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사패를 위한 길을 뚫기 위해 백팔나한진을 지나쳐 나아가는 무림 연합의 무인들.
낭왕을 선두로 천랑회의 최정예들이 마교 못지않은 거친 기세로 길을 만들었다.
낭아검법의 흉포한 검초가 겁 없이 덤벼드는 마인들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그 뒤로 천랑회의 낭인들이 냉혹한 손속을 보이며 마인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이를 넌지시 바라보던 도천이 뒤를 보며 소리쳤다. 도천의 시야에 들어오는 무인들은 특이하게도 모두 도객이었다.
도에 일생을 바친 자들.
도천이 이끄는 도혼련의 도객들이었다.
“이놈들아,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해봐라!”
이에 도객들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련주!”
“잘 보고 계십시오.”
도혼련의 도객들이 갖가지 도를 선보이고 있었다.
십도(十刀)를 비롯한 백 명의 도객이 각자의 도법을 뽐내며 마인들을 베어 넘겼다.
“세가에서 핏덩이들만 상대하다가 이렇게 마인들을 상대하니 반가운 기분이군.”
“오랜만에 확실히 몸을 풀겠습니다.”
하북팽가에서 교관직을 맡고 있던 일도와 삼도도 지금만큼은 도천의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뒤로 의룡단, 팽호대, 창궁검대가 중앙의 사패를 보호하듯 둘러싸며 길을 뚫어내고 있었다.
“음.”
팽무성은 길을 따라 달리는 와중에도 주변의 전황을 읽어내고 있었다.
“일조가 무너지려고 합니다! 마인들의 공세가 강합니다!”
“폭마공으로 저놈들의 대열을 무너트려!”
마교와 무림 연합이 어지럽게 뒤섞여 난전을 벌이고 있었고 양측에서 계속 새로운 타격대가 투입되며 전투는 고양되고 있었다.
마인의 검이 무림맹도의 가슴을 그어내려 할 때, 팽무성의 손이 움직였다.
떠엉
팽무성이 날린 지풍은 검을 부러뜨림과 마인의 목젖을 관통했다.
팽무성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도움을 주는 형식으로 무림 연합을 거들고 있었다.
팽무성의 소매가 펄럭일 때마다 서너 명의 무인들의 목숨이 구해지고 있었다.
지풍으로 벌써 서른이 넘는 마인을 조용히 쓰러트린 팽무성의 호안이 전반으로 향했다.
마인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짙은 자색의 독연. 마인들은 이미 해약을 복용한 것인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있었다.
마인들 사이로 희미하게 퍼지던 독연은 점점 짙어지더니 구름처럼 덩치를 부풀며 무림 연합의 무인들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종종 무인들이 날린 검풍에 독연이 뒤로 밀려났지만, 임시방편일 뿐, 독연은 꾸준히 앞으로 뻗어오고 있었다.
“크윽.”
“조장!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제길, 어떻게 잡아낸 위치인데.”
독연을 마시고 마인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무림 연맹의 무인들이 일단 물러서려고 할 때, 하늘 위로 수십 마리의 검은 나비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녹색 소매를 펄럭이며 당가의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독사대는 좌측으로, 만독대는 백호단으로 가라!”
“예! 가주!”
당가에서 날린 추혼비접이 독연 위로 희멀건 가루를 뿌렸고, 독연을 마주한 당가 무인들도 소매에서 작은 환을 꺼내서 노란 독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에 독마종이 일으킨 독연은 사천당가의 독연에 의해 점점 그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당가 놈들, 귀찮게 하는구나.”
독마종의 독연을 중화하는 당가 무인에게 날아드는 독마종주의 장력.
퍼어엉
그 앞을 막아선 당백이 독장을 내질러 독마종주의 독장을 허공에서 터트렸다.
“당가주. 독마종의 독에 대해 연구를 제법 했나 보군.”
“사천에서 네놈들의 독에 의해 죽은 이들이 수없이 많은데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오늘은 아낌없이 본종의 극독을 풀어내도록 하지.”
“마찬가지다.”
독인에게 숨겨진 독은 비장의 한 수나 마찬가지. 그러나 오늘과 같은 마지막 전장에서 수를 아껴놓을 필요는 없었다.
파파팡
당백과 독마종주의 독장이 뒤섞여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독기가 가득 뭉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경지에 오른 독인들의 격돌에 주변에 있던 독마종 마인이나 당가 무인들도 급히 거리를 벌려야 했다.
