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을 기르다.
명종 17년 (서기 1562년). 나주는 무척이나 큰 고을로 근처의 여러 군현을 관장하 는 엄청난 크기의 고을이다. 또한 자체의 식량생산과 소금생산이 많아서 부자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년에 부임한 나주목사 송순은 윤원형에게 아부를 하 고 벼슬을 받은 탐관오리였다.
작년의 살인사건과 신임목사 송순의 학정으로 나주는 뒤숭숭했다.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라면 경재명상단에서 소금을 많이 생산해서 소금간이 된 물고기를 내륙으로 많이 판매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부상들이 나주를 많이 찾아서 거리는 겨울철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나주거리를 할아버지와 손자가 걷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 곳곳에 보이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이들어 보였고 손자는 너무 어려보여 여행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스승님, 그만 주막이라도 들어가 좀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몸이 상하 실까 두렵습니다. "
"허허허, 나야 이래뵈도 건강하지만 어린 네가 더 걱정이다. "
두 조손은 사이좋게 서로를 위한 후 근처의 주막으로 들어갔다. 곧 주모에 의해서 거친 음식이 나왔지만 시장끼가 있던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먹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양반들이 저런 음식을 먹는다고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아무 상관없이 시장끼를 달랬다.
한참을 시장끼를 달래고 나서야 상을 물린 두 사람은 따뜻한 숭늉을 마시면서 이야 기를 나누었다.
"스승님, 제가 궁긍한 것이 있사옵니다."
"그래 말해보거라."
"날씨도 추운데 진주에서 먼 이곳까지 오신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허허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거기에 네가 보 면 딱 좋을 사람이지."
"대체 누구를 만나시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
"허허허, 조금만 기다려 보래도..."
어린 제자의 투정을 받아주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피로가 있었지만 무척이나 밝았 다. 하지만 이제 열 살박이 꼬마제자는 자기도 힘든 데다가 환갑을 넘긴 제 스승이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벼슬길을 떠나고부터는 친아버지나 다름 없 는 스승이였다. 동시에 자기와 혼담이 오가는 이경의 외할아버지기도 했다.
그렇게 초롱초롱한 맑은 눈에 걱정이 가득 담긴 제자를 보면서 할아버지는 머리를 쓰담어 주었다. 궁금한 제자가 계속 물어보자 할아버지는 빙그래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은 나도 오늘 처음 본단다. "
"네? 그럼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도연명이 척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니 믿어야지."
"네? 토정선생께서요?"
어린 제자는 무척이나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제 스승 은 일전에 토정 이지함을 만나본 적이 있다. 마포까지 직접 찾아가서 이지함과 대 화를 나눈 이지함을 도연명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지함의 말은 틀림이 없기로 유명했다. 하도 말이 잘 맞으니 물어보러 오 는 이가 많아서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 바로 작년의 일이다. 그런 이지 함의 말이라면 스승은 분명히 믿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주막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김형중은 자신의 최고 상관인 하성군 이균의 방문을 받았다. 일단 거래장부부터 검사한 균은 김형중으로부터 그 간 나주에서 일어난 일과 소문으로 들려오는 조선의 정세를 들었다.
"....그래서 토호들의 살인사건에 화가 나신 주상전하께서 작년 8월에 나주목사를 해임하고 새로 송순이라는 자를 임명했는데 이 송순이란 자가 나이만 먹은 소인배 인지라 모든 나주사람들이 싫어합니다. "
"나주의 정세는 됐고, 조선 전체의 정세는 들은 것이 있소?"
"예. 주상전하께서 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시여 그 대책을 호조에 물어보시었는데 호 조에서 하는 말이 아직 반납되지 않은 환곡과 체납된 세금을 강제로라도 다 받아내 자고하여 큰 소란이 있었답니다. "
"계속 흉년인데 백성들은 어찌 살라고 하는지. 지금하고 있는 불사를 중단하고 내 탕금을 돌리기만 해도 한숨은 돌릴 것을... 그리고 다른 소식은 없소?"
