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을 기르다.
"저는 홍...경래라고 합니다. 현재 돌아가신 선친께서 물려주신 조그마한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
균이 보았을 때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손자관계로 보였다. 두사람 다 상당한 기품 이 느껴지기에 명망있는 양반들 같았고 특히 균이 차를 대접했을 때 확실히 명문가 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다지 어릴 때 부유하지 못해서 차를 많이 마셔보지 못한 균에 비해서 두 사람은 무척 많이 마셔본듯이 모든 동작이 자연스러웠다.
균은 괜히 그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상당한 학연과 지연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양반들사이에 좋던 나쁘던 자신의 소 문이 퍼진다면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특히나 이 집이 다루고 있는 엄청난 재화를 보았다면 더욱 곤란했다.
이 때는 빨리 보내는 것이 상책인데 아까전 부하들의 이야기로 집주인인 자신이 있 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또한 아침식사는 주인이 대접하는 것이 도리라서 직접 상대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쌍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하인의 말과는 달리 두 사람 모두 보통은 넘게 보이는 양반이였다. 때문에 균은 가볍게 자신을 드러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명을 대고 대충 상대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나는 이름이 전생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인 홍길동이었다. 하지만 홍길동은 임꺽정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 이라고 생각나서 후대의 인물인 홍경래로 바꾸었다. 앞의 노인은 자신의 말을 듣고 오히려 빙그레 웃었다.
"나는 경상도 진주땅 조그마한 집에서 글자를 가르치고 있는 조식이라고 하오. 그 래고 이 아이는 내 제자인 곽재우라는 아이인데 이래뵈도 제법 글을 깨우친 아이라 오. "
"어르신께서는 연세도 있으시고 제자분은 아직 어리신데 추운 겨울날에 오백여리 길을 떠나서 나주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
균은 두 사람의 이름을 듣고 속으로는 놀랐다. 둘 다 백과사전에 언급되는 유명한 인물들이였다. 그 정도면 현재의 조선에서도 상당한 거물급이였다. 균은 속으로 긴 장을 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하지만 식은 땀이 날 것 같았다.
남명 조식. 후일 동인의 일부가 되는 북인들의 스승으로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으나 그의 명성은 퇴계 이황에 못지 않아서 영남유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특히 실 천을 중시하여 그의 제자들인 북인들은 유학자중에서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는 임진왜란때의 의병활동과 북인들이 집권한 광해군때의 정책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망우당 곽재우는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이며 황해도관찰사 곽월의 아들이다 . 조식의 외손녀 사위이며 그의 제자기도 했다. 임진왜란때는 이천명의 의군을 조 직해서 왜군의 전라도 진공을 좌절시켰고 김시민을 지원하여 진주대첩을 이끈 공로 가 있다. 하지만 선조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편으로 벼슬자리에도 별로 관 심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다지 정치적인 세력이 없다고는 하지만 균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곽재우야 어리다고 쳐도 남명 조식은 윤원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유림의 거두였다 . 조식은 균이 긴장하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평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 갔다.
"나주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이 나이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겨울날씨를 무 릅쓰고 이 먼 곳까지 왔다오."
"그럼 그 사람은 만나 보셨습니까?"
"만난 듯하나 만나지 않은 것과 같소."
"그렇다면 빨리 만나보서야겠군요."
균은 조식이 띄우는 말에 뜻에는 상관없이 빨리 조식과 곽재우를 내보내려고 했다.
그리고는 거점도 옮기고 당장 비금도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조식은 그 런 균의 마음을 아는지 뜬금없는 소리만 했다.
"공수(共水)라고 하나 공수가 아니고 목자(木子)가 아니라고 하나 목자이다. "
"...."
균은 결국 얼굴색이 변했다. 공수(共水)를 합치면 홍(洪)이고 목자(木子)는 합치면 이(李)가 된다. 즉 너는 홍씨가 아니라 이씨야 하는 소리와 같다. 균은 한 동안 말 을 하지 않은 채 조식을 바라보았다. 지금 균의 머리속에는 이들을 제거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상황이다.
"이건 내 친우가 한 말이오. 이런 말을 하면 얼굴색이 변하는 이가 있으니 그를 만 나면 된다고 하더이다. "
"...."
