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이 태어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였다. 오늘도 균이 진이의 말이 되어 허리가 휘도록 놀아주고 있는데 하인 삼식이가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다.
"도련님! 도련님!"
균은 속으로 무척이나 반기면서도 겉으로는 위엄을 차리며 말했다.
"무슨 일데 그렇게 호들갑이냐?"
"밖에 이상한 사람아 와서 도련님을 찾습니다요."
"이상한 사람이라니? 무슨 코가 없다든지 귀가 하나라든지 말이냐?"
"그런 건 다 있는데 머리에 가마솥을……."
즉시 균은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예상대로 밖에 있는 사람은 토정 이지함 이였다. 최근 들어 수산이라는 호가 생겼다는 소문도 들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중요한 건 이지함의 별칭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이다.
"오랫만에 보는구려. 공자."
"저도 오랜만입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오. 그게 아니라 오늘 밤에 놀라지 말라고 전하러 왔소."
"네?"
"오늘 밤이 되면 알게 될 것이오. 그럼 이만."
나이가 40이 넘은 이지함이건만 그 사라지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서경덕이 죽은 후 전국을 일주한 체력에 최근 누구 때문에 수영을 하게 되어서 그 걸음새는 나이 스무 살의 장정못지 않게 빨랐다. "누가 온다고? 올 사람 없는데..."
올 사람이 없기는 없다. 이초의 친가는 사실상 서로 경쟁관계에 윤원형이라는 승냥이가 불을 키고 버티고 있어 소통이 원활하지도 않다. 외가도 몸을 사려 막내 외숙인 정인기만 올 뿐이다. 다른 외숙도 있지만 태어나서 7년간 얼굴도 못 보았다. 그 말고는 방금 전 다녀간 이지함이 지인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 밤에는 이상할 정도로 달이 흐렸다. 그것도 아직 상현달 이였다. 창을 열고 달을 보던 균은 문득 달이 이상하면 변고가 생긴다는 말이 생각났다. 집의 변고라면 아버지 이초의 병세다. 즉시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그런데 마당 한 가운데 어떤 괴 인영이 있는게 아닌가?
"누.. 누구냐?"
균은 두려웠다. 혹시 저승사자라면... 낮에 왔던 이지함의 말이 생각났기 시작했다. 놀라지 말라. 그렇다면 위협적인 존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괴 인영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 균이냐?"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
"허허허, 제법 용감하군. 쥐가 용을 낳은 것이야.... 토정 그자에게 못 들었느냐?"
"못 들었소. 누구인지는 모르나 남의 집에 왔으니 그 용무와 이름을 밝히시오. "
"그래. 나는 남사고라한다. 아마도 너라면 알 꺼다."
"남사고!"
남사고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기인 중에 하나로 많은 예언을 한 인물이다. 임진왜란과 붕당의 발생, 정유재란, 문정왕후의 죽음을 예언했고 특히 전체적인 천기를 읽는데 밝아 후대에 나오는 예언서는 대부분 남사고와 관련이 있다. 일부에서는 남사고의 예언을 빌려 종말론적인 종교를 창시한 적도 있고 정감록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 그만큼 그의 예지력은 후대에까지 정평이 날만큼 유명했다.
"껄껄껄, 너라면 알줄 알았다. 네가 여기 온 것은 바로 선물을 주기 위해서다. "
"선물이라뇨?"
"껄껄껄, 나이를 서른이나 먹어서 그런지 의심이 많구나. 자 이 보따리다."
"그걸 어떻게? 그리고 이건 무엇인지?"
"너한테 꼭 필요한 것이다. 그 것을 준비하느라 나는 수명을 많이 잃었단다."
"수명을 잃어요? 그런데 그런 짓은 하는거죠? 아야!"
"당연히, 천기를 누설하니까 수명이 깎기는 거지. 너 때문에 나는 오늘 저승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다."
"호~ 머리에 혹났나?. 왜 그런 짓을?"
"일단 펴보기나 해라."
균이 보따리를 풀자 서적 몇십 권이 나왔다. 그리고 그 서책의 제목에는...
"백과사전!"
"그래 이놈아. 바로 너에게 꼭 필요한 백과사전이라던 거다. 이걸 읽고 쓴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한지 아느냐?"
곁으로는 일반 한글서적이였지만 그 안의 내용은 전생의 백과사전이다. 균이 아무리 환생체이지만 그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자세하지는 않더라도 백과사전이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것이다. 개념이 잡힌 것과 안 잡힌 것은 천지 차이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과사전은 최고의 보물이다. 그것도 한 보따리 가득 담긴 몇 십 권의 서책에 살짝 본 글자의 크기도 적당하여 내용은 충실한 듯 했다.
