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28)

 세력을 기르다.

명종 16년 서기 1561년 4월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조선 13대국왕 명종은 분노에 차있 었다. 보위에 오른지도 언 16년. 원래 왕위에 관심이 없던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 에 의해 반강제로 보위에 올랐고 제위 8년째인 1553년 친정에 나섰으나 실제적인 국정운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였다.

명종은 임꺽정의 난을 계기로 어느정도 발언력을 강화시켰지만 어머니 문정왕후 윤 씨의 개입은 단 한번에 명종의 자존심을 꺽기에 충분했다. 겨우 한마디 말도 못하고 대비의 말을 따라서 출정식에 참가해야 했다. 명종은 홀로 침소에서 술을 마시며 울 분을 달랬다.

"주상전하.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드시라 해라."

스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중전 심씨가 들어왔다. 후일 인순왕후가 되는 그녀 는 돈녕부영사 심강의 딸로써 14살이던 인종 1년 중전이 되어 슬하에 세자 부를 두 고 있다. 성품이나 인격은 좋은 편이지만 친인척의 관리에 실패해서 조선삼흉중 이 흉인 심통원과 이량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중전, 이 늦은 밤에 어인 일이요?"

"전하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어느새 중전 심씨는 명종의 맞은편에 앉아 술병을 들어 빈잔에 술을 따라서 채웠다.

그 뒤로 한동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 한참 뒤에야 한숨을 내쉬며 명종이 말을 했다.

"중전, 아무래도 과인은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닌듯 싶소."

"전하..."

중전 심씨 역시 시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횡포를 잘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차마 아니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명종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중전이 따라준 술을 마셨 다. 중전은 지아비가 걱정되는 듯이 슬픈 눈으로 말했다.

"전하, 밤에 약주가 너무 과하십니다."

"아니오. 중전... 옛날에 내가 우리 부만 할때 형님께서는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해주 셨지요."

"인종대왕 말씀이시옵니까?"

"그러하오. 형님은 책을 좋아하셨는데 그러다가도 내가 가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소."

죽은 형인 조선 12대국왕 인종을 생각하는 듯 명종의 두 눈에도 슬픔이 밀려왔다. 죽은 인종은 이복동생인 경원대군(명종)과 계모인 문정왕후는 물론 종종의 첫 왕비이며 폐비된 단경왕후 신씨까지 잘 대했다고 한다.

"오늘 술을 마시다 보니 문득 형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나오. 중국 당나라때 측천무후라는 황후가 자기 아들을 내쫒고 여제가 되었다는... "

"전하,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혹여나 오해를 사지 않을까 두렵사옵니다."

"어마마마는 과인을 자식으로 보지 않는 듯하오. 좌의정을 더 챙기는 듯하시니 말이 요. 자식보다 동생을 더 아끼신단 말이오."

"전하..."

명종은 올해 28살의 젊은 왕이다. 어려서 수렴청정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 가 들어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선의 왕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겨우 옆에서 울음을 터드릴 것 같은 중전 심씨는 달래주는 일 빼고는 말이다.

그래서 명종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요즘 우리 세자는 어떻소? 세자빈과 합궁은 했다고 하오?"

"전하, 겨우 세자의 나이 11살이옵니다. 전하의 마음은 모르지만 아직은 무리이옵니다."

"하긴 과인도 중전과 혼례를 올린 것이 12살이고 합방을 한 것은 14살이던가?. 과인이 너무 앞선 듯하오. 중전."

"앞서도 너무 과하십니다."

"허허허. 중전의 마음도 과인과 같을 텐데... 아니 그러하오. 중전."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이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강대한 적인 문정왕후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명종은 후궁이 많지 않았고 그들과의 사이에서 자녀도 없었다. 혹자는 명종이 허약해서 다른 여인을 취할 능력이 안 되서라도 하나 아무래도 복합적인 이유일 것이다.

"우리 세자가 요즘 글공부는 게을리 한다면서요?"

"그게 요즘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은지라...."

"안 그래도 요즘 세자가 글공부를 멀리하고 매사에 힘이 없어 걱정이라고 세자시강원 (세자교육기관)에서 보고가 있었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중전 심씨는 외동아들인 세자 부에 대한 명종의 가벼운 질책에 미안한 듯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명종은 중전을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자식의 교육은 어머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해야 하는 것이다.

