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분명 마지막에 팽무성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검붉은 빛이었다.
“대체 이곳은?”
분명 낙호곡에서 천마휘와 자웅을 겨루고 있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곳에 홀로 서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팽무성은 천천히 주변을 사렸다. 사방이 오로지 순백의 빛으로 물든 신비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세상에서 오직 한 그루의 단풍나무가 팽무성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팽무성은 멍하니 그 단풍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그 단풍나무 아래에는 한 사내가 팽무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팽무성.”
백색 무복에 백색 장포를 어깨에 걸친 사내. 그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팽무성은 전신을 떨었다.
팽무성은 본능적으로 사내가 지닌 격이 완전히 다른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십니까.”
“내 선명(仙名)은 팔도무선(八道武仙). 생전에는 무신이라는 별호로 불렸지.”
“무신?”
팽무성은 무천궁을 개파한 무신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삼백 년 전의 인물이 느닷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다니.
“설마 이곳이 저승입니까.”
굳은 얼굴로 묻는 팽무성을 보며 팔도무선은 짧은 웃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 리가,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점이라고 해두지. 자네를 한번 보고 싶어서 말이야. 조금 힘 좀 썼네.”
팔도무선은 팽무성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환생하며 쉼 없이 달려온 자네의 길도 서서히 끝이 보이는군. 기분이 어떠한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환생의 비밀을 팔도무선이 알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팽무성은 잠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저의 환생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자네의 환생은 우연이 아니야. 흔하지는 않지만, 신선 중에도 생전에 회귀나 환생을 겪은 이들이 몇몇 있지. 제법 드문 시련을 겪는 자들이야.”
“시련?”
“하늘은 인간에게 각기 이름, 힘, 시련을 부여하지. 이 세 가지와 자네라는 주체가 만나 흔히 말하는 운명이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행보가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인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팔도무선은 단풍나무의 줄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운명이 정해졌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세상도 없지. 방금도 말했지만, 주체는 자네일세. 하늘은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을 던졌고 자네는 지금의 답을 찾아낸 것이지.”
팽무성의 심오해진 얼굴에 팔도무선이 부드럽게 목소리를 흘렸다.
“지금 자네가 찾은 답이 정답인지 고민하지는 말게. 자연에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던가? 무한히 존재하는 답 중 하나가 그저 인간의 눈에 정답으로 보일 뿐.”
이에 팽무성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몇 번을 환생하더라도 제가 내놓은 답은 같을 테니.”
“분명 그러할 테지. 자네와 천마휘는 그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그렇기에 자네들이 이렇게 대적하는 운명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초월의 재목이 동시대에 부딪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말이지.”
“초월의 재목이 무엇입니까.”
“선계, 신선. 나와 같은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이렇게 부르지.”
팔도무선의 말에 팽무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천마휘가 신선이라,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만류귀종이라는 것입니까.”
“훗, 정답은 없다고 했지. 선악도 그저 인간의 기준일뿐, 굳이 분류하자면 자네는 양, 천마휘는 음으로 봐야 하겠지. 그저 음이고 그저 양인 거야.”
팔도무선은 이 새하얀 세계가 단풍나무를 중심으로 점점 좁아지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별로 없군, 아직 자네는 해야 할 일이 남지 않았나.”
팽무성은 천마휘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맞습니다.”
“지금의 느낌을 잘 기억하게,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으니, 자연경에 오르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터. 지금처럼 계속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기를 바라네. 그렇다면 자네가 걷는 길은 선도(仙道)로 이어지겠지.”
팔도무선은 팽무성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먼 훗날, 이 단풍나무 아래에서 자네가 우리와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네. 후배.”
마지막 말을 끝으로 팔도무선은 팽무성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쳤다.
그러자 팽무성은 그대로 뒤로 쓰러져 끝없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서서히 팽무성은 눈이 감기며 의식이 멀어졌다.
* * *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번쩍 눈을 뜬 팽무성은 몸 위로 뒤덮인 바위들을 치워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광경은 사방에 널려져 있는 바위무더기와 아직도 걷히지 않은 짙은 먼지구름.
팽무성은 낙호곡에 다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냥 꿈이 아닌 듯 팔도무선과의 대화와 어깨를 어루만진 그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천마휘!”
하나 팽무성은 이를 잠시 마음속에 접어두고 오로지 천마휘를 찾는 것에 집중했다.
