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으다.
다음날 균은 하인을 보내 서찰로 어제의 일을 정인기에게 알리고 며칠간 내려갈 준비하라고 알려주었다. 지금쯤은 숙부 정인기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못하는 얼굴로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했다. 뇌물 없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좋지만 참봉은 종9품의 최하급 관직이다. 정인기같은 유서 있는 집안의 양반이 하기에는 무척이나 낮은 자리다. 하지만 왕명을 어길 수도 없고 더욱이 국왕의 관심을 받는다면 벼슬길에는 더 없이 유리하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다시 선전관이 왔다.
"덕흥군의 아들 이정을 하원군(河原君)에, 이인를 하릉군(河陵君)에, 이균을 하성군(河城君)에 각각 봉하노라. 원래라면 조금 더 형제들이 나이를 먹은 후에 봉하는 것이나 이미 덕흥군이 죽은지라 종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빨리 봉하니 형제들은 부지런히 갈고 닦아 나라에 충성을 다하라."
어제 명종이 말한 것이 바로 군에 봉해지는 일이였다. 군은 서자출신의 왕자에게 주어지며 삼대까지 종친으로 인정해 군으로 봉한다. 종2품의 관직과 동일한 녹봉을 받으나 조선시대 녹봉이라는 것이 미미하여 살림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단지 명목상이지만 당상관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과 가끔씩 왕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가 다이다.
왕의 적자(중전이 낳은 아이)는 대군, 서자(후궁이 낳은 아이)는 군이라 하며 각기 4대와 3대까지종친으로 대우한다. 공, 후, 백, 자, 남으로 따진다면 대군은 대공, 덕흥군은 공작 ,하성군은 후작정도의 위치이다. 그러나 실권은 없다. 참고로 고려 때까지는 공, 후, 백이란 작위가 있었는데 이방원이 왕권강화차원에서 바꾼다.
군으로 책봉된 것은 균에게는 무척 좋은 일이다. 지방수령이나 소금거상들에게 있어 군의 칭호는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협상과 관계를 제법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것이 군이란 칭호다. 또한 가뜩이나 부족한 초기자금 때문에 자금을 융통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 자체가 거대한 담보나 다름없다.
원칙적으로 종친의 부채는 종친부에서 다 감당한다. 물론 그 대상자는 팽형을 당한 것과 같다. 살아있지만 그 누구라도 그를 죽은 자로 취급한다. 철저한 왕따다. 당연히 부채를 지는 종친도 거의 없다. 굶어 죽어도 종친이라는 자존심 때문이다. 균의 아버지 덕흥군도 그랬다.
그리고 며칠 후 …….
"숙부님, 출사하신 것 경하 드립니다. "
"설마 이 숙부를 골탕 먹이려고 주상전하께 말씀드린 거냐? "
오늘따라 어쩐지 정인기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외할아버지 정세호에게 한 소리들은 듯 하다. 자기 같아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장관아들이 동사무소 서기하는 격이니 좋아하면 이상했다. 균은 살살 달랬다.
"어찌 제가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다 주상전하께옵서 하신 일이옵니다. 못 믿겠으면 며칠 전에 저희 집에 왔던 선전관에게 물어보십시오."
"음, 그래 알았다."
사실을 말했는데도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균은 더 달래야 겠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조력자이자 사실상 하나뿐인 친척이다. 균의 최초 심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최대한 이용하되 그 은공은 배로 갚는 것이 균의 생각이었다.
"숙부님, 일단은 쌀 십여 섬을 받는 참봉이라는 낮은 자리이지만 어차피 지금 대과에 나가도 급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 소질과 같이 계시다보면 주상전하의 눈에 들어 더 높은 벼슬을 받으실껍니다. 주상전하께서는 매년 한번씩은 대궐에 입궐하라 하셨습니다. "
"험험~, 뭐 그렇다면야. 아참 당상관들은 한 번 만나볼 것이냐?"