"중전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너무 심려마시오. 우리 세자에게 기운을 찾게 해줄만한 것이 없을까? 보약은 매일 먹으니 안 되고.... 그러고 보니 마침 하성군이 도성에 돌아왔다는데 한 번 입궐하여 세자와 같이 있게 해야겠소. "

"네? 하성군은 왜 불러 세자와 있게 하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과인이 어릴적 때는 형님께서 나와 많이 놀아 주셨소. 그래서 무척이나 즐거웠지.

어마마마보다 좋다고 말했을 정도니. 그러다가 어마마마께 종아리에 불이 나도록 맞았소. 하지만 그 다음날 그 다리로 다시 형님를 찾았소.

과인은 그랬는데 우리 세자는 형제도 없이 혼자 외롭게 컸소. 그러니 친구로 종친인 하성군을 만나게 하자는 말이오. 더욱이 하성군은 건강하고 총명하니 세자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오. "

"그렇사옵니까? 그렇다면 당장 내일 입궐시켜서 만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중전도 그래 생각하시었소. 과인의 생각도 그러하오. 그건 그렇고 중전... 오늘따라 참 곱구려."

"전하, 취기가 많이 오른듯 합니다. 그만 침수에 드시옵소...웁. "

경복궁의 자선당은 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일명 동궁이라 부리는 곳이다. 근정전의 동쪽 이며 비현각이 옆에 있다. 현재의 주인은 왕세자 이부와 세자빈 윤씨이고 올해 11살과 13살의 어린부부었다.

하성군 이균과 세자 이부는 단 한 살차이의 사촌형제이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작년 가을의 소연회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상전하, 뵙사옵니다."

"그래, 하성군 왔는가? 세자야 저번에 보았겠지만 네 사촌동생인 하성군 이균이다."

"세자저하, 뵙사옵니다."

"아바마마, 동생이라고 하셨사옵니까? 저는 지난번에 형인 줄 알고 말도 못 걸어 보았나 이다."

"허허허. 그러니까 세자도 얼른 커서 형님의 체면을 차려야 할께 아니냐? 더욱이 우리 세자빈도 좋아할 터이고."

세자 부의 얼굴이 빨게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균은 저 어린것들(균은 이제 33세이다.)이 밤에 벌써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세자는 허약하여 고작 8살, 9살정도로 작은 아이인데 세자빈은 균보다도 클 정도로 발육이 좋았다. 순간 이상한 생각을 하는 균. 여자는 12살 때쯤 성장속도가 가장 좋다고 하지 않는가?

"하하하. 얼굴이 빨게 지는 것을 보니 우리 세자가 다 컸구나."

명종은 세자가 세자빈에게 관심이 있는 듯 하자 기뻐서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면 너희 둘이서 잠시 투호놀이를 하고 있거라. 과인은 일이 밀려서 잠시 강녕전으로 갈 것이니라. 있다가 내관을 보낼 터이니 그 때 다과나 함께 하자구나. "

"예, 전하."

투호놀이는 일정한 거리에 놓은 항아리 속에 화살을 던져 넣어 살이 꽂히는 데 따라 득점을 정하여 승부를 겨루는 오락이다. 던지는 위치는 항아리에서 약 3자 가량 떨어진 거리에서 한 사람이 각기 화살 12개를 가지고 승패를 겨룬다.이기면 현, 지면 불승이라 하고, 그 점수에 따라 헌배, 벌배등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궁중이나 고관들의 기로연(관료들의 노인정이다.)때 여흥으로 벌였다.

균과 세자도 투호놀이를 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옆에서 궁녀들이 화살이 들어 갈 때마다 지르는 소리만 요란할 뿐 정작 균과 세자는 별말이 없었다. 무척 심심해진 균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하. 혹시 다른 놀이를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하성군도 그러하시오. 나도 매일 궁중에서 하는 놀이라 심심하다오. 그래 어떤 놀이오?"

"일단 궁녀들을 물려주시고 이쪽으로...."

그들이 시작한 놀이는 땅따먹기였다. 사실 균이 좋아하는 것은 말타기나 오징어달구지 같은 놀이이지만 세자의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큰 죄인데 세자를 타고 논다면 살아남지 못할 일이다. 처음으로 해보는 놀이에 세자는 좋은지 연신 말을 걸어왔다.

"음... 하성군. 이건 유효네."

"하하하. 저하, 사실을 인정하시지오."

"끙~ 하성군... 그럼 네가 보기에는 어떻냐? "

세자에게 지목당한 궁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어쩔 수 없이 균은 인정했다. 괜히 놀이 하나로 세자의 심기는 물론이고 젊은 궁녀의 목숨까지 날리는 우를 범할 수는 없다.