"또 주상전하께서 지도현을 군으로 승격하는 것를 검토하라고 하셨답니다. 아무래 도 이번에 정현령님이 다른 군현을 능가하는 많은 세금을 올려보낸 것이 재정이 부 족한 때에 큰 평가를 받은 듯 싶습니다. "
작년에 환곡과 세금으로 엄청난 양의 소금이 정인기에게 건내졌다. 무려 10만석의 소금을 한꺼번에 보내자 널널하던 정인기는 처리문제로 고심을 해야했다. 그래서 전라감영에 보고하여 대부분을 곡식으로 바꾸어 비금도로 보내왔고 세금도 빨리 그 리고 많이 올려 보냈다.
그래서인지 지도군으로의 복귀를 조정에서 논의중이라는데 이는 정인기의 승진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오랫만에 답답한 균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김형중으로부터 이야기과 보고를 듣고 나자 벌써 해가 저물어갔다. 원래는 간단히 일을 보고 오후부터는 나주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 렸다.
'아이구 배를 하루종일 탔더니 온 몸이 다 피곤하네. 애라 모르겠다. 내일부터 며 칠만 이 근처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사람들을 찾아보고 숙부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어야지. 그리고 또 무엇을 부탁할까...... '
그래서 균은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놔둔채 그 날 따라서 아주 일찍 잠자리에 들 었다.
"스승님, 그 사람이 언제나 오나요? 아무래도 오늘 오는 것은 아닐듯 한데..."
이미 해는 지고 졸음이 몰려오는 제자의 말은 평소와는 달리 어린아이의 투정이 섞 여 있었다. 나주가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철이라서 노스승의 몸에도 한기 가 찾아왔다.
"토정 이사람이 가서 하루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오늘이 아닌가보다. "
결국 노스승도 오늘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는 오늘 잠 잘자리를 얻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이 있는 나주에서 유일한 주막의 주모가 방이 없다고 하 는 것이다. 방금 보부상들이 몰려온 직후였다.
"어쩌지요? 방금 방이 다 나갔습니다."
"혹시 끼어서 잘 곳이라도...."
"오늘 이상하게 손님이 많아서..."
밖에서 떨면서 기다리던 사이 방이 다 차버렸다. 할 수 없이 스승은 졸면서 걸어오 는 제자를 데리고 근처의 큰 집들에 찾아갔다. 하지만 살인사건과 수령의 폭정으로 민심이 흉흉한 때에 타지역사람에게 방을 내줄려는 이가 없었다. 정말 낭패였다.
육십이 넘은 노인과 열살 먹은 아이가 겨울밤의 한기를 이겨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 였다.
"저 포구쪽에 두 번째로 큰 집이 있는데 그 집은 사람들 잘 재워주기로 유명하니 거기 가보세요."
큰 집들은 포기하고 작은 초가집에 들린 두 사람에게 집주인은 방이 없어서 재워주 지는 못했지만 다른 곳을 가르쳐주었다. 두 사람은 계속 추워지는 한기를 간신히 견디며 집주인이 말한 큰 집에 도착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스승은 워낙 다급한지라 '이리오너라'도 못하고 문을 두들렸다. 거기다 이미 한밤 중인 자시였기(밤11~12시) 때문에 곤히 자는 사람들을 깨우기도 미안한지라 당당한 사대부인데도 말투가 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뒤에나 자다 일어나서인지 눈을 반쯤 감은 듯한 하인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 밤중에 누구요?"
"경상도에서 온 나그네인데 이 밤중에 방을 못 구하고 있네. 잠시만 묵어갈 수 있 겠나?"
하인은 요즘들어 가장 추운날에 밖에서 반쯤 얼은 두 사람을 보고 질겁을 했다. 그 리고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추운데 어서 들어오십시오."
"고맙네."
