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으다.
잔치라기보다는 다과회에 가까운 모임이 계속되고 점차 분위기가 무르익자 문득 명종은 조카들을 한 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물론 왕위계승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아이들의 능력을 비교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잠시 종친들과 중전 심씨를 내보내고는 어린 조카들만 불러 앉게한 후 자신이 쓰고 있던 익선관(국왕의 모자. 가장 많이 사용된다.)을 벗고 말했다.
"너희들은 차례대로 이 익선관을 써보거라.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에게는 내가 큰 상을 내리마."
아직 어린 왕손들은 하늘과 같은 주상전하의 익선관을 쓴다는 호기심에 하나둘씩 관을 써보았다. 하지만 모두 쓴 것은 아니다. 한명은 바로 세자인데 자기도 비슷한 것을 맨날쓰고 다녀서 관심이 없던 것이고 또 한명은 하성군 균이였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하성군이 이때 관을 안 써서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고로 쓰면 안 된다. 그런데 나만 안 쓰니까 좀 눈치가 보이는 군. '
두 명이 익선관을 써보지 않은 것을 본 명종은 일부러 불호령을 내렸다. 원래라면 익선관은 왕이 평시에 쓰는 모자라서 그 누구도 써서는 안됬다. 하지만 국왕의 말은 곧 법이다. 명종은 두 아이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였다.
"세자와 하성군은 과인의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왜 익선관을 쓰지 않는 게야!"
명종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울상이 된 세자는 즉시 익선관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는 하성군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하성군은 익선관을 받아서 정중히 명종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어 말했다.
"이 익선관의 주인은 바로 주상전하 오직 한분이시옵니다. 신하된 자로써 이 익선관을 쓰는 것은 불충이온데 어찌하여 관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는 복장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의 하성군이 했던 말을 조금 바꾸어 말하자 명종은 화난 표정에서 다시 약간 멍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잠시 후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하성군의 과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구나. 오늘의 상은 하성군에게 주겠다. 너희들에게는 아직까지 이 익선관을 쓰지 않은 모습이 가장 어울리는 것이다. 이제 그만 긴장을 풀고 연회를 즐기도록 하거라."
"예 전하~."
명종과 종친들은 한동안 더 어울리다가 오후 늦게서야 돌아갔다. 다행히도 진이가 사고를 치지 않아서 균과 가족들도 한숨을 돌렸다. 그날 밤 명종은 강녕전의 침소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잠시 침소를 나와 차가운 밤 바람을 맞으며 거닐다가 하늘을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초 자네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야."
다음날 균이는 진이를 등에 태우고 아기 때처럼 온 집안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 정씨가 말렸지만 진이는 균의 등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과 인은 이미 균이 없을 때 많이 시달린 터라 아예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균만 늦가을 쌀쌀한 날씨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진아, 헉헉~ 조금만 쉬었다하자."
"싫어. 난 오빠 등이 좋단 말이야. 이랴~"
그렇게 근 일 년 만에 균이 죽어나고 있던 바로 그 때 균을 구원하는 소리가 있었다. 숙부 정인기가 온 것이다. 균은 좋아서 열심히 뛰어나갔다.
"숙부님~!, 오셨어요!"
"…….너 어디 아픈 게냐? "
오랜만에 애같이 행동한 균을 보고 오히려 적응이 안 된 정인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지도군수라고요?"
"그렇다. 아직 논의 단계지만 주상전하의 어의가 있으니 아무래도 그리될 것 같구나."
잠시 후 진이를 방에 가두고 균과 정씨부인이 앉은 자리에서 정인기는 일부러 점잔을 빼면서 말했다. 출사 1년 만에 지방수령의 자리에 오른 것은 상당한 진급이다. 물론 지방 관직이라 그다지 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수령은 최소한 당하관이다. 종6품 이상의 중위관직인 것이다.
원래라면 군수는 종4품의 관직이나 현재 지도군에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는 고작 지도 본섬일대이며 다른 섬에는 간접적인 영향력만 행사하는 터라 현령이나 현감으로 격하되어 파견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종5품이나 종6품의 관직이니 능참봉이라 불리는 종9품 참봉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고위직이다.