"저하. ...유효인것 같습니다."

"하하하. 하성군이 보기도 그러한가. "

그렇게 세자가 다 이겼다. 이균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세자는 오랫만에 잘 놀아서 그런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멀리서 세자와 균이 하는 놀이를 지켜보던 명종과 중전심씨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전. 참 보기 좋지 않소. 꼭 형제같이 노는구려. "

"그러하옵니다. 전하. 세자가 웃는 것이 보기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품위없이 흙장난을 하는 것은 좀 그렇사옵니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 했소. 이 나라의 주인인 과인도 농민들 앞에서 농사를 하는 시범을 매년 보이는데 세자가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될 수 있겠소. 그리고 공부로 지친 세자에게 저런 놀이도 가끔은 좋을 것이오."

원래 국왕도 경칩뒤의 첫 해일(12간지중 돼지날) 선농단에서 제을 지낸후 직접 밭을 경작을 하는 시범을 보였다. 이 때 구경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설렁탕의 유래가 된다. 선농탕이 설렁탕으로 바뀐것이다. 이런 국왕의 친경행사는 성종7년인 서기 1476년때 선농단을 축조한 이래 그곳에서 계속되었다.

이제 땅따먹기에 지친 아니 다 져서 짜증나기 시작한 균은 다시 세자를 다시 꼬셔서 다른 놀이를 시작했다. 역시 품위없지만 바둑으로도 전환할 수 있는 바로 이 놀이다.

"하성군. 이것은 ?"

"알까기라 하옵니다."

비록 자선당에 들어가지는 못해서 바둑판이 없었지만 궁녀들을 시켜서 임시로 구한 판과 바둑알로써 시작한 알까기는 세자가 땅따먹기보다 더 좋아했다. 아무래도 명확하게 판단이 되기 때문인 듯 했다. 특히 바둑알이 판에 걸릴때 유심히 바라보던 세자의 눈빛 이란 균의 눈 못지 않게 빛이 났다. 잠시후 강녕전에서 다과를 나눈 후 균이 퇴궐하려하자 세자가 신신당부를 했다.

"하성군. 내일도 꼭 입궐하시오."

"하하하. 세자가 즐거웠던 모양이구나. 그래 하성군도 별일이 없다면 꼭 입궐하도록하여라."

"예, 전하."

'이런 빨리 내려가야 하는데...'

균은 빨리 내려가야 했다. 비금도의 두 세력을 융합시키고 임꺽정을 확실한 부하로 만들 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묶인다면 문제가 터질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이 문제도 깨끗히 해결됬다.

며칠후 명종은 어머니 대비 윤씨의 방문을 받았다.

"어마마마.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

"주상, 요즘 하성군이 자주 입궐한다고 들었네."

"예. 어마마마. 세자가 외롭게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성군을 입궐시켜서 놀이동무를 시켜주고 있었습니다."

"주상. 하성군은 아비도 없이 염전을 경영하는 일을 하고 있는 아이오. 그런 아이가 세자의 놀이동무가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오. "

역시나 대비 윤씨가 꺼낸 말은 하성군에 대한 말이였다. 대비 윤씨는 중종이 낳은 자손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왕위계승권자들인 것이다. 중종 반정을 어릴 때 보았던 그녀에게는 충분히 경계할 만할 일이다.

"하지만 어마마마. 하성군은 그 심성이 바르고 영특하며 그 충성심이 깊어 나중에라도 세자에게 큰 도움이 될 아이라고..."

"주상. 어찌하여 종친인 하성군이 우리 세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말이오? 내 종친들과 거리를 두라고 그리일렀거늘... "

"하지만 어마마마..."

명종의 말에도 대비 윤씨는 결코 그녀의 뜻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명종을 몰아 부쳤다.

"내 일찍이 군주에게 있어서 종친들이란 반역을 이르키는 명분이자 실체라는 점을 명심 하라고 일렀거늘 어찌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게요. 주상."

"하지만..."

"주상. 다음부터는 하성군이 이 궁궐안을 활보하는 것을 바라지 않겠소. 아시겠소. 주상?"

"...예. 어마마마."

명종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니 문정왕후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나중에 혼자서 조용한 곳에서 울었다고 한다. 아마도 하성군을 보고 싶다고 하는 세자를 보면서도 속으로 울고 있거나 아니면 조용한 곳에서 울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균은 몇일만에 해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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