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으다.
대체로 섬은 고기잡이로 먹고산다. 섬의 농사는 염해와 수해, 풍해로 인해 거의 부업으로 이루 어진다. 균은 비금도에 내리는 즉시 각 부락에 방문해 포구와 기타 필요한 지역을 빼고 해안가 전역을 사용한다고 통보했다. 어차피 농토나 산이 아닌 한 대부분은 버려진 땅이라서 육지에서 만 나는 몇 가지 물건을 나누어주자 촌장들은 두말없이 찬성했다.
거기에 일꾼까지 쌀을 주고 산다고 하자 비금도 전체에서 청년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당장은 많 이 필요 없었다. 일단은 죽은 지식인 천일염전을 실험을 통해 현실화시켜야 했다. 그리고 성공 한 후에나 돈을 풀어 대대적인 염전건설에 들어갈 수 있고 빨라도 내년 초에나 천일염의 생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문자 그대로 천일염은 염전에서 몇 차례에 걸쳐 태양의 열과 빛으로 바닷물을 건조시켜 만드는 소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게 먹히기 전에 일본인이 주안염전을 만든 것이 시초이며 최초 생산지는 비금도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고려 때부터 일단 염전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염도를 진하게 한 후 그 물을 끓이는 절반쯤은 천일염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 뒤로 천년간 그 방식 그대로 만들었고 소금 값이 비싸게 되었다.
인구 약 5천만의 대한민국의 일년 소금수요는 약40만 톤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400만 전후이니 대강 10만 톤 내외의 수요가 필요하다. 그나마 이는 최소한으로 이때 당시의 물고기저장법 이 염장이기 때문이다. 그때 얼음은 물고기보다 비싸고 일반인은 겨울이 아니면 구경도 못한다.
물고기저장법이 비싼 소금에 의존할 수 없는 바람에 어촌에서는 물고기가 버려지는 데 정작 조 금 안쪽의 내륙에서는 육류보다도 비싼 고급음식이였다.
그래서 소금이 많이 싸다면 그 수요도 어느 정도 증가한다. 대략 증가분이 5만 톤에서 10만 톤 으로 추정하는데 그 정도면 조선 전체의 수요량은 거의 20만 톤정도로 추정했다. 3000평 (1결)
의 염전에서 매년 소금 200섬이 생산된다고 한다면 이는 약 24톤이나 된다. 약 일만 결의 염전 이라면 무려 24만 톤 현시세로 500만 냥의 거금이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아직 조선은 24만 톤의 소금을 다 소비하지도 못하고 많은 경쟁자 들이 존재하고 도로사정이 열악해 그 판매지도 제한된다. 그래서 균은 내년에 약 3백결의 염전 에서 5000톤의 소금 생산을 계획 중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계획이 맞는다고 생각되면 약 3천결 의 염전을 운용하여 7만2천 톤의 소금을 생산해 조선남부에 독점 공급하는 체제를 계획하는 것 이다.
조선에서 가장 어획고가 많고 인구도 많은 남부지방만 장악한다면 경재성에게 한 섬당 2냥에 넘 겨도 1.25냥 정도는 순이익이 난다. 그게 60만 섬의 소금이라면 그 이익은 무려 75만 냥. 현 조 선재정의 약 37.5%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된다. 그 정도면 균이 계획하는 일에 자금 부족은 없을 것이다. 단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일단 비금도에서 땅을 구입한 균은 지원받은 염전경험자들과 섬에서 뽑은 일꾼과 함께 소규모의 염전을 만들고 극소량의 소금 생산에 들어갔다. 일단 백과사전과 현재 염전법을 합쳐서 제염법 을 만들고 더욱 적절한 방법을 찾기 위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이 사이 정인기는 비금도의 행정업무를 이관 받고 균이 얻은 땅을 문서로 인정받기 위해 지도군 관아에 다녀왔다. 감영과는 달리 지도군수는 정인기를 제법 환대해주었다. 별 직책은 아니나 정 세호대감의 막내아들이란 것만으로도 고을수령에게는 큰 손님 이였다.
정인기는 군수를 만난 후 에도 비금도이나 한성부로 가지 않고 삼남지방를 떠돌며 뛰어난 대장 장이, 전통무예를 배운 사람, 조선기술자, 기타 재주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를 모집했다. 균 의 말로는 염전사업에 필요 하다고는 했지만 문제는 그 인원이 수백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균의 말로는 염전사업에 필요하다는데 왜 필요한지 궁금했다.