정인기는 국왕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말에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왕조국가에서 아무리 세도가가 날뛰더라도 그건 왕의 권력에서 나온 것이다. 종9품이라도 왕의 관심을 받는 종친의 외숙이라면 지방 수령방백정도는 우습게 볼 수 있다.
"만나볼 필요가 있는지는 몇 안 됩니다. 그리고 그건 숙부님이 만나보셔야 하구요."
"그래도 관직에 있고 지방에 땅도 많이 가진 자들이다."
"문제는 그들은 저를 알기를 숙부의 허수아비로 알고 있습니다. 외조부께서 아시는 지인이 아닌 이상은 문전박대를 하기 일쑤고 설령 지인들이라도 명목상의 종친인 저를 믿지는 못하니까요. "
"그럼? 도대체 누구를?"
"역관들입니다."
"뭐? 역관들. 아니 왜 그런 중인들을 만나야 되느냐?"
"돈이 많으니까요."
당시 조선에서 돈 많은 자는 딱 세부류다. 소금상인, 농장주인(세도가들이다.), 그리고 역관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크게 약화되지만 조선중기까지 역관은 정치자금의 주요공급원중 하나였고 임진왜란후 상당수가 돈으로 양반이 됬다.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런 돈밖에 모르는 자들의 더러운 돈을……. "
"아닙니다. 주상전하께서 소금가마 100개를 세금 없이 경영하도록 해주셨습니다."
"뭐야? 그 정도면 소금장사 할 필요도 없잖아."
놀라서 그런지 정인기의 원래 말투가 나왔다. 소금가마 100개면 그 이익이 작게 잡아도 쌀 1천석이다. 일 할 정도의 세금을 뗀다고 해도 그 정도이다. 거의 천석꾼을 능가하는 정도다. 그 정도라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
'당장은 잘 먹고 잘살지만 나중에 가서 고생합니다.'
균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정인기에게 말했다.
"물론 많은 돈이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윤원형같은 세도가에게 당하고 말겁니다. 숙부도 잘 아시겠지만 권력은 재력입니다. 만일 제가 조정에 100만 냥쯤 바쳐보십시오. 대비 윤씨라도 저를 함부로 하지 못하며 윤원형도 매일 안부를 물어올것입니다. 저는 종친이라 벼슬을 못하니 재력이라도 충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맞구나. 그런데 역관들은 왜 만나는 거냐?"
"제 염전은 다른 상인보다는 적지만 막대한 시설투자비가 들어가게 됩니다. 일단 역관들에게 권해서 그 반응만 살펴보십시오. 일단 돈은 당장은 들어가지도 않고 급하면 소금가마를 처분하면 됩니다. 하지만 중국 되놈상인의 더러운 돈이라도 돈은 돈입니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자를 낮게 잡는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익이 되는 길입니다. "
전생 때부터 돈이라면 눈에 불을 키고 덤비던 균답게 균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하나 그 눈을 보는 정인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매형이 살아 있거나 일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쯤 제 어미 품에서 재롱을 부릴 텐데…….'
"알았다. 내 한번 돌아보마."
"감사합니다. 숙부님. 만나실 때 중인이라고 결코 경시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양반의 체면도 구겨서는 안 됩니다. 되면 좋고 안 되도 되는 일입니다. 중요한건 그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자는 연 일할까지 재량대로 하시면 됩니다."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 정인기는 수십 군데나 되는 역관들의 집을 돌았지만 신통치 못했다. 대부분의 역관들이 윤원형등의 세도가에 뇌물을 바친지라 힘없는 종친의 친척정도는 우습게보았던 탓이다. 기껏해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뜻인 듯 쌀 몇 섬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런지 정인기의 얼굴은 울긋불긋했다. 사람이 좋은 편인 정인기가 화내는 것을 균은 오늘 처음 보았다.
"숙부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
"중인 놈들이 그것도 되놈들 돈이나 만지는 것들이……. 싹씩씩~"
정인기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 듯했다. 균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균은 돈을 못 빌리기를 원했다. 다행이도 돈을 못 빌렸으니 균이 작정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생한 정인기에 대한 보답은 더욱 커지겠지만…….
