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28)

 세력을 기르다.

잠시 무게를 잡았던 균은 다음 의제를 생각하다가 섬에 돌아와서 김호진이 했던 말 이 떠올랐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식량이 부족하다. 대책을 세워야한 다.대충 이런 내용이였다.

"식량수급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던데... 김부장이 말해보시오."

"예. 이번에 섬의 인구가 무려 세배로 늘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출어도 제한하고 있 는데다가 너무 많은 식량을 나주에서 입수하면 표시가 나서 안됩니다. 그래서 현재 의 비축분과 어업생산으로는 3개월이상은 힘들고 거기에 수입분까지 합해도 4개월정 도면 식량이 바닥납니다."

"심각하구려. 혹시 세워둔 대책은 없소?"

균은 이미 대책을 찾아두었지만 일부러 부장들의 의견을 물었다. 부장들이 적극적으 로 임하지 않고 수동적이 된다면 최고 결정권자인 균만 힘들다. 그동안 같이 있으면 서 부장들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균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부 장들의 능력을 키워서 나중에도 써먹기 위해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증스럽게 전 혀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한동안 갑을박론이 계속됬다. 주로 황재훈과 나원호가 제안을 하면 김호진이 반박을 하였는데 임꺽정은 뭐가 뭔지 모르는 얼굴로 세사람의 논쟁을 바라보았고 박수익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이를 바라보던 균은 아무래도 박수익이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박수익이 입을 열었다.

"마마, 정현령님을 통해서 환곡을 받아보심은 어떠하겠습니까?"

"환곡? 그건 이미 중종대왕때 폐지되었지 않았소?"

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을 했다. 환곡제는 조선 건국때부터 있었지만 빌려준 곡식의 회수가 어려워 중종20년인 1525년에 의창이 폐지되고 이를 보완하던 사창도 성종 1년인 1470년에 폐지되었다. 도저히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도로 총명한 균 이 놀라는 듯 한 모습을 보여주자 박수익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가슴을 펴고 자 신이 아는 것을 설명했다.

"물론 의창과 사창은 폐지되었지만 구휼청에서 구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의창과 사창을 관아에서 관리하면서 백성들에게 식량을 대여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식량으로 받아오고 소금으로 갚는 겁니다. 곡식의 대여와 회수는 수령들의 인사고과에도 반영되니 정현령께서 소금을 다시 곡식으로 바꾸는 수고만 해주시면 양측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박부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의 고향에서는 환곡을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나누어주고 고리대금 같은 높은 이자를 물린 수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횡 령한 돈으로 뇌물도 준데다가 실적도 좋다고 더 큰 고을 수령이 되었습니다. 박부장 님 말대로 하다면 우리는 식량걱정을 덜고 정현령님께도 도움이 됩니다. "

계속되는 흉년과 농장의 발달로 조선조정은 상당한 재정압박에 시달렸다. 이미 중과 세중이라서 세금을 올리기는 불가능했고 다른 세수라고는 잡세 조금정도로 이는 농 업국가의 한계였다. 16세기부터 재정확보를 위해서 악용되기 시작하였고 조선후기에 는 삼정의 문란중에서도 최고의 문제점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환곡제였다.

당시 윤원형에게서 벼슬을 산 자들은 축재에 열을 올렸고 거기에는 환곡제를 이용한 고리대금업만큼 편하고 쉬운 일이 없었다. 거기에 조정은 환곡제를 잘(?) 운영해서 세금을 많이 내는 고을 수령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렸다. 그만큼 백성들의 고충은 심 해졌고 벼슬길은 돈을 버는 길이였다.

백과사전의 소유자인 균의 대책도 같았다. 너무 많은 량이라서 다 알지는 못 했지만 은 역사쪽을 중심으로 해서는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생에서도 사회 과목을 가장 잘 했던 균이기에 환곡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 었다.

그래서 간단하게 대책을 찾고는 모르는 척 놀라는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균의 의도는 성공한 듯 박수익은 좋은 의견을 냈다고 생각하여 의기양양했다. 거기 에 몇 가지만 더해지면 더욱 좋을 것이였다. 이미 봉록인상으로 돈을 주기에는 문제 가 있어 균은 박수익의 안목을 칭찬해 주었다.

"박부장, 좋은 생각이오. 역시나 관직에 있을 때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인지 그런 제도를 잘 아는구려. 다른 부장들의 의견도 그러하고 나의 생각도 같으니 김부 장과 박부장이 식량문제를 담당해서 그렇게 처리하도록 준비하시오. "

"예, 마마."

"더이상 특별한 의제가 없으면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에 일이 생기면 논의합시다. 다 음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으면 하오. 그리고 임부장. 다음부터는 서유생 보내도 좋소."

