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을 기르다.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이곳은 조선의 모든 정책이 결정되는 중요한 곳이다. 대부분의 정무가 의정부나 비변사같은 곳에서 신하들의 의논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왕의 명이 없이는 실행되지 않는다. 특히나 중요한 일이라면 이렇게 국왕과 신하들이 조회에서 논의를 하는 것이다.
사정전안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바로 어제 토포사 남치근의 장계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장계를 수령한 관헌이 보고 놀라서 장계를 떨어뜨리고 도승지가 급히 입궐하는등 조정은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조회전에 국왕 명종에게 보고가 되었고 이미 영의정 상진을 비록해서 대소신료들이 모두 아는 상황이였다.
"영상. 이 것이 정녕 사실인가?"
"망극하옵니다. 전하."
당시의 영의정인 상진은 무려 15년간 재상을 지내고 그중 5년은 영의정으로 재직한 유명한 명재상이다. 그의 성품은 충성되고 너그러우며 도량이 매우 커서 황희와 허조 다음로 평가되는 정승으로 말년에 윤원형과 친했다는 점만 빼고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 좋은 상진의 안색이 무척이나 나빴다. 뿐만아니라 좌의정 이준경,우의정 심통원 등 조회에 참가한 모든 이들의 얼굴이 창백의 극치를 달렸다. 국왕 명종마저 당혹하여 얼굴색이 울긋불긋하니 그 밑의 신하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탁!"
명종은 화가 나서 장계를 집어던지고 앞에 있던 책상을 손으로 크게 쳤다. 그리고는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결코 쉽게 끝날 일은 아닌 듯했다.
"대체 토포사는 뭐하는 자리이길래 수백의 산도적은 물론 1만의 반역도당들이 사라지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고 하는가? 또한 황해도 관찰사와 지방수령들은 무엇때문에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것인가? 수백도 아니고 1만이 없어지는데 그것도 파악을 하지 못하다니... "
"망극하옵니다. 전하!"
"자그만치 1만의 역도들이오. 토벌에 실패했다면 그나마 이해를 하나 행방조차 모른다고 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1만의 무리라면 젊은 남자만 적게 잡아서 수천은 나오는데 그들이 무장하고 이 한성부를 들이친다면 그때는 어떻할 것이오? "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 놈의 망극망극소리하지 말고 대책을 말해보라. 대책을...! "
반란군과 1만의 백성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온이래 조선조정은 큰 혼란과 당혹감에 휩싸였다. 조선같은 행정망을 갖춘 국가에서 1만이라는 인구가 사라진것은 왜구와 여진족이 동시에 침입한 것 못지 않은 큰일이였다. 도저히 한 두명 책임을 묻고 끝내버릴 일이 아닌 것이다.
도저히 신하들은 할 말이 없었다. 명종의 말대로 무장한 수천의 무리가 도성으로 잠입해서 대궐을 침범한다면 막기도 힘들뿐더러 막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오위도총부의 편제병력은 1만이지만 실병력은 그 절반에 그나마 정예들은 남치근이 토벌대로 끌고나간 상태였다.
수도인 한성부를 지키는 병력은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 정로위등 금군과 포도청, 한성부, 의금부증의 치안 병력, 그리고 중앙군 오위가 주축이다. 이미 오위도총부가 정예군을 파병한 이상 수도의 병력은 약 4천정도. 아무리 농민군이라고 해도 그간의 임꺽정의 능력을 보면 대단히 위협적이다.