"숙부님을 능멸한 자들은 제가 꼭 그 대가를 받아 드리겠습니다. 이 하성군 이균의 이름을 걸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놈들은 하급관리인데 왜 돈이 많은 거냐?"
"무역 때문입니다. 사신단에 따라가서 명에 없는 것을 팔고 조선에 없는 것을 사는 겁니다. 저번에 보신 중국의 소금도 그들이 들여오는 거고 비단, 서책, 여자들 노리개등 돈 되는 것은 다 사고 팝니다. 숨어있는 만석꾼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
"그것은 불법이 아니냐? 나라에서 무역을 금하는데……."
"우리가 명에 조공을 바치는 것도 일종의 무역입니다. 명의 황제가 하사품을 보내주니까요. 거기다 역관들은 별도의 보수가 없어서 나라에서 묵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사신단보다 역관들의 수레가 더 많을 정도입니다. 다 윤원형에게 뇌물을 바치고 하는 일입니다."
"여기나 저기나 다 윤원형이군."
그 날 저녁 균은 식구들에게 하인 삼식이만 대동하고 명으로 간다고 말했다. 물론 자세히는 말하지 않고 유학 간다고 말했을 뿐이다. 어머니 정씨는 알고 있었지만 정, 인, 진 남매는 크게 놀라서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동생 진이가 울면서 말했다.
"오빠 가지마. 더 이상 말 타기 안 시킬게. 어머니 오빠 좀 말려줘요. 네?"
하지만 정이나 인는 거의 당연하게 느끼는 듯했다. 오히려 남을 어머니 정씨를 걱정했다.
"어머니, 균이는 잘하고도 남을 아이입니다. 너무 심려치는 마십시오."
"형 말이 맞아요. 싸움도 얼마나 잘한다고요. 저랑 형이 덤벼도 못이기는 아이를 단번에 코피를..."
"인아~ "
"아~ 그건 비밀이랬지."
아직 이초가 죽기 전 서당에서 두 형제와 어떤 아이가 싸워 두 형제가 터진 적이 있었다. 노발대발해서 그 아이를 찾아간 균은 전생때 배운 유도로 몇 번 땅바닥에 이쁘게 널브러지게 했다. 그 아이의 부모가 찾아오자 이미 정인기와 그 하인들까지 부른 균은 십여 명의 사람들로 다구리를 치고 종친능멸죄로 포도청에 넘겨버렸다.
그 사람들은 윤원형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뻐기고 다녔고 그 자식도 서당 내에서 그러고 다녔지만 아무도 감히 덤빌 수 없었다. 하지만 균은 윤원형이 그런 피라미들을 알고 있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처리했다. 설사 안다고 해도 종친을 폭행한 죄는 윤원형으로써도 만만치 않은 죄로 그의 심복이 아니면 그런 위험을 택할 가능성이 없었다.
균의 예상대로 중인이던 그들은 윤원형과는 별 관련도 없었고 균과 정인기의 집요한 공작으로 결국에는 노비가 되어 함경도로 쫓겨났다. 별 힘은 없어도 피해자 정과 인는 현 주상의 조카들인 것이다. 그 뒤로는 둘 다 균에게 완전히 접어주는 상태였다.
이미 정씨부인도 내락한데다가 두 형제가 편을 드니 균의 유학(?)은 완전히 확정되었다. 단지 놀이 상대가 없어지는 진이만 결사반대하는 것이다.
역관 민세현은 중견 급에 속하는 역관으로 수단이 좋아 고위역관들 못지않은 치부를 한 거부였다. 만석꾼 부럽지 않은 재산을 가져 중인이지만 웬만한 양반들도 홀대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동생을 무반에게 시집보낼 만큼 대우를 받고 있던 것이다.
