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으다.
다음날 균과 삼식이는 정인기의 집으로 찾아갔다. 일단은 정인기와 합류한 후 호조(요즘의 재정경제부)에서 여러가지 문서와 증서를 받아야 했다. 소금가마 100개를 세금 없이 허락하는 문서와 정인기의 참봉 임명서가 그 것이다. 이미 정인기의 재산도 호조에서 발행하는 증서로 바꾸었다. 쌀로서 운반했다가는 운반비가 더 나오고 은으로 가졌다가는 딱 산적 만나기 좋다.
남행을 하는 일행은 균과 정인기 그리고 두 하인과 말 세필 이였다. 무척이나 단촐한 일행이다. 어차피 서울에 남는 하인도 적은데다가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 갈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두 다 전라도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드디어 균은 바라고 바라던 도성 밖으로 나왔다. 이직 임진왜란 전이라서 그런지 성 주변에는 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누더기 같은 논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요즘처럼 네모반듯하기는 커녕 정말 개성적 이였다. 그나마 이건 도성 근처라 그래도 크고 반듯하다고 들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당연히 양반들은 그 줄에 상관없이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고 새치기 하다가 몰매를 맞는 사람이 보였다. 포졸들이 달려갔는데 아무래도 그 달리기 속도가 느린 것이 그 사람은 다시는 새치기 못 할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남쪽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용산 나루터와 주막들로 구성된 마을이 있었다. 한성부의 4대문은 해가 지면 바로 닫기 때문에 성문근처와 나루터근처인 용신에는 대부분이 여행객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이 제법 많았고 이는 다른 세 개의 문 근처도 그 규모는 다르나 마찬가지였다.
일행은 빠른 속도로 숭례문을 나서 마포나루터로 향했다. 거기서 돌아가는 조운선을 얻어 타고 전라도로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균의 계획은 이상하게 조금씩 빗나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토정 이지함의 등장이다.
"아니 하성군 아니십니까?"
"토정선생 아니십니까? 그간 별고는 없으셨는지요."
"뭐 저야 수산이라는 별칭을 귀가 간지러워 얻은 일밖에 없습니다만……. 부친을 잃으신 일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별말씀을……. 이쪽은 제 외숙부이신 정인기 참봉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인기라 하옵니다. 명성이 높은 토정선생을 뵙게되서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다 허명이오. 그건 그렇고 하성군 혹시 남쪽으로 배를 타고자 하십니까? "
"예 별일이 없다면 조운선을 얻어 탈까 하옵니다. "
"하성군께서는 말을 타고 육로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해와 달에 고리가 끼는 것이 뱃길에 문제가 있을 듯하외다."
"그렇다면 당연히 육로로 가야겠군요."
"역시 하성군도 아시는 군요. 퍽이나 다행이외다. 그럼 이만……."
이지함은 다시 몸를 돌려 멀어져 갔다. 역시나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데 자신이 후대의 인물이 아니라면 유명한 무장으로 보일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해무리, 달무리라 나는 보지 못하였는데……. 아무튼 토정선생의 말을 들어 나쁠 건 없다. 육로로 가자. 어차피 해로는 심심할 테니 오히려 잘 됐다. 그런데 나중에 토정선생은 보병대 교관으로 등용해야겠다. 어떻게 된 것이 말 탄 우리들보다 빠르지?'
아무튼 토정의 말을 들은 균은 즉시 계획을 수정했다. 마포에서 영등포로 가는 나룻배를 타고 거기서 육로를 통해 남행을 재촉했다.
조선시대의 여행은 상당히 힘들다. 일제침략기 이전에 조선에는 대로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외적의 침공을 막는다는 것이었는데 대신 조선군의 기동과 소식을 전달하고 명령을 내리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나마 균이 가는 길은 평지라서 상당한 크기의 길이 있으나 다른 지역은 오솔길 수준의 소로가 태반 이였다.