균의 말에 임꺽정은 싱글벙글하는 듯했지만 아직도 깍지 않은 산적수염 덕분에 알 수도 없었고 또한 처벌하기도 불가능해서 균은 그냥 넘겼다. 어차피 그의 머리를 바 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회의가 끝난 후 각 부장들과 김부장사이에는 예산쟁탈전이 벌어졌다. 김호진이 5만 냥의 막대한 자금을 빌여왔다고는 하지만 각부장들이 달라는 데로 다 주다가는 10만 냥도 부족할 것이다. 거기에 이주민들에게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아서 아직은 정착 금도 못 주고 있었다.

그래서 쓸모없는 예산을 찾아내기 위해서 모든 예산은 공문서로 청구하도록 균이 명 했다. 아무래도 구두로 예산을 타는 것보다는 여러가지 효율성을 보였다. 그리고는 김호진에게 예산문제는 일임해서 소요예산이 상당히 감소했다.

단점이 있다면 김호진의 일이 많아졌다는 것과 모범을 보이라는 뜻으로 균의 용돈도 같이 삭감됬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균은 김호진을 포함한 부장들에게 하사금를 내린 다고 예산을 타서 아주 조금씩 빼돌리는 것으로 군것질이나마 할 수 있었다.

 균은 지난 6개월간 밀렸던 서류와 문서들을 처리하고 5개의 각 부를 가끔씩 돌아다 니면서 잘못된 점들을 지적해서 고치게 했다. 그리고 다섯명의 부장및 주요 간부들 과 자주 만나서 격려하거나 하사금을 주어서 세력을 다지는 데 힘썼다. 특히 중시한 것은 군제 개편이였다.

현 조선의 군제는 중앙군인 오위도총부와 지방군인 잡색군이 있다. 이중 오위도총부 는 약 10개의 소부대로 이루어지며 평시 전력은 약 1만정도이며 전시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정병을 모아서 약 8만전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부대마다 인원 과 편제가 틀려서 뚜렷한 편제는 보이지 않는다. 잡색군은 그저 25명이 1대정도라는 기록이 있고 소패와 총패의 지휘관이 있지만 역시 뚜렷한 편제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제대로 된 병력편제는 조선후기에 보이는데 중앙군인 오군영과 지방군인 속 오군이 그랬다. 대충 오군영은 그 임무에 따라 대대급 내지는 연대급의 병력을 보유 했다. 하지만 군영별로 병력이 천차만별이였다. 지방군인 속오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은 편제를 취했다.

1영에는 5개 사를 두고, 1사에는 5개 초, 1초는 3기, 1기는 3대, 1대는 화병 1명과 합쳐 11명의 병사로 조직되며, 사에는 파총, 초에는 초관, 기에는 기총, 대에는 대 총을 각각 지휘관으로 두었다. 따라서 한 개의 영은 영장 1명과 파총 5명, 초관 25 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및 2,475명의 병사로 편성된 오늘날의 연대정도였다.

균은 이를 조금 변형시켜서 군대를 만들기로 했다. 10명을 대라하고 대총이 30여명 을 기라하고 기총이 100명을 초라하고 초관이 지휘하는 편제를 채택했다. 상위부대도 이런 식으로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는 300여명에 파총이, 영은 1천명에 영장이 지휘한다. 대략 3배씩 늘어나는 체제다.

하지만 이는 임시편제로 나중에는 여단, 사단과 같은 대규모 군조직이 등장해야 하 고 명칭도 변경해야 할려고 계획중이다. 하지만 지금과 즉위초기에는 영단위의 군사 력도 충분하다. 외국보다는 내부의 권력쟁탈전이 치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표가 3개영 3천명이상의 정예군대였지만 비금도는 그런 군대가 있기에는 너무 작 았다.

먼저 임꺽정이 영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유생은 본부초관, 나머지 두목들도 초관내지 는 부초관이 되었다. 하지만 계급은 주어지지 않았다. 원래는 균도 주려고 했지만 품계를 제외하고는 그런 개념이 없어서 안준 것만 못했다. 그리고 군대가 재편되면 서 병력은 조금 증가되어 병사만 5백명을 넘기게 되었다.

제대로 병력이 편제되자 균은 직접 제식훈련부터 시켰다. 이 군대가 자신의 근위병 이고 또한 화승총을 보유하게 되는 부대인 이상은 제대로 된 제식훈련은 기본이다.

또한 임진왜란때처럼 허무하게 무너지는 조선군은 더 이상 없어야 했다. 그래서 임 꺽정이하 전병력이 대오를 맞추어 행진을 하거나 여러 상황에서도 부대를 유지하는 연습이 계속됬다. 그럭저럭 '저게 군대구나.'라고 생각이 든 것은 열흘도 훨씬 넘긴 후였다.