"그리고 그 친구가 이르기를 그를 만나면 무조건 잘보여야 한다고 했소. 잘못하다 가는 옛 고려의 장군인 최영을 만나게 된다고 하더이다. "
"... 토정선생이군요."
조식의 말이 있자 균은 이지함이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었다는 것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이지함이 알려줄 정도라면 별 문제야 없겠지만 놀림을 당한 기분이 들어 무척이나 기분이 나봤다. 누구에게 끌려다니는 듯한 기분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 였다.
그래서인지 균은 안좋은 기운을 뿌리고 있었지만 조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린 곽재우만이 두 사람의 기운에 불안해 했다. 안좋은 분위기에 조식은 수습에 들어갔다. 알고보면 자기도 피해자였다.
"결코 그대를 놀리려는 뜻은 없었소. 토정 그 사람은 아직 그대의 신분이나 무엇을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오. 그래서 어제 주막에서 기다리다가 둘이서 동사할 뻔 했는데 그것도 토정의 장난인듯 싶구려. 내가 꼭 그대 몫까지 갚아줄테니 그만 화 를 푸시오. "
"저는 전 덕흥군대감의 삼남인 하성군 이 균이라 합니다. 현재는 주상전하의 하해 와 같은 성은에 힘입어 소금장사로 연명하는 별볼 일 없는 종친이지요. 잠시나마 영남유림의 거두이신 남명선생을 속인 점은 죄송스럽습니다."
"허허허, 물론 시절이 하 수상하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지오. 이렇게 놀래키게 한 것이 더 큰 허물이외다."
조금씩 분위기는 다시 풀렸다. 균은 다시 주안상과 다과상를 준비하여 어린 곽재우 는 다과를 주어 먹게하고 자신은 조식과 먼저 술을 한 잔씩 기울였다. 하지만 술보 다는 이야기가 주 목적인데다가 또 '완산'사건이 일어나면 곤란하기에 술은 단 한 병만 들였다. 대신 안주는 푸짐하게 들여서 조식과의 장기전에 대비했다.
"전주의 명물인 이강주이옵니다. 먼저 제 술 한잔 받으시지요. "
"허허허, 이거 주상전하의 총애를 받으시는 하성군영감께서 따라주시는 명주이니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지 않을 것 같소."
"토정선생이 저를 만나서 무엇을 하라 하셨습니까?"
균은 둘이서 한 잔씩 마신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 물어보고 싶지 만 지금은 조선시대였고 상대는 자기보다도 높은 대접을 받는 남명 조식이였다. 하 지만 이정도도 남명 조식이니까 꺼낸 것이다. 균은 남명 조식이 직설적으로 표현하 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역시나 하성군영감께서 나하고 비슷한 성격인 것 같구려. 다른 사대부라면 지금쯤 시구절에 대해서 논하고 있을 터인데... 사실은 저 아이를 맡기로 왔소."
"스승님!"
스승인 조식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곽재우는 입에 들어있던 과자부스러기가 나오는 지도 모른채 입을 벌리고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식은 그런 곽재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균에게 말했다.
"내 나이 벌써 육십이 넘어 어느정도 사람이 사는 도리는 깨우쳤으나 백성들을 평 안하게 하는 법은 하성군영감의 반도 못 따라가는 처지요. 저 아이는 아직 어린데 다가 총명하니 하성군께서 거두어주시오. "
"저도 아직 앞가림을 못하는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어찌 남명선생께 비교나 되 겠습니까?"
"토정 그 사람이 이르기를 퇴계와 나, 그리고 율곡이라는 자를 합쳐도 하성군을 따 를 수 없으며 내가 사백년은 더 공부해야 하성군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하 였소. 마음같아서야 나도 배움을 청하고 싶지만 그 공부가 다른지라 대신 내가 아 끼는 아이를 부탁하는 것이오. "
조식은 상당히 직설적인 인물이다. 명종이 내린 벼슬을 거부하면서 왕이 정치를 못 해서 나라가 이 모양이라는 상소를 올리는 정도의 인물이었다. 이제는 고작 열 살 의 하성군에게 자신이 부족하다면서 동갑의 어린 제자를 넘겨주려고 하고 있었다.
균은 이 사람이 정말 유학자인지 고민을 해야했다.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자. 더욱 공부에 정진할 것이니..."