균은 그제서야 명종이 말한 상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정인기를 승급시켜 자신을 더 도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왠지 숙부인 명종이 좋아지려고 했다. 그제야 균은 어제 궁에서 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전하께서 저에게 선물을 주신다고 하셨답니다. "
"호호호, 조카 잘 둔덕에 우리 인기만 덕을 보는구나."
정인기는 자랑하러 왔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아무래도 그의 급속승진이 균이 말한 주상전하의 선물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저녁에는 정인기의 집에서 간단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균의 형제들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정인기의 아버지인 정세호와 세 명의 형들은 모두 참가했다. 특히 큰형인 정인상이 고작 종7품인 직장벼슬에 머물렀고 나머지 두 형제는 아직 출사를 하지 못한지라 정세호의 기쁨은 무척이나 컸다.
"오늘 조회에서 우리 인기의 관직이 결정이 되었다. 지도군 아니 지도현령으로 종 5품의 품계를 받게 된단다. 종9품 참봉에서 8계단이나 승급해서 말이야. 하하하."
정세호는 무척이나 기쁜지 시종일관 웃음이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세 형제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동치미만 들이키거나 연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다. 정인기가 한 일이라고는 하성군을 따라다닌 것 밖에 없는데 갑작스럽게 승급을 했다. 이는 주상전하가 하성군을 좋게 본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윤원형과 대비 윤씨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님, 인기가 승급한 것은 분명 좋은 일이나 그다지 좋아 하실 것도 없습니다. "
참다못한 정인상이 말문을 열었다. 이는 정인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봉사정도로 승진시켰으면 모르지만 최근 들어 가장 크게 승진한지라 장안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당연히 여러모로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하하하, 그래봐야 고작 종5품 벼슬이다. 너희들의 걱정도 알지만 그다지 걱정할 것도 못 되느니라. 지도군은 최근 들어 을묘 년의 왜변과 작년의 폭풍으로 일개 현만도 못한 수준이다. 윤원형이 팔아먹기에도 힘들어 내버려둔 자리야. 거기에 원래 섬으로 이루어져 그 세금도 전라도에서 가장 적은 편이니라. "
"그래도 막내가 너무 승진하여 시기하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기하라지. 내가 보는 지도군은 계륵이다. 시기는 하지만 정작 부임하라고 하면 할 자도 별로 없을 거다. "
"그럼 이렇게 좋아 할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쯧쯧쯧. 너희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느냐? 지도군수라는 자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상전하의 눈에 들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야. 아무리 외척들이 날뛰지만 대비마마와 주상전하중 누가 오래 살겠냐? 몇 년 후면 당상관에는 임명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어. 나는 그것을 좋아하는 거다. "
한동안 형제들의 안목을 질책하던 정세호는 정인기를 바라보면 말했다.
"이제 너도 고위직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다. 향간에는 전하가 하성군을 아낀다는 말이 있으니 더욱 더 몸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낮은 벼슬이나 전하가 진실로 하성군을 아끼신다면 너의 벼슬이 더욱 올라가게 된다. 하나 너의 실수로 하성군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으니 각별히 유념하거라."
정인기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어제 누님 집을 떠날 때 결사적으로 말리더니 그 뒤엔 왠일로 자기 집까지 배웅을 하던 조카 균의 말이 떠올랐다.
'숙부도 이제 승진가도에 오른 셈입니다. 별일이 없다면 조만간에 더 높은 벼슬을 얻을 수도 있지만 윤원형에게 꼬투리를 안 잡히도록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저의 집안과 귀여운 제 사촌 동생과 숙모님을 위해서 라도요. 그런데 언제 숙모님 모르게 아기 좀 보면 안 되나요? 아무래도 숙모님 볼 낮이 없어서 헤헤헤…….'
왠지 아버지의 말과 균의 말이 같은 내용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착각은 아닌 듯했다.
윤원형은 현 주상인 명종의 외숙부이며 서원군의 칭호를 받은 명실상부한 이나라 최고의 권력자였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을사사화로 인종의 외척인 윤임등을 제거하고 2년 후인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종친인 봉성군를 사사하고 정권을 잡았다. 명종 15년인 올해에는 서원부원군(정1품)에 올랐으며 현재는 우의정의 벼슬을 맏고 있다.