거기다 돈의 사용이 없었으므로 말 한 필에다가는 삼베을 실어 그 삼베로 주막에서 숙박비를 지불해야했다. 지폐를 사용하던 균으로서는 너무나 불편했다. 길가의 군것질꺼리도 사먹으려면 쌀을 한 홉 주어야 하니 더욱 불편했다. 종친체면에 '삼식아 강정 좀 사먹게 쌀 한 주먹만 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나마 자신은 종친이라서 말이라도 타고 가지만 일반 백성들은 쌀과 삼베를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어 초여름에 이른 날씨에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문득 백 원짜리가 무겁다고 하면서 시내버스에 앉을 자리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지나는 길 옆의 조선의 산은 아름다웠다. 산이라 하기에는 낮은 구릉들이지만 오히려 그 둥그런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듯했다. 문득 선조들이 이런 모습에 반해서 대륙이 아닌 이 작은 반도에 정착한 것은 아닐까라는 헛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낮의 여행은 군것질을 못한 것 만 빼고는 그럭저럭 할만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처음 묵던 민가에서 생겼다. 참고로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주막은 조선후기에나 생긴다. 현재는 기껏해야 주요 교통로에 소수만이 존재한다. 균보다 훨씬 뒤인 효종대의 하멜표류기에도 주막이 없어서 민가에 묶었다고 하니 균이 상상하던 주막은 아직 그 틀이 완성되지 않은 원시적인 수준이라 양반이 묵기에는 곤란하다. 그래서 균일행은 마을에서 그나마 잘 사는 듯한 민가에서 쌀을 주고 숙박을 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의 모든 일반가옥이 가진 문제가 균을 기습했다.
"아! 따거! 아! 아!"
균이 깜빡한 것. 바로 빈대 이, 벼룩 트리오였다. 조선시대에는 잘 씻지 않았다. 옛날에 선교사들이 동북아로 선교를 와서 보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은 사우나 좋아하기로 유명한 핀란드인 들보다도 더하다. 일본인은 목욕을 하루에 한 번 안하면 죽는 줄 안다. 피부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
'조선의 풍경은 무척이나 좋아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은 피부가 검은 편이다. 어느 아이의 발을 돌로 긁어보니 때가 나무껍질처럼 일어났다. '
심지어는 국왕도 일주일에 한 번 씻으면 다행이다. 양반네는 그와 비슷하거나 못하고 일반 평민들은 훨씬 못했다. 천민들은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사벨라여왕은 자신은 태어나서 한 번 결혼 전에 한 번 목욕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바 있다. 진짜로 그랬다…….
아무튼 균과 정인기는 벌집이 된데다가 이불의 심오한 냄새에 거의 날을 샜다. 부시시한 둘에 비해 하인들은 잘 잔듯했다. 이상하게 여기 균이 물어보자 삼식이는 말했다.
"도련님, 원래 이런 곳에는 이불을 안 주는 구만요. 빨래도 힘들어 1년에 한번 빨면 많이 반거유. 그래서 온돌방에서 그냥 자는 것인데.... 집주인이나 제가 불편할 꺼라고 말씀드렸고요. 그래서 원이나 관사에 묶자고 한 겁니다요."
두 숙질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집주인이 말아준 국밥으로 대충 아침을 떼웠다. 그리고는 말을 타고 가면서 졸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뜩이나 느린 속도가 더 느려졌다.
"이렇게 가면 관아나 원이 오늘 중에는 안 나오는 데 이를 어쩌지."
어린 제 주인이 걱정되는 지 일부러 큰 소리로 혼잣말하는 삼식이의 말을 자장가 삼아서 말이다.
결국엔 그 날도 민가에 묵게 되었다. 한참을 백과사전을 정독하던 균은 즉시 부엌에게 달려가 마늘을 얻어왔다. 그리고는 마늘을 쪄서 자기방의 군데군데 뿌리고 뭍쳤다. 백과서전에서 읽은 마늘의 구충작용을 믿고서다. 그리고 그날 밤…….
"후후후~ 도저히 못 참겠다."
"같이 가요 숙부."
"하~ 하~ 하~."
마늘을 너무 많이 발랐는지 그 냄새가 독했다. 기생충보다 사람 잡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 날도 둘은 자지 못하고 마루에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이번에도 원을 놓치게 된 일행은 다시 민가에 묵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만 마늘을 쪄서 뿌렸다. 냄새는 났지만 그럭저럭 잘 잘 수 있었다. 한성부를 출발한지 3일째 되던 날의 쾌거였다. 그런데 하인들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아우~ 잘 잤다. 이 집은 벼룩이 없네? "
"어제 대청소했데……."
"그럼 우리 도련님 헛수고 한거네?"
균은 순간 백과사전 방화사건을 일으킬 뻔 했다. 한참 뒤에야 옮겨 쓴 노고를 생각하고 참았는데 다행히 백과사전은 균의 이빨자국 약간과 두틀림 조금을 남긴 채 화형을 면했다. 그리고는 억지로 교훈을 생각했다. 안 그러면 미칠 것 같아서다.
'역시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 책의 지식은 현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 책을 기반으로 하데 많은 것들을 현실에 적응하여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음 좋은 교훈이야. 다음에는 라이터부터 만들어야지 성질나면 확 불 질러 버리게……. '
아무래도 위험한 꼬마 하성군 균이다.