당백과 독마종주가 맞붙을 때, 길을 돌파하는 팽무성 일행도 꾸준히 마교의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낭왕은 마교의 장로 중에서도 열손에 꼽히는 십야백로(十夜白老)와 만마진기단에 발이 묶여 이탈한 상황.
이에 선두는 도혼련의 십도가 앞으로 나서서 길을 뚫어내고 있었다.
그런 십도의 앞에도 어김없이 독연이 구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십도가 일제히 쏟아낸 도풍에도 독연은 계속해서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흐음.”
이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도천이 손을 움직이려던 찰나, 위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내렸다.
화르르륵
독연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검은 화염.
독연을 모조리 태워버린 당영주는 독염을 머금은 쌍장을 내질러 마인들을 불태웠다.
“끄아악!”
전신에 화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마인의 정수리를 후려친 당영주는 팽무성을 보며 소리쳤다.
“가시오!”
팽무성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팽호대와 함께 사패의 옆을 지키던 창궁검대주는 홀로 마인들을 상대하는 당영주의 등을 보더니 남궁혁을 쳐다봤다.
“소가주! 저희는 이쯤에서 남아 길을 막겠습니다.”
“음. 부탁하겠네. 자네들 모두 끝나고 보세.”
“예! 소가주!”
창궁검대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당영주의 양옆을 채웠다.
“돕겠소이다.”
“남궁세가 최강이라 불리는 창궁검대인가. 든든하군.”
창궁검대주는 당영주의 활약으로 비어있던 공간을 빠르게 채우는 마인들을 보며 소리쳤다.
“의기천추(義氣千秋)!”
“협로진보(俠路進步)!”
창궁검대주의 우렁찬 호령에 창궁검대가 일제히 화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당화련은 당영주와 창궁검대가 마인들에게 둘러싸여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되자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도 거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당화련의 물음에 팽무성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우리가 모든 상황에 도움을 줘야 할 정도로 무림 연합은 약하지 않다.”
팽무성은 저 너머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각자 해내야 할 역할과 싸울 곳이 정해져 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때야.”
지금 마교의 병력을 돌파하는데 도천이 나섰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협곡의 입구에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뒤에서 가끔 도움만 주는 까닭은 도천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나설 수 있는 때를.
“화련아.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히 가라앉혀라. 지금은 전쟁 중이다.”
팽무성의 단호한 목소리에 당화련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하늘에서 십여 개의 검은 구슬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구슬의 크기는 작았지만 어마어마한 마기가 집약되어 있었다.
이를 본 도천이 처음으로 도를 뽑아 회오리치는 도풍을 일으켰다.
쿠콰콰카
도풍에 밀려 더는 높이를 줄이지 못한 구슬들은 허공에서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의 위력에 그 밑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바람에 쓸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오는군. 뭐, 당연히 그래야지.”
허공답보를 펼치며 내려오는 지마신과 지마신이 직접 키워낸 극지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지마신은 협곡의 입구와 채 백 보도 되지 않는 곳에 무림 연합의 병력이 도달한 것을 보고 웃음을 자아냈다.
“나와 도혼련, 천랑회가 맡는다.”
지마신에서 눈을 떼지 않는 도천의 대답에 의룡단이 앞으로 나서서 길을 뚫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팽무성을 잠시 쳐다보던 지마신은 고개를 돌려 도천을 살폈다.
“사도천주보다 한 수 처진다고 들었는데.”
“사천에게 맞고 도망친 놈이 혓바닥이 길구나.”
도천과 지마신이 서로에게 달려들 때, 의룡단은 협곡의 입구를 막고 있는 마지막 병력을 마주했다.
‘우리와 같은 후기지수들인가.’
길을 막는 소마단의 면면을 확인하던 일향은 손을 들며 소리쳤다.
“개진!”
의룡단은 일전에 현무단의 묵수현무진에 맞섰던 검진을 펼쳐내 소마단의 진영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단주!”
“지금입니다!”
묵연사와 용진이 아주 얇은 길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일향이 사패를 바라보며 포권했다.
“팽 형님. 이곳에서 사패의 퇴로를 사수하겠습니다. 기필코.”
“퇴로는 필요 없다. 마교주를 죽이고 남은 마인들도 다 베어버릴 거다.”