기감을 퍼트리며 천마휘의 기척을 찾던 팽무성의 호안이 어느 한쪽을 향했다.
콰앙
장력에 솟구치는 바위 사이로 천마휘가 검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팽무성!”
도검은 물론이고 검기도 어느 정도 막아낸다는 교주의 신물인 구룡암포는 곳곳이 찢겨 넝마가 되어있었다.
팽무성은 천마휘를 쳐다보며 곧장 걸음을 옮겼고 이는 천마휘도 마찬가지였다.
일곱 보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한 두 사내. 두 사내의 부상은 일견 보기에도 당장 쓰러져 죽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전신에 흐르는 피와 상처가 무색하게 팽무성과 천마휘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천마휘는 문득 주위에 무너진 낙호곡의 전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낙호곡, 호랑이가 떨어지는 협곡이라. 너에게 어울리는 묫자리가 아니냐.”
“과연 누가 떨어지게 될까.”
팽무성의 물음에 천마휘는 갑작스레 장력을 쏟아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이미 예상했는지 팽무성은 곧바로 적아도를 횡으로 그어냈다.
팽무성과 천마휘의 단전은 텅텅 비어버린 상태.
주변의 자연지기를 받아들인다 한들 심각한 중상을 입은 몸으로 빠르게 내공을 회복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이에 두 사내는 티끌과 같은 내공을 유지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공은 무공을 펼치기 위한 최소한의 요소일 뿐, 팽무성과 천마휘는 오로지 순수한 초식으로 겨루어내고 있었다.
아주 최소한의 내공이 실렸지만 팽무성과 천마휘의 경지가 높아 육체의 힘으로 펼쳐내는 무공만으로도 주변의 대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팽무성은 천마휘의 좌장을 걷어내고 허리를 길게 베어냈다.
천마휘가 퇴보를 밟으며 피해냈지만, 허공을 갈랐던 적아도는 다시 반원을 그리며 어깨를 베어내려 했다.
“큭.”
간신히 어깨를 비틀어 피해낸 천마휘는 좌권을 있는 힘껏 내질렀다.
그러자 왼쪽 옆구리에 베인 도상에서 한 움큼 피가 쏟아졌다.
촤차창
교환하는 합이 늘어날수록 팽무성의 도는 무초식(無招式)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초식의 경지에 그저 입문했을 뿐이었던 팽무성의 도는 빠르게 오호단문도를 하나씩 놓아주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을 도천이 보았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팽무성의 도를 뚫어지라 쳐다봤을 것이 분명했다.
촤악
종으로 베어지던 적아도가 느닷없이 사선을 그리며 자유분방하게 움직였다.
이에 천마신장으로 대응하던 천마휘는 반응이 늦어 허벅지를 또다시 베여야만 했다.
천마휘는 솟구치는 자신의 붉은 핏물을 보며 주먹을 내질렀다.
찌잉
적아도와 주먹의 충돌에 옅은 기파가 쏟아졌고 이를 몸으로 감당해낸 팽무성과 천마휘의 상처에 핏물이 솟구쳤다.
입으로 검은 피를 뱉어내며 계속 앞으로 접근하는 팽무성을 보며 처음으로 천마휘가 뒤로 물러섰다.
“하!”
팽무성의 기세에 밀려 자신이 물러났음을 깨달은 천마휘는 입꼬리를 귀밑까지 올리며 인간미가 없는 웃음을 내보였다.
그 기괴한 웃음에 팽무성마저 잠시 눈을 찌푸릴 정도였다.
두 팔을 무방비로 늘인 채 팽무성을 쳐다보던 천마휘는 단전에 티끌만큼 남아있는 내공을 모조리 토해냈다.
내공의 힘을 빌어 찰나에 거리를 좁힌 천마휘는 곧장 팽무성의 단전을 향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서걱
하단을 쓸어낸 적아도가 천마휘의 왼팔을 베어냈지만 천마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왼팔은 미끼에 불과했다.
천마휘는 곧바로 오른팔을 팽무성의 목을 향해 뻗어냈다.