총이 아닌 창을 들고 통일된 군복이 아닌 평복을 입었지만 발을 맞추고 대오를 유지 한 채 움직이는 부대는 무척이나 정예하게 보였다. 아직 제대로된 훈련은 시작하지 도 못했지만 최소한 대오도 못 맞추는 조선군보다는 그렇듯했다. 하긴 밥 먹고 훈련 만 받는 상비군이 가끔씩 동원되는 예비군보다 못할 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럭저럭 볼만하군."

"예, 마마."

균이 혼잣말을 하는 데도 박수익은 제대로 된 군대의 행진을 보면서 만족해하느라 대답을 했다. 현재 조선에서는 고작 내금위같은 금군들이나 저정도로 대오를 맞추고 오위도총부의 대부분인 갑사나 정병들은 잡색군보다는 낮지만 저 군대에 비하기도 힘들었다. 무관인 박수익에게 저 군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균은 불만족스러웠다. 단지 처음보다는 낮지만 너무나 허술했다. 원래는 전 생의 한국정규군을 목표로 했는데 기간이 짧다고는 하지만 군기가 덜 빠진 1년차 동 원예비군정도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오를 이탈하는 병사가 없어진 것 만해도 감지덕지다. 첫 행진때처럼 고작 몇리길인데도 병력의 반이상 없어지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암담하다.

아직 훈련도 안된데다가 총도 없이 다양한 무기를 들고 역시 다양한 복장으로 행진 하는 군사들이다 보니 더욱 허술하게 보였다. 빨리 총과 군복이 공급되어야 하기에 나원호와 김호진이 바쁘게 일하지만 진척이 늦졌다. 역시나 국가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라서 한계성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당장 보급해야하는 56식소총은 그 문제가 상당히 해결됬지만 가장 중요한 총신부분 에서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 주물기술이 떨어져서인지 아니면 원재료가 안 좋은지는 몰라도 총신이 약해서 오래 쓸 수 없었다. 나무로 만든 개머리판과 총상은 다 완성 되었기에 임시로 폐총신이라도 끼워서 실사격을 제외한 다른 훈련을 시켜야 할 지경 이였다.

처음에 주물로 균이 만들었던 총은 시험사격 몇 발쏘고는 금이 가서 이미 다시 녹여 서 새로운 총이 되었는데 그래도 조금 더 버틸뿐 총신에 금이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천천히 쏜다면 총신이 깨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다가는 실전에서 화력의 열세가 예상되기에 좀 더 튼튼한 총신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아예 다마스커스 총신(여러개의 금속띠을 봉에 감고 때려서 이어 만든 총신)

을 도입할 계획을 세웠는데 역시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장인들이 숙련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였다. 균은 이번에 이주한 사람들중에서 대장장이들은 반 강제로 무 기공방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주물이던 두들기던 최대한 빨리 완성할 것을 나원호 에게 독촉했다.

곧 통일된 군복도 지급될 예정이였는데 현 조선군의 군복에서 넒은 소매정도만 줄이 는 정도로 소폭 개량한 군복이다. 거기에 검은 색의 색상을 채택했는데 이는 신 군 대에 대한 다른 세력들의 반발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이였다. 지금의 군복과 너무 다 르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반발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의 복 식에서 조금 바꼈을뿐 멀리서 보면 똑같고 가까이서 보아야 표시가 약간 나는 정도 였다.

이건 별 문제는 없지만 전문적으로 군복을 만드는 공방이 작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 다. 그냥 아녀자들에게 맞기면 빠르지만 질도 떨어지고 또한 그 전의 의복개념과 약 간의 차이가 있어서 실력있는 사람들을 모아 공방을 만들어서 거기서 생산시켰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금씩이지만 군복이 개성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지만 상비군인 균의 오백여 군사는 조선내에서는 최고수준 의 병사들이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교대방포을 실사격은 아니라도 많이 습득한대다 가 플러그식(총구에 총검을 찔러넣는 초기의 방법)총검을 장착하여 접근전도 잘했다 . 특히나 돌격대장형인 임꺽정이 지휘해서인지 아니면 총을 제대로 안 사용해서인지 총검술만큼은 한국군 정규군도 놀랄만큼 능숙했다.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 비금도와 자신의 군대를 보면서 균은 이제쯤 조선조정이 혼란 에 바졌을 것으로 예상했다. 조금 있다가 조정의 대책이 각 고을 관아에 내려올 때 쯤지도의 정인기에게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조선의 역사는 조금이지만 바뀐 상태다. 외국이야 별 영향이 없지만 조선은 백과사전만 믿고 맞기에는 위험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