균은 무척이나 기뻤다. 감도 잡기 힘든 상태에 등불 아니 헤드라이트다. 균은 너무 좋아서 다시 남사고를 보았다. 그리고 그 침울한 얼굴에 그가 오늘 죽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음에 드느냐?"
"저에게는 좋으나 생명을 낭비하신 것은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껄껄껄. 그 정도는 감수할 일이였다. 이제 너에게 달렸으리라."
"어르신……."
"아차! 벌써 시간이...., 너는 당장 방으로 들어가자는 척해라! 어서!"
잠시 미안한 마음에 멍하게 있던 균은 즉시 책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남사고와 균의 앞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남사고, 시간이 다 되었네. 그만 가지."
"물론이네. 염라대왕. 이 정도까지 시간을 허락한 그대에게 감사할 따름이야."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군가? 아무래도 생의 시간이 많이 남은 듯한데……. "
"그냥 내가 아끼는 아이일세. 어서 가지."
"그런데 저 아이는 아무리 봐도 이성계의 자손 같다는 말이야."
"그거야 이성계가 뿌린 자손이 어디 한 둘인가? 저 아이도 조금 이씨의 피를 받았겠지."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균은 잠시 갈등했다. 아무래도 저 염라대왕은 이성계와 원수지간인 듯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덤으로 끌려갈 기세였다. 하지만 전생에서 신념 즉 진실은 가장 최선이라는 신념대로 밀고 가기로 했다. 실제로도 그래서 손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뒷탈이 크다.
"저의 이름은 이균이며 전주이씨입니다. 태조대왕의 후손인 종친 덕흥군의 삼남입니다."
"그래? 네가 역적 이성계의 후손이라..., 잘 됐구나."
"참게나. 저 아이가 이성계의 자손이나 이 나라 이 백성에게 큰일을 할 아이네."
"아직도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이성계의 자손이라면 모두 다 죽여야 하네. 거기다 자네가 더 쓴 수명도 채워야하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
"하지만 내 수명을 다 쓴 이유도 저 아이를 위해서라네. 저 아이가 죽으면 이 나라 백성들은 다 왜구에게 죽고 만단 말일세. "
남사고는 간절하게 염라대왕에게 빌었다. 얼마나 애절한지 목석같던 염라대왕도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염라대왕은 잠시 이 균을 보았다. 균은 염라대왕의 위세에 눌린 듯 하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당당히 있으려고 했다.
"자네도 알지만 왜구들이 30년 후에 엄청나게 쳐들어오네. 자네도 그 왜구들을 막는다고 많은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그 고생이 다 헛고생이 되네. 게다가 자네가 관장하는 명부가 소멸될 수도 있고 이 땅의 억조창생이 걸린 문제네."
"음……. 아이야. 너는 왜 나에게 사실을 말했느냐? 거짓을 말했다면 이처럼 억울하게 죽지는 않을 텐데……."
"진실은 무엇보다도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호~ 그렇듯하군. 후회가 되지는 않느냐? "
"후회가 되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 참 당찬 녀석이로다."
염라대왕의 말투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남사고는 옆에서 계속해서 설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사고의 말을 듣던 염라대왕은 다시 균에게 물었다.
"네가 만일 살아서 왕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
"백성들의 왕이 되겠습니다."
"무슨 뜻이지?"
"지금까지 조선의 왕은 양반들의 왕입니다. 저는 진정한 조선백성들의 왕이 되겠습니다."
균은 링컨이 했던 말을 하려다가 아무래도 염라대왕이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요약해서 말했다. 괜히 심기를 잘못 건들면 바로 가는 것이다. 이번 생도 아직 총각인데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 말을 들은 염라대왕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너는 이성계의 자손이 아니구나. 이성계의 자손이라면 그런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않을 꺼다.
이제 이성계의 자손이 왕이 되지 못하니 내 필생의 소원을 성취했도다. "
염라대왕은 웃으며 남사고를 돌아다보고 말했다.
"과연 그대가 택한 인물이야. 용하게도 괜찮은 인물을 골랐군. "
"암 내가 누군가? 조선 최고의 역술가로 꼽히는 남사고 아닌가?"
웃고 있는 남사고를 뒤로한 채 염라대왕은 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균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도저히 균의 입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였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 왔다.
