는 등불뿐이었다.
그 등불이 다시 한번 흔들릴 때, 남궁구의 눈이 번쩍 떠지며 발검을 펼쳐냈다.
꺼엉
남궁구는 자신의 검이 막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살수들의 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