원래의 처 김씨를 사사하고 첩인 정난정과 살았는데 한성부에만 대궐같은 집이 15채에 이르고 돈 만 냥을 가지고도 만나는 데 3일이 걸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윤원형에게 벼슬을 샀다. 문정왕후에게 보우라는 중을 소개시켜 병조판서로 삼게하고 지나친 불사로 국고를 낭비시켰으며 함부로 빼앗은 재물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친형이 윤원형을 욕한 자기 동생을 고발해야 할 만큼 그의 위세는 명종을 넘어서는 것이였다. 지금 그 윤원형이 정난정과 함께 있었다. 마침 대궐에 입궐해 문정왕후를 만나고 온 정난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원형을 바라보았다.
"난정아, 대비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고? "
"그렇습니다. 서방님. 대비마마께오서는 최근들어 주상전하의 마음이 세자저하를 떠나고 있어 걱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자저하를 떠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주상전하의 보령이 아직 젊다고 하나 자식이라곤 세자저하 한 분이시지 않느냐?"
"그러기는 하오나 요즘들어 세자저하가 글공부에 소홀하신 것을 빌미로 크게 야단을 치신 반면 하성군을 만나시고는 그의 외숙의 벼슬을 크게 높여주셨다고 합니다. "
그 말을 들은 윤원형은 크게 혀를 찼다. 지금은 하성군 따위를 신경쓸때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문정왕후는 중 보우를 만나고 나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거기에 이미 올해 60세의 노친네라서 그런지 예전의 기민했던 판단력은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쯧쯧쯧. 대비마마도 나이가 드시더니 걱정이 많아 지셨군. 난정아. 아무리 전하께오서 하성군을 총애해도 세자저하가 계신데 보위를 물려 주시겠느냐? 거기에 최근에 정인기라는 자가 받은 지도현령의 자리는 쭉정이와 다름없다. 웬만한 현감자리보다도 못해서 청탁해오던 자가 아무도 없던 자리지 않더냐? "
"그래도 주상전하의 어의가 있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옵니다. 잡초는 싹이 자라기 전에 뽑아야 하는 법입니다."
"지금은 꼬맹이 하성군 따위에 신경쓸 때가 아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임꺽정이라는 놈. 그 놈을 못 잡는다고 곳곳에서 난리를 치니... 이거야 원. "
"그래야 한낮 도적의 무리가 아니옵니까? 저번에는 두적의 수괴가 하나 투항했다고 하던데 곧 끝날 것입니다. 그런 변방의 일은 나두고 안쪽의 일을 다스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정난정은 제법 간절한 눈빛으로 윤원형에게 말했다. 이제까지 틀림이 없던 자신의 느낌이 하성군 이균의 이름을 듣자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정도였다. 하지만 윤원형의 생각은 달랐다.
"임꺽정이야 무장들이 잡아드리겠지만 문제는 도적하나 못 잡는다고 감히 나 윤원형에게 덤비는 놈들이 있단 말이다. 이거야 원. "
정난정은 눈을 동그랗게 뗬다. 감히 최고의 세도가인 윤원형에게 도전하는 자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였다. 윤원형의 말은 계속 되었다.
"이량, 고 놈을 중전마마의 외숙이니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주상전하도 도적를 못 잡는다고 언제나 호통치시고 우리쪽 사람들을 내치시는 판국이니.... 하성군따위는 지금을 없애버릴때가 아니다. 어떻게는 이량이를 없애버려야 하는거지."
윤원형은 이를 갈았다. 정난정도 그간 조정의 사정을 자세히 몰랐던터라 이성적으로 이량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지만 10살도 안 된 하성군의 이름이 왠지 꺼림칙했다. 고민에 빠진 정난정은 어느새 윤원형이 자신의 저고리를 벗기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무렵 정인기의 부임준비덕분에 몇 달의 시간여유를 가지게 된 균은 그 전에 준비해둔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성부의 자기 집을 떠났다. 물론 진이를 피해서라는 이유도 엄청 중요하지만 주목적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금력은 시간이 지나면 점차적으로 해결될 문제고 남는 기간 동안은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어야 할 때였다. 바로 새로운 조선군의 근간이 되는 부대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