"재우야, 어린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란다. 다 스승인 내가 부족한 것이다. 내가 배운 학문으로는 우리가 오면서 보았던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던 백성들을 구원할 수 없느니라."
"하지만 스승님..."
"이 나라에는 지금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도리가 필요하단다.
그리고 그 도리를 먼저 깨우친 이가 바로 여기 하성군영감이시다. "
"...."
곽재우는 스승앞이라서 그런지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균은 아무리 이지함이 자 기를 높게 평가했다고는 하지만 어린제자를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조식의 머리가 궁 금했다. 곽재우의 머리를 쓰담어주던 조식은 하성군에게 말했다.
"하성군께서는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
"돈입니다."
"..."
조식은 어이가 없는듯 균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식 자신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대답이였다. 조식이 추가대답을 원하는 듯 균을 계속 바라보자 균은 더 대답해주었 다.
"우리 조선은 겨듭되는 흉년으로 곡식을 살 돈이 없는 많은 백성들을 굶어죽습니다.
거기에 비싼 세금을 내느라 춘궁기를 못 넘기는 이가 허다합니다. 가난한 이는 옷 살 돈이 없어 얼어죽고, 약 살돈이 없어 병들어죽으며 세금낼 돈이 없어 집을 빼앗깁 니다. 비싼 고리대금을 이기지 못하고 딸을 빼앗기며 그 다음해에는 땅을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합니다.
군포를 낼 돈이 없어 군대로 끌려가 소식이 없고 세금대신 부역을 하느라 농사을 짓지못해 굶는 일은 일도 아닙니다. 세금과 이자를 야반도주로 피하려하나 이 역시 굶어죽거나 지쳐서죽고 병들어 죽으며 남은 집들은 이들의 몫까지 내느라 허리가 휩니다. 그리고 유민들이 화적이 되어 없는 재산을 축내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겠습 니까?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현재의 조선에서는 돈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돈이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는 수많은 백성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도리란 임금이 백성을 아끼고 관리가 선정을 배풀고 백성들이 게으 름을 부리지 않는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굶어죽는 사람에게 주는 죽 한 모금, 병들 어 죽어가는 이에게 주는 약 한첩이 도리보다도 백성들에게는 소중합니다. "
조식은 자기보다 더 직설적인 사람을 오늘 처음 보았다. 마치 백성들의 삶을 옆에 서 본듯이 읖어대니 돈이 있다면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당장 반박하고 싶어서 생각해보니 자신의 생각이 자기랑 비교되던 이황같은 이들의 주장과 다를 봐가 없 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이 돈이라는 것만은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균 이 알아서 자기의 말을 반박했다.
"하지만 돈보다 더욱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희망이지요. 이번만 넘기면 보다 나은 세상이 온다는 희망만큼 사람들을 힘이 나 게 하고 용기를 북돋는 것은 없습니다. 돈은 단지 이 희망을 부르기 위한 수단입니 다. 희망이 없다면 몇십 만냥이 있어도 사람들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 에는 사람들을 살릴만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희망을 부를 돈이라는 수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
"희망이라...."
조식은 희망이라는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머리에는 왠지 이지함의 말 이 떠올랐다.
'깜깜한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고나 할까? 등불은 등불인데 돈을 무척 좋아하는 등불이겠지요. '
'그렇다면 어두운 현실을 바로 이끌 새로운 희망이 되겠다는 말인가? 돈이라는 수 단을 통해서..'
조식은 이지함의 말이 떠올랐다. 돈이 가장 필요하다는 말에는 찬성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균 역시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간 것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남명 조식같은 사람이라도 돈돈거리면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잠시후였다. 하지만 현재 조선은 돈이 가장 필요했다. 최소한 사람을 살려야 도리를 세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였다. 이는 전생에서의 여러경험도 한 몫했다. 전생에서는 돈이 세상의 전부 였으니...
하지만 돈이 전부인 세상을 만들더라도 앞에서 굶어서 쓰러지는 사람이 없게하는 것이 더 낮다고 균은 생각했다. 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나은 법이다. 일단은 사람들 을 살아야 뭐든 하지않겠는가? 그래서 균은 담담하게 물었다.
"이래도 제자분을 맡기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