"전하, 아직 한성부에는 오천에 달하는 대군이 있으며 성곽도 튼튼하옵니다. 거기에 곧 토포사도 정예군을 이끌고 회군할 것이니 설사 적도들이 불순한 마음을 먹는다고 하여도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전하, 신 우찬성 권철이 아뢰나이다. 영상대감의 말씀이 극히 지당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신이 듣기로는 역도들은 이미 이 나라를 떠난다고 말했다고 하옵니다. 또한 적선이 상국쪽으로 향했다는 것과 황해수영과 경기수영의 장계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사실이라고 생각되옵니다. "
"신 공조참판 민기가 아뢰나이다. 이는 그간 황해도가 적국의 형세여서 제대로 조정의 명령이 서지못해 생긴 일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하지만 경기도 일대는 한성부와 가까워 반도들의 움직임을 알기 쉬우며 도성내의 장정만 몇만이나 되옵니다. 그다지 걱정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
아무래도 당시 조정의 대권을 쥐고있던 자들은 서원부원군 윤원형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는 없었고 따라서 이번 사태를 축소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 했다. 하지만 아닌 자도 있었으니 바로 중전 심씨의 외숙인 이량이라는 인물이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내년에야 공조참판겸 홍문관 제학에 중요되는 인물이지만 임꺽정의 난으로 인한 윤원형의 세력실추와 명종의 세력강화로 인해 훨씬 빨리 승진하여 조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신 이조참판 이량이 이뢰나이다. 이번의 사태는 황해도 일대의 수령방백들이 그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일어난 것이옵니다. 따라서 황해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책임자를 문책하고 새로운 인재를 그 자리에 임명하여 방비태세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
균이 예상한 것이 바로 이량의 존재였다. 중전 심씨의 외숙부인 이량은 명종의 지원을 받아서 윤원형의 견제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량도 그다지 깨끗한 이가 못 되어 윤원형, 심통원, 이량 이 세사람을 조선삼흉이라 칭할 정도로 평판이 나빠서 나중에 명종이 외관직으로 내보내지만 다시 불러들여야 할 만큼 윤원형 견제세력의 영수였다.
임꺽정의 난은 흉년과 탐관오리들에 반발해서 벌어진 반란이였다. 당연히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일파에게는 독이고 정권에 도전하는 이량일파에게는 약이다. 이량으로써는 이번 일을 최대한 물고 늘어져서 자신의 세력들을 요직에 심어야 했다. 거기에 미약하나마 명종의 어의도 있으니 일은 윤원형일파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균의 생각도 조정이 윤원형과 명종, 이량연합의 대결로 이주한 임꺽정등을 찾는 것보다는 자기들끼리 자리다툼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고 역시나 균이 생각한 바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정세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생각해 낼 정도로 뻔한 일이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과인의 생각도 이조참판과 같도다. 먼저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모든 자들을 파면조치하고 평안, 황해, 경기, 충청, 전라우수영에 명하여 적도들의 행방을 꼭 밝히도록 하라. 또한 도성과 대궐의 경비를 강화하고 이번 동지사를 통해서 상국에서 적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게라. "
"송구하오나. 전하. 그렇게 많은 이들을 파면조치하심은 자칫 수복단계의 황해도를 도탄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줄 아뢰옵니다. 시일을 두고 천천히 그 죄를 물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명종은 신하들의 반론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부러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거셌다. 영의정인 상진을 비록해 대다수의 윤원형 또는 친윤원형일파가 세력을 잡고 있는 조정이였기에 명종의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이량등도 발언을 할 분위기가 아니였다.
"그러나 그런 무능한 자들이 수령방백으로 있으니 적도들에게 농락당한 것이 아닌가? 특히 은율관아가 아예 점령당했는데 몇달동안 감영에서 전혀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는 관찰사가 책무를 다하지 않음이고 주변 고을의 수령역시 이웃고을 의 동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국가대사를 망쳤는데 어찌 그냥 두란 말인가?"
"전하, 소신들이 듣기로는 적도들이 공문을 무척이나 정교히 위조하여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실제로 소신들이 보았사온데 진짜보다 더 진짜같아서 구분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하옵니다. 전하. 황해도의 관헌들은 그 동안 적도들의 위협에 맞서 목숨을 걸고 직무를 수행해왔사옵니다. 그리하여 이번의 실수가 크다하도 지금까지의 공적을 가릴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영명하신 주상전하게서 혜안을 발휘하시여 너그러히 용서하심이 옮은줄 아뢰옵니다."
"신들도 영상대감과 같은 생각이 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친 명종은 한껏 이를 깨물었다. 이래서야 누가 조선의 왕인지 모를 노릇이였다. 아니 저 자들이 누구의 신하인지도 궁금했다. 명종은 아무말없이 앉아있는 영부사 윤원형이 가진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거대한 그림자가 무겁게 다가왔다.
'어디 두고봅시다. 서원군.'