다음 날부터는 균 일행은 각지에 산재된 관아의 숙사와 원들에 묵으며 전라도로 향했다.
'달무리다. 과연 토정선생은 점쟁이야. 참 점쟁이가 맞구나.'
조치원에서 묵고 있던 균의 눈에 달무리가 보였다. 곧 비가 온다는 신호다. 그래서 일행은 며칠 여기서 묶기로 했다. 다행히도 조운선을 안 탔기에 그나마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아니면 지금쯤 험해진 바다에 누가누가 피자 많이 만드나 내기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균은 백과사전과 사전 지식을 이용해서 염전을 만들 곳을 선택해보았다. 물망에 오른 곳은 다음 세 곳이다. 암태도, 비금도, 흑산도. 선택요건은 다음과 같다.
1. 본토에는 소금상인이 많아 천일염기술이 새어 나갈 수 있어서 불가.
2. 섬이 커서 상당수의 염전을 만들 수 있는 곳.
3. 군사시설을 유치할 수 있고 식량의 생산량도 많은 곳.
4. 전라우수영과 적당히 먼 곳.
암태도는 조선후기 문천씨라는 대소금상인의 근거지이며 섬도 크고 소금의 판로에도 좋지만 너무 육지와 전라우수영에 가까웠다. 흑산도는 섬도 작은 편에다가 육지와 너무 멀었고 식량 확보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최적지는 비금도였다. 비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일염이 생산된 섬으로 해안선이 같은 면적에 도초도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길어 염전의 면적이 넓으며 본토와 적당히 멀고 이웃섬 도초도에는 농업이 성해서 식량의 자체 조달이 가능했다. 섬내에 버려졌지만 2개의 성이 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도 문제없었다.
거기에 비금도 일대에는 을묘왜변이후 조선의 행정력과 군사력의 공백상태였다. 판옥선의 건조가 늦어서 그 질을 떠나서 함정의 절대 수가 부족해 겨우 우수영일대와 주요 교통로에만 조선의 힘이 미치는 상태였다. 이정도면 숨어서 힘을 기르기에는 충분하다.
비가 많이 내렸다. 균은 이정도면 까딱하면 배가 침몰할 정도로 바다가 험할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육지로 왔고 그 동안은 거창한 역사에 빠져 보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의 삶을 유심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비도 최영이나 남사고가 뿌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한편 이번에 이르게 올라온 태풍은 전라우수영을 급습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많은 함정이 상해 전라우수영의 전력은 을묘왜변직후 보다도 못해져버렸다. 전라우수사가 그 많은 수졸들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지경이였다. 이로써 전라우수영 관내의 수군전력은 최소 10년 후에나 복구가 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태풍은 조금 방향을 틀어서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해안지역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고 충청수영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더 북진해서 한성부 근처까지 이동해서 그 일대 염전을 깨끗이 갯벌로 만들고는 사라진다.
이 때 윤원형이 입은 피해가 커 사람들은 천벌이라고 쑤군거렸다. 하지만 파괴된 염전과 소금가마로 인해 한성부 일대의 소금값이 급등했다. 다행히 농작물의 피해는 적었지만 이며 몇 년째 조선은 극심한 흉년에 시달리고 있다. 곡식값도 올랐지만 구황염(생존을 위해 사람이 꼭 먹어야 하는 소금.)의 수요도 늘어 소금값은 거의 쌀값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최소한 내년은 되어야 회복될 만큼 소금상인들의 피해가 커서 소금이 천금이라는 말이 장안에 돌았다.
거기에 북쪽에서는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임꺽정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양주의 백정인 임꺽정은 타고난 장사였다. 당시 황해도에는 유민과 산적이 많았는데 이들의 공격을 막는데 임꺽정이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 고을 수령이 그의 공을 가로채고 그를 백정이라고 쫒아버린 것이다.
이에 격분한 임꺽정은 순식간에 세력을 규합했다. 그 군세가 최소 200명에 동조자만 수천일정도로 산적패라기 보다는 반란군의 수준이었다. 임꺽정의 부대는 약 8개정도로 나누어졌는데 곳곳에서 치고빠져 지리에 어두운 중앙의 토벌군을 가지고 놀았다. 거기에 일부 아전들도 가세 토벌군의 정보를 알려주니 토벌은 요원한 상태였다.
거기에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대공세를 펼쳐 경원부일대를 공격해왔다. 함경도병마절도사가 이끄는 조선군 최정예인 북방군이 방어에 나섰지만 조선군과 여진족을 합쳐 수천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격퇴시킨다. 참으로 암울한 명종 14년의 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