팽무성은 일향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사패는 의룡단이 소마단을 상대하며 만들어준 길을 통해서 협곡의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처음에만 해도 수많은 이들이 사패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지만 이제 남은 것은 팽호대 뿐이었다.
“멈춰라.”
협곡의 입구에 도열하여 서늘한 기세를 흘리는 멸마혈검대.
마교주를 호위하는 직속 타격대답게 사패와 팽호대를 마주하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도리어 불꽃과 같은 투기와 살기를 흘려내며 상대를 압도하려고 들었다.
쿵진각을 밟은 철호가 앞으로 나서더니 그에 대항했다. 차례로 덕삼을 비롯한 팽호대가 눈을 부릅뜨며 기세를 뿜어냈다.
무림에 손꼽는 타격대로 성장한 팽호대.
하나 만마오단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만마혈검대를 상대로는 아직 부족함이 있었다.
철호가 이에 미간을 살짝 찌푸릴 때, 당화련과 무각이 팽호대에 합류했다.
“아미타불. 우리는 여기에 남아야 할 것 같군.”
“팽호대를 도울게요.”
만마혈검대는 팽무성이 협곡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는지 팽호대만 주시하고 있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사패는 각자 몸을 날렸다.
만마혈검대와, 팽호대, 무각, 당화련이 전투를 시작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팽무성과 남궁혁은 단둘이 협곡으로 진입했다.
협곡의 지형을 보던 팽무성의 눈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협곡의 중앙쯤 나아갔을 때, 한 사내가 홀로 팽무성과 남궁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마군.”
검마군의 얼굴을 확인한 남궁혁은 경공을 멈추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남궁혁을 잠시 쳐다본 검마군은 팽무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나가라, 팽무성. 교주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검마군의 말에 팽무성은 남궁혁을 쳐다봤다. 이에 남궁혁은 온화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게. 팽 아우.”
멀어져가는 팽무성을 보며 남궁혁은 천천히 발검하여 중단으로 올렸다.
“이 인연도 오늘로 끝이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검마군.”
검마군도 검을 뽑아 하단으로 늘이며 남궁혁과 거리를 좁혔다.
“인연이라... 악연이 아닌가.”
“그건 아니지. 무림에서 똑같은 상대와 여러 번 검을 맞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호적수의 존재는 무림인의 축복일세.”
남궁혁의 너스레에 무표정하던 검마군의 얼굴 근육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제 이 악연, 아니 인연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
귀곡성이 터져 흘렀고 푸르른 검기가 협곡의 그림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 * *
“왔느냐. 팽무성.”
협곡의 끝에서 마교주의 상징인 구룡암포를 걸친 채 팽무성을 맞이하는 천마휘.
그 모습은 전생의 천마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전생의 천마휘를 떠올린 팽무성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역시 교주가 되었구나. 천마휘.”
으르렁거리는 팽무성의 목소리에 천마휘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교주가 되었지. 하지만 별 감흥은 없다.”
천마휘는 주변의 협곡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싸울 마지막 장소를 살피는데 이곳의 지명이 내 마음에 들더구나. 이 협곡의 이름이...”
“낙호곡.”
팽무성이 자신의 말을 끊고 답하자 천마휘의 눈과 입술이 더욱 불길하게 비틀렸다.
“팽무성. 예전부터 궁금했다. 여천고원에서 천마백팔식을 알아보고, 지금 이렇게 낙호곡의 지명을 아는 것도 그렇고.”
천마백팔식은 물론이고 낙호곡이라는 지명도 이백 년 전에 십만대산에 자리 잡은 마교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단순히 정보력이 대단하고 박학다식하다고 하여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팽무성, 너는 정말 기묘하구나. 네놈의 그 사나운 눈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지?”
“당연히 네놈의 죽음이다.”
적아도를 뽑아드는 팽무성을 보며 천마휘는 조소를 자아냈다.
“그런가? 나는 천마지로의 끝이 보이는데.”
전생의 팽지혁이 죽었던 장소, 낙호곡.
팽지혁의 끝이자 팽무성의 시작이 되었던 곳.
‘이곳에서 다시 네놈과 겨루게 되는군.’
팽무성과 천마휘의 얽힘도 낙호곡에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팽무성이 환생 이후로 걸어온 길과 천마휘의 천마지로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결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