그렇게 두사람은 간신히 방 하나를 얻어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거기에 하인이 신 경써서 따뜻한 미숫가루를 한 그릇씩 대접해 주어서 약간 주렸던 배도 채우고 따뜻 한 방에서 다음날까지 잘잤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늙어서 아침 잠이 많이 없는 스승이 밖의 나즈막한 소리에 깨 어났다. 특별히 노인이라서기 보다는 일찍 일어나서 책을 탐독하는 자신의 버릇 때 문이기도 한데 그 덕분에 어제 자신을 받아준 하인이 누군가에게 혼나는 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네가 정신이 있는거냐 없는거냐? 마님께서 계실 때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라고 하였거늘. "
"하지만 노인과 아이가 잘 때도 없이 추운 밤거리에 떨고 있기에... 거기다 어젯밤 이 올해들어 가장 추운듯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마님이 계실 때는 절대적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라고 했지 않 느냐? 문제라도 생기면 너뿐 아나라 나까지 마님의 눈밖에 난다. 그러면 어찌되는 지 잘 알지?"
"예. 정말 큰일나지요."
"일단 마님께서 모르게 조용히 대접해서 보내거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스승이 보기에 둘 다 좋은 사람같지만 그 영감마님이라는 자를 무척이나 두려워하 는 듯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담이 안가게 하기 위해서 빨리 제자를 깨워서 이 집 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집사. 또 하인들 괴롭히는구려? "
"마님, 기침하셨습니까? 뭐하느냐? 당장 세숫물 떠다 올리지 않고..."
"세숫물은 됐고, 김집사."
"예, 마님."
"손님들 방 옆에서 그만 떠들지말고 이쪽으로 와서 조용히 이야기해 봅시다."
"예....."
아까 전에는 싸움 닭처럼 당당하게 하인을 혼내고 있던 자가 기가 다 죽어서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마냥 힘없이 본채로 불려갔다. 이를 문사이로 겨우 바라보 던 스승은 이 집의 주인이 되게 무서운 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자리를 빨 리 뜨기위해서 곤히 자던 제자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아직도 피곤이 덜 풀려 고개를 끄떡이는 제자을 체통도 없이 계속 흔들었다 . 한참후에야 겨우 정신이 돌아올려는 제자를 끌고 방을 나가려는 순간 하인의 목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여기 세숫물 떠왔습니다. "
하인은 뜨거운 물이 담긴 두 개의 세숫대야와 수건들을 차례로 내려두고는 자기 주 인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저희 마님께서 아침식사를 같이 하시자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예."
집주인의 식사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상당한 모욕이기에 스승은 어쩔 수 없이 제의 를 승낙했다. 그리고 잠시후 기별이 와서 두 사람은 무서운 집주인이 기다리고 있 다는 있다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어제 저녁에는 어두운데다 춥고 배고파서 거의 볼 수 없었지만 아침에 보는 집은 그다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마당에는 다른 집에 비해서 나무와 풀밭이 많아서 제법 그의 마음에 들었다. 다만 겨울이라서 그런지 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마당을 만든 안주인만큼은 집주인처럼 무서운 인물은 아닐 것이라 생 각하니 스승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제자는 수풀이 많은 마당이 마음에 드 는 듯 자신을 따르면서도 옆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본재의 어느 방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큰 상위 에 여러가지의 반찬과 세 개의 밥과 국이 차려져 있었고 스승의 예상과는 달리 자 기 제자만한 어린 꼬마가 앉아서 방석 두개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의 눈에는 상대하기 힘든 어른이 아니라 자기또래의 아이가 있는 데다가 반찬 의 가짓수도 많고 그 양 또한 푸짐하고 맛있어 보여 무척 좋아했지만 스승의 눈에 는 오히려 더 걱정됬다. 마님이라고 불렸고 방석과 수저가 더 없는 것을 보아 저 소년이 집주인인데 도대체 성격을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소년이 나이 차이를 감안했는지 인사를 해왔다.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예. 어젯밤 오갈때가 없던 나그네를 집에서 묵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어서 앉으시지요. 아침에 아랫 것들이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저 보다 훨씬 웃줄의 어른이시니 저에게 하대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
"어리다고는 하지만 당당한 이 집의 주인이시니 객인 저희가 하대하기에는 곤란합 니다. "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스승과 제자는 어제 밤에 미숫가루밖에 먹은 것이 없던지라 맛있게 먹었다. 거기에 반찬의 가지수 도 많고 맛도 일품이였다. 아쉬울 것이 없는 아침식사였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 로 따뜻한 수정과가 들어오자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