하지만 정인기는 혈서까지 쓴 균의 약속을 믿었기에 몇 달 후에 그 사람들과 함께 비금도로 돌 아왔다. 그리고 명종 14년이 가고 새로운 해가 되었다.
이제 비금도는 완전히 균이 다스리는 땅이나 다름없었다. 균은 많은 일꾼을 고용해서 배가 없이 가난하게 살던 이들을 모두 흡수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적으로 대형선을 보유하고 있어서 육지 로부터 많은 물자를 공급하고 팔 물건도 대신 팔아주었다. 거기에 참봉 정인기도 세금과 행정업 무를 맞아 깨끗하게 처리하여 지방아전들의 폐단을 막아주었다. 또한 정인기는 비금도 유일의 서당 훈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이구 작은 나으리, 기체일후 뭐더라~ 나이가 들고 나서는 영 기억력이~ 아무튼 간밤에 잘 주 무셨습니까요?"
"작은 나리, 밥은 잘 자셨는지요?"
"도련님, 오늘은 또 어딜 가시는지?"
"도련님, 왜 이렇게 얼굴색이 이상한교? 잠시만 계시소. 당장 물괴기를 고아서."
비금도는 균이 가기 전부터 10여개 부락에 수천 명이 사는 큰 섬인데다가 최근 들어 외지에서 돌아오는 이와 균이 데리고 온 이가 많아서 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모두 다 균과 정인기만 보 면 인사 못하면 죽는지 안다.
못해도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만나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사하니 그 답례만 해도 미 칠 정도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인사하는 거야 이제 조선생활 7년차의 균이 어느 정도는 익숙해 진 상태이나 최소한 고개만 끄덕이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다. 대다수의 섬사람들을 균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균을 다 알아 보았다. 일부러 옷을 바꾸어 보았지만 하얀피부를 가진 꼬마는 균밖에 없어서 바로 탄로가 났다.
균은 왠지 전생에서 군 훈련소에 입대했을 때 훈련병 1개 중대와 실내에서 맞닥뜨린 교관의 얼 굴이 사색으로 바뀌었던 일이 생각났다. 대여섯 명당 한 번 경례해도 교관은 수십 번은 계속 경 례해야 한다. 그걸 보고 가끔 미운 교관, 조교를 골탕 먹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보다 몇 배의 강대한 적(?)을 맞아 싸워야 하는 신세이다.
그냥 무시하면 따라와서 인사하고 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 섬의 최고 높으신 분이라고 꼭 한다고 하는데 아예 정인기는 밤에만 돌아다니고 꼭 낮에 다녀야하는 균만 목이 빠져라 침이 말라라 인 사를 해야 했다. 악덕기업주라면 이런 불편은 없었겠지만 그건 균의 성격이나 계획에 맞지 않는 다.
"하성군 나으리, 오십니까요?"
하도 인사를 많이해서 머리가 띵한 균이 염전에 도착하자 여러 명의 감독들이 몰려들었다. 몇몇 은 경재명이 붙여준 인물이나 이미 두둑한 보수를 주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어 대부분 믿 을 수 있는 소금사업부의 간부들이였다. 동시에 균과 더불어 천일제염법을 완성시킨 조선유일의 소금연구원들이다.
"오늘로써 벌써 염전이 70개나 완성됐군요. 일꾼이나 자재, 자금은 더 안 필요합니까? "
"일꾼이 약간 부족한 듯한 것은 사실이나 이곳 섬이 큰 곳이라 일꾼이 크게 부족하지는 않습니 다. 하지만 이곳 염전에 오면 섬을 못 빠져 나가게 하니 외지에서 일꾼이 오기가 힘듭니다. 그 냥 지금 이대로 조금씩 건설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완성된 염전에 들어가는 일꾼도 무시 못 합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염전이 가동되지 않 아서 그렇지 천여 개만 되어도 이곳에는 어부들마저도 씨가 마를 겁니다. 그나마 천일제염법이 일력이 적게 들어가서 다행입니다. "
"일꾼이야 나중에 제 숙부가 알아서 육지에서 이주민을 받아드릴겁니다. 그건 걱정 마시고 당장 필요하다면 이웃 도초도에서 일꾼을 동원하겠습니다. 자재나 자금은 어떻습니까? "
"그건 나으리께서 풍족하게 주시어 문제없습니다. 만일 이정도의 일꾼에 자재나 자금이 모자르 다면 염전 20개도 안 만들어 졌을 겁니다."