"너의 그 마음을 잊지 말고 왕이 되거라. 네가 휼륭한 왕이 되어 나중에 내 자리를 물려받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마. 내 너를 놀라게 한 것과 앞으로 이성계의 후손이 왕이 안 되는 것을 생각해서 너의 이마에 염왕인을 주었다. 강력한 요괴라도 너를 해하지 못하고 잡귀정도는 아예 소멸하며 사람이라면 너의 기운에 굴복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해왔던 이성계의 핏줄을 없애는 일은 관두마. 어차피 이성계의 왕조는 사실상 끝난 거니까. "
"허허허, 생색을 내기는 안 그래도 옥황상제께서 계속 수명도 안 다한 조선 왕족들을 데리고 오면 시말서 쓰라고 하지 않았는가? "
"그래도 몇 명 안 데려왔네. 어디보자 이향, 이홍위, 이장, 이황, 이호 또 누구더라."
'맙소사 인종의 이름이 이호라는데 설마 조선왕중 단명한 사람은 다 잡아갔다는 거야.'
균은 진짜로 두 번째 생마저 마감할 뻔한 것에 놀랐다. 염라대왕의 기운이 강하지는 않지만 아까보다 더욱 더 겁이 났다. 이상할 정도로 조선의 왕들 특히 장자들은 단명을 했다. 앞서 언급된 문종 이향, 단종 이홍위, 덕종 이장, 예종 이황, 인종 이호등 무척이나 단명한 왕들이다.
문종은 단명은 아니지만 부실하기로 유명했다. 시호가 왜 문이겠는가? 약해빠진 선비왕이였고 원래는 효자라서 효종이라고 지을라고 했는데 이향하면 책이라서 문종이 되버렸다. 오죽하면 마누라 둘이 외로움이 지쳐 이상한 짓하다가 쫓겨난 적도 있을 정도로 부실해 단종을 낳은 것이 기적이라고 한다.
염라대왕의 말에 소름이 끼치던 균은 다른 말을 해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와서 그런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 균의 귓가로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야 내가 준 책, 열심히 보거라."
"하하하 이제 나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
다음 날 아침 균은 자신의 밤에 쌓여있는 백여 권의 책들을 볼 수 있었다. 균은 어제의 일이 생각났지만 좋게 끝난데다가 선물을 받은 기쁨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백과사전을 보았는데……. 그만 책을 떨어뜨렸다.
"나보다 더 악필은 처음 봤군. 이게 한글이야? 그림이야?"
결국 균은 백과사전 해독서를 만들어야 했다. 아무래도 남사고는 글자를 못 써서 유학대신 역학을 배운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그 뒤에 고려의 마지막 명장 최영의 홍묘에 풀이 난다는 소문이 한성부를 떠돌았다. 아무래도 균은 단명하지는 않을 듯 했다. 역사도 그렇지만 최영이 준 염왕인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균이 백과사전을 다시 정리하며 알찬 시간을 보낸 지도 거의 8개월이나 되어 서기1559년 명종14년이 되었다.
덕흥군 이초의 병세는 더욱더 깊어졌다. 결국에는 사경을 해매는 지경이었다. 급보를 받고 외숙부 정인기가 달려왔다. 이미 이초는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고 정씨부인과 사남매도 이초의 옆에서 울먹거리고 있었다.
"매형!"
정인기가 울먹이며 말하자 이초는 자녀들을 부탁했다.
"자네도 알지만 이제 큰 아이 정이 11살이네. 셋째 균이 빼어나다고 해야 경우 7살이고 큰아이가 다 자랄때까지만이라도 자네가 도와주게."
"매형..."
"너희들도 여기 외숙부와 어머니 말씀 잘들어야한다."
"아버님..."
"부인, 그간 고생만 시켜서 미안한데 이제 먼저 가는구려. 정말 미안 하외다. 내 꼭 내세에서 부인의 노고를 갚겠소."
"서방님..."
"정집사도 계속 수고해주게나."
"나으리!~"
"특히 균이 너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 하!~ 하!~."
이초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덕흥군(德興君)이초는 조선 11대 국왕 중종의 7남으로 창빈 안씨의 소생이다. 중종25년 서기 1530년에 태어나 1538년에 덕흥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 사가로 나와야 빈곤하게 살아했다. 1542년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로 세명을 두었는데 하원군(河原君), 하릉군(河陵君), 하성군(河城君)이다. 이중 하성군이 바로 이균이다. 명종 14년인 1559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부인 정씨는 홀로 자녀들을 길러야했다.
이제까지는 거의 모든 게 역사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아버지 이초의 죽음으로 가장 활달하고 뛰어난 이균이 사실상의 가장으로 집안을 이끌게 된다. 이에 따라 균과 균을 둘러싼 앞으로의 역사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언제나 균의 옆에 있는 백과사전을 틀리게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