명종은 다시 한 번 윤원형에 대한 각오을 다졌다. 그렇게 명종과 신하들간에 설전이 하루종일 오갔지만 그 날 어전회의의 결과는 명종과 이량의 패배였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명종의 공식적인 어명은 다음과 같았다.
1. 평안, 황해, 경기, 충청, 전라우수영에 명해서 적도들의 이동을 꼭 알아낼 것.
2. 적도들을 놓친 책임을 물어서 황해도 관찰사와 은율군 인근 고을수령의 봉록을 감하고 인사고과에 반영함. 단 은율군수는 그 책임을 물어서 파면함.
3. 이번에 시위번상하고 내려가는 정병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한성부의 경비에 투입함.
4. 명으로 가는 동지사편에 산동일대의 소문을 탐색하여 적도들의 이동을 조사함.
5. 순변사(임금의 특사.)를 파견하여 적도들이 이동을 수소문하고 황해도 일대의 민심을 되돌림.
먼저 조선의 중앙군인 오위도총부의 군사는 대체로 8개 제대로 나누어 교대로 서울로 올라와서 복무하고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한다. 그래서 평시에는 1만, 최대 8만의 군세를 이룬다. 이 군사들의 주거지는 지방이라서 이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군복무하는 것을 시위번상이라 했다.
회의에서 명종과 이량은 예상보다는 이득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러가지의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이는 이량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고 명종은 실망이 컸다. 황해도는 한성부와 가깝고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라서 명종의 세력들이 장악하면 큰 이득이 되는 땅인데 겨우 발만 들어 놓았을 뿐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 했기 때문이였다.
그 날 저녁 일찍 침소에 든 명종은 홀로 조용히 앉자서 오늘 회의에서의 패인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의 부재라고 생각하고는 곰곰히 자신의 친위세력이 될 만할 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먼저 중전의 가문에는 크게 두명의 인물이 있다. 중전 심씨의 작은 할아버지인 우의정 심통원은 그 권세가 크나 윤원형과 부정한 재물을 모으는 것만 겨룰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중전의 외숙인 이량은 윤원형에 반하는 인물이지만 사람됨됨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세를 모으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밖에 무관들은 상당수 명종을 지지하지만 문치국가인 조선에서 무관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무관들은 재상의 반열이 없다. 물론 벼슬자리는 있지만 그 담당자는 문관이고 실제적으로는 정3품이 최고의 관직이다. 따라서 당상관들이나 발언하는 조회에서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대부분은 문관들은 윤원형의 위세에 그에게 아부하기에 바빴다. 혹여 윤원형에게 반하는 기미라도 보이면 관직에서 쫓겨났다. 상당수의 당하관급 문관들은 윤원형에게 벼슬을 산 자들로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서 명종보다도 윤원형을 따랐다.
그렇게 명종은 밤이 깊도록 생각했지만 자신의 뒤를 받쳐줄 만한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지친 명종은 그만 자려고 자리에 누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라는 계속 큰 흉년이 들고 도적들은 일어나는데 중신들은 재물에만 열을 올리고, 세자는 글공부도 게을리하고 툭하면 아파서 누워지내니... 하.... 답답하구나. 답답해... 세자가 하성군만큼이라도 건강했다면 좋을 것을... 또 하성군의 영특함을 닮았다면 얼마나 좋을고... '
명종은 잠시 하성군 이균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영특하고 충성스럽다고 하나 고작 10살의 꼬마였고 한성부내에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하성군을 지탱해 줄 정세호일가역시 명문이지만 현재는 그다지 힘이 없었다.
'한 10년후라면 하성군에게 관직을 주어 서원군을 상대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아직은 너무 어린 꼬마구나. 허허허. 이 나라의 지존이라는 내가 고작 10살꼬마의 성장을 기다려야 하다니 그렇게도 쓸만한 이가 없단 말인가...'
명종은 쓴 웃음을 지은 채 조용히 잠이 들었다. 내일도 이번 사태로 인해 경질되거나 신설되어 남게 된 벼슬자리를 두고 신하들과의 한 판 대결이 기다라고 있었다. 명종의 용안은 계속 쓴 웃음을 띄운 채 밤새 그대로 굳어져 갔다. 아마 내일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용안이 밝게 펴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