비금도는 제법 인구가 되어 거의 5천명의 인구를 자랑했지만 그 많은 염전을 만들고 유지할 인 력은 무척 모자랐다. 거기에 균의 사병대도 만들어야하니 상당한 인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최소 한 1만이상의 인구가 있어야 부족하나마 수요를 채울 수 있다고 하니 인구확보가 가장 큰 문제 였다.
조선내륙에 제법 많은 유민이 있다고 하나 아직은 임진왜란전이라 조선의 행정망은 상당한 수준 을 가지고 있어 적정수준 이상의 인구유입은 곤란하다. 조금이라도 많은 인구의 이동은 토벌군 을 부르는 자살행위였다. 따라서 소수의 유민유입과 자체증가 그리고 이웃 섬들에서 인력을 구 하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그 덕분에 염전은 하루에 한 결정도 만들면 많이 만든 것이었고 그나마 사병대의 창설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미 매일 천여 명의 인력이 동원되는 데도 염전의 건설은 더디기만 했다. 어떻게 일꾼을 구할까? 균의 최대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이는 내년이면 해결이 될 문제 였다. 실제로 최고의 문제는 따로 있다. 참고로 마을 사람들의 인사는 두 번째 문제다.
이제 균의 나이 8세. 하지만 열 살 먹은 아이들보다 큰 어린이다. 마을어른들을 오라 가라 하는 높은 지위에 햇볕에 타지 않은 하얀 피부, 그리고 섬에서 글을 아는 유일한 아이이며 가장 귀엽 게 생긴 아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근처의 아이들의 질투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사업구상으로 고민하며 머리를 기우뚱거리는 모습에 열대여섯 먹은 소녀들도 은근히 관 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귀엽기도 하지만 균만 잡으면 팔자가 핀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나 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고려조이래 조혼도 많이 행하여지는 상황이므로 별로 문제될 것도 없 었다. 물론 평민처녀들이라서 첩실의 지위를 감수하고 몇 년은 남편이 아니라 아이로 길러야겠 지만 그래도 이 섬의 총각들보다는 휼륭한 남편감이다. .
거기에 조선시대의 남녀관계는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엄격한듯하나 일반평민은 자유로운 편이다.
최대한 사람들이 안 다니는 시간을 맞추는 균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소녀들 도 마찬가지였다.
"호호호, 도련님 어디가세요? 잠시 갯벌을 걸으며 이야기나……."
"아니에요. 저랑 모래사장에 가실래요. 제가 재미있는 놀이를. 호호호."
"이년아 비켜! 도련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갓 구운 조개인데 맛이 고소한게 악~."
"비리비리한 것들이 감히 우리 도련님 앞에서 어슬렁거려. 역시 여자는 힘이여~ 그래야 애도 쑥 쑥 낳지. 맞죠, 도련님. 하하하!"
"……."
균과 비슷한 10살 내외의 여자아이들이라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거의 스무 살 먹은 저 괴물처 녀를 위시해서 방금 일 미터는 날아간 열 일곱 정도의 처녀 등은 왜 말을 거는지. 그것도 두 눈에는 욕심이 가득 담긴 채로……. 좀 순수한 눈빛이라면 거부감이 안 들지만 욕심에 찬 눈빛 은 속옷 빨래시키기 전에 전생의 누나를 보는 듯해서 더욱 더 싫었다.
그들의 등쌀에 정작 균 또래의 꼬맹이들은 멀리서나 균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정작 하고 싶 은 말 타기나 오징어 달구지는 못하고 있다. 낚시나 수영도 생각해봤지만 성질 급한 균이 낚시 를 좋아할리 없고 양반은 아무리 더워도 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비금도는 제법 큰 섬이라서 볼 것도 많지만 그러다가는 인사하다가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 냥 백과사전이나 계속 읽거나 염전이나 한 번 더 둘러보는 정도가 균의 현재 여가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