지금 상태의 팽무성이라면 탐천마공에 제대로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목만 잡아낸다면 자신의 승리이자 천마지로의 끝을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극한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천마휘의 시야는 좁혀져서 팽무성의 목젖만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그 순간, 목젖만 보이던 천마휘의 눈으로 붉은 번개가 채워졌다. 환희에 찬 천마휘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첫 번째 도격이 천마휘의 오른팔을 갈라냈고 이어서 뻗어지는 도격이 천마휘의 전신을 베어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도격이 천마휘의 전신을 수직으로 베어낼 때, 적아도가 뇌성을 토해냈다.
콰르릉
마지막 팽무성의 도격을 천마휘는 보지 못했다. 인지조차 못 하고 원하지 않던 끝을 맞이하고 말았다.
높이 뻗은 다섯 가닥의 뇌전이 나뭇가지처럼 수없이 갈라지며 검은 하늘을 붉게 밝혔다.
그 주변으로 검붉은 핏물과 구룡암포의 조각들이 비산하며 빗방울처럼 잘게 떨어졌다.
천마휘가 서 있던 자리에는 길게 뻗어지는 다섯 줄기의 번개 모양의 도흔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천마지로의 끝. 잘 봤다. 천마휘.”
하늘 높이 뻗다가 점점 희미해지는 벼락과 땅에 남겨진 도흔 위로 하나둘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팽무성은 묵묵히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지만 왜인지 마지막까지 당당히 서 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까닭이었다.
후두둑
천마휘의 핏방울이 도흔의 근처로 모두 떨어졌다. 이를 팽무성이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다섯 가닥의 도흔은 나뭇가지가 되었고 핏방울은 검붉은 잎사귀가 되어 마치 검은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천마지로의 끝에서나마 생명 하나를 피워냈구나. 천마휘.”
비록 진짜 살아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평생을 남의 생명을 갈취하던 천마휘에게 알맞은 끝맺음이었다.
“너도, 나도 이제야 끝이 났구나.”
두 사람이 피워낸 검은 나무를 한참 바라보던 팽무성은 비틀거리며 등을 돌렸다.
이로써 전생과 그 기억에 얽매여 팽무성으로 살아가는 팽지혁의 삶은 끝이 났다.
검은 나무를 뒤로 한 채 걸음을 옮기던 팽무성은 홀로 중얼거렸다.
“이제 또 시작인가.”
이제 오롯이 팽무성으로서의 삶이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남궁 오라버니!”
검마군을 베어내고 팽무성이 향한 협곡의 안쪽으로 걸어가던 남궁혁은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무각과, 당화련 팽호대가 남궁혁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들의 상태를 살피던 남궁혁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해냈다.”
계인이 박힌 무각의 이마에는 사선으로 교차하여 그어진 두 줄기의 검상이 있었고 허리 중간까지 내려오던 당화련의 긴 머리는 잘려서 단발이 되어있었다.
그 외에도 팽호대는 처음에 비해 그 숫자가 절반도 채 되지 않았고 철호는 한쪽 눈을 피로 물든 옷자락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어려운 혈투를 치렀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다리는 괜찮은 거야?”
무각이 절뚝거리는 다리를 보며 묻자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찔렸을 뿐이지, 걷는 데 지장은 없다. 자, 앞으로 가자.”
낙호곡을 향해 가까워질수록 사패와 팽호대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늘의 먹구름을 뚫어내며 높이 솟아올랐던 검붉은 빛기둥.
무공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웠던 그 빛기둥은 전장의 모든 이들의 눈길을 빼앗았다.
그 빛기둥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굉음이 그쳤고 전장 전체를 뒤덮었던 가공할 기세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협곡마저 무너진 상황이니 팽무성의 안위가 더욱 걱정되었다.
콰르릉
안쪽에서 다시 커다란 뇌성이 터지며 다섯 가닥의 커다란 벼락과 검붉은 빗줄기가 솟구치는 장면이 사패와 팽호대의 눈에 들어왔다.
“하하!”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고 다른 이들도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어서 가자!”
“예!”
사패와 팽호대는 안쪽으로 향하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고 마침내 무너진 바위 더미를 뚫고 빠져나오는 팽무성과 조우할 수 있었다.
팽무성과 사패, 팽호대는 말없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런저런 말은 필요가 없었다. 그저 생사를 확인했으면 충분했다.
“끝을 보자.”
한마디를 뱉어낸 팽무성은 사람들을 지나쳐 평야의 전장으로 향해 걸었고 그 뒤를 조용히 사패와 팽호대가 따랐다.
천하제일(天下第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