그 무반도 선전관으로 촉망받는 무장이니 웬만한 양반집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웬 양반이 종친의 부탁이라며 돈을 빌려달라고 정중히 부탁할 정도다. 물론 코웃음으로 내보냈지만……. 그런데 그 선전관으로 있는 매제가 저녁에 왔다.
"이보게 처남, 내 이런 부탁하기는 힘들지만 돈 좀 마련해주게."
갑자기 밤에 찾아와서 돈 빌려 달라고 하다니 민세현은 '아닌 밤중에 홍두께'라는 속담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매제인 선전관 심성태는 눈치가 빨라 승전선전관으로 임명된지 수년째인 명종의 심복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국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이다.
심성태는 예의도 잘 알고 충성심도 강해 몇 년째 선전관으로 명종의 시위를 맞고 있는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런데 그런 자가 지금 이상하게 서두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심성태는 문반이라 할 만큼 침착하고 사려 깊었다.
"형님, 무슨 말씀이신지? 돈이라면 드리겠지만 무슨 일입니까?"
"내 딸 순분이를 시집보내기로 했네. 그런데 상대가 돈이 필요한 터라 이번에 지참금조로 많은 돈을 주어야 성사가 될 듯해서."
"넥? 순분이 이제 10살 코흘리개 아닙니까?"
"그렇네만은 상대도 어리니 큰 상관은 없을 꺼야. 거기다 상당히 촉망되는 사윗감이지."
"무슨 장원급제라도 할 인재입니까? 너무 서두시는게 영~"
"장원급제가 문제가 아닐세. 까딱하면 엄청난 세도가가 될지도 모르네."
"아니 서원군 윤원형과 대비마마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누가 감히 세도를 부립니까? 심통원이나 이량이라해도 아직 한참은 멀었는데요."
"하성군 이균일세. 주상전하가 소금가마 100가마를 무상으로 허락하고 그 외숙인 정인기라는 자에게는 낮지만 벼슬까지 주더니 며칠 전에는 군으로 봉하셨네. 그리고 하성군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 "
"예? 그래도 종친이라서 아무런 힘도 없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궁궐내 사정을 몰라서 그렇네. 세자저하께서 일년에 반은 누워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나?"
"네 대충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은 그래도 세자께서는 각종 보약과……."
"거짓이네."
"네? 그럼 무척이나 건강하시다는……."
"아니, 일 년의 대부분을 누워계시네. 오죽하면 빨리 혼사를 서둘러야 한다는 소리도 있고 그래서 주상께서도 요즘 중궁전이나 후궁전 출입도 자주 하시네.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럼 세자저하가 보위를 잇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 그럼 하성군이?"
"그럼, 상당히 유력한 왕위계승자가 되는 거지. 주상전하의 인척 중에서 하성군만큼 건강하고 효성 깊은 자도 없네. 현 세자저하가 안되면 다음 보위는 하성군이 이을 꺼라 생각하네. 거기다 안 되더라도 주상전하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네. 매년 한번은 꼭 입궐해 얼굴을 보이라고 하셨으니 못 되어도 상당한 권력을 쥐게 될꺼 같아."
"우리 순분이가 중전마마가 될지도 모른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럼 당장 우리 순분이 지참금을 마련하겠습니다. 집이랑, 땅을 다 처리하면 한 10만 냥은 나올 겁니다. "
"그럼 부탁하네. 안 그래도 곧 하성군이 전라도에서 소금가마를 빌려주는 계약을 하고 일부는 직접 경영한다고 하더군. 요즘 제 숙부 정인기와 같이 있다고 하니 같이 가서 만나……. 자네 왜 그러나?"
민세현은 정인기라는 말에 땀을 흘렸다. 며칠 전 코웃음으로 내보낸 자가 정인기였다. 순간 얼마 전에 용을 발로 차서 쫒아버린 꿈이 생각났다. 재물 복을 놓쳤다고 소금 뿌리는데 찾아온 게 정인기였다. 기분이 나빠서 그냥 상대도 하지 않고 쫒아낸후 소금을 뿌렸건만…….
민세현은 심성태의 계속된 물음에도 말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