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을 기르다.
한참을 이동하던 시마즈 이에히사는 점차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문득 조선의 영물 이라는 호랑이가 있는가라고 생각했지만 이 곳은 섬이다. 호랑이는 커녕 늑대도 있 을지 의문인 곳인데 저렇게 이상한 기운이 감돌리가 없다. 하지만 이상한 기운은 이에히사만 느꼈을뿐 굶주림에 지친 자신의 병사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조선의 마을을 고대하며 힘없이 걷고 있었다.
'이상해. 이런 섬에서 저런기운을 내는 동물이 있던가?'
이에히사는 병사들을 정지시키고 자신의 칼을 뽑아든 후 주변을 살피었다. 이미 해 가 지평선에서 모습을 들어내는 시간이라 시야가 넓지는 않지만 이상한 기운과 조 총병들의 화약냄새정도가 이에히사의 신경을 건드는 전부였다. 그리고 굳이 하나 더 찾는다면 뱃속의 배고픔일 것이다.
'며칠을 굶었더니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군.'
이에히사는 이상한 느낌을 무시하고 계속 안쪽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멀리 약간의 연기가 보이는 듯하여 마을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이에히사는 물론 병사들의 발걸 음이 무척 빨라졌다.
그무렵 서유생등이 이끄는 총병대는 후속부대가 계속 도착하여 그 군세가 늘고 있 었다. 이미 균과 임꺽정의 궁병대가 근처 숲에 매복하고 있었고 왜구의 앞을 가로 막는 총병대의 군세도 이백이 넘어서 굶주린 보병 백여기정도는 일제사격 한 번으 로 박살낼 수 있는 상황이였다.
"서초관님, 왜구들이 빠르게 접근중입니다."
"사수 탄약 장전!"
이번에는 교대방포대형이 아닌 이열종대로 늘어선 총병대가 장전을 시작했다. 신속 히 장전한 총병들을 모두 앉은 채로 적을 기다렸다. 이제 왜구가 저 언덕만 돌면 바로 총병대의 정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왜구들이 모습 을 들어냈다. 역시나 듣던대로 작은 몸집에 피로해 보이는 자들이였다.
"사수 화승에 점화!"
이백여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화승에 불을 붙였다. 아침이슬에 불이 잘 안붙어서 다 시 붙이는 자들도 있지만 관리를 잘 해둔지라 전부 화승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전방을 막고있는 경비대를 눈치챈 왜구들은 크게 동요했다.
"이런 조선군이다. 거기에 철포까지..."
냉정해야할 지휘관인 이에히사마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언덕을 돌아서 마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던 그들에게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일본내에서도 희귀한 철포로 무장한채 사격대형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공포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에히사는 이 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병사들을 수습했다.
"조총대 사격준비! 나머지 병사들도 돌격을 준비하라! 살고 싶으면 어서 빨리 움직 여. 어서!"
"왜장이 꽤하는 놈인가 보군. 이거 예상보다 재미있을지도... 후후후."
이에히사가 사기가 바닥난 왜구들을 수습해서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을 보던 균은 이미 승산없는 싸움인데도 발악을 하는 어린 왜장을 보면서 여유있게 웃었다. 그런 균을 뒤에서 보던 박수익은 자기도 1년전에 균에게 놀아났던 선배의 입장에서 어린 왜장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아무리 불쌍해도 상대는 잔악한 왜구이기에 균 이 어떻게 요리를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왜구의 진형이 완성되고 전방으로 조총병들이 넓게 포진했다. 하지만 조 총의 최대 유효사정거리인 200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아군 총병대가 위치하고 있고 그보다 훨씬 가까운 균의 궁병대는 산에 매복해 있는 상황이리서 왜구의 공격은 그 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왜선의 후속지원대를 걱정할 뿐이나 이 역시 척후병들 이 감시중이였다.
그렇게 균의 경비대가 왜구의 공격을 기다리는 사이 왜구 조총병의 장전이 끝났다.
이에히사는 조총의 일제사격후 돌격을 준비하고 조총병들에게 사격을 명령했다. 조 총병들은 조총이 폭발할 위험때문에 다른 병사들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사격자세를 잡았다.
"조총대, 쏴아라!. 나머지는 나를 따라서 조총대의 사격이 끝나면 돌격한다. 꼭 이 겨서 집으로 돌아가자. "
"탕~! 탕탕~!"
수도 적은 데다가 일제사격도 아닌 왜구의 조총소리는 경비대병사들에게 아무런 위 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화력의 절대열세를 보여주어 아군병사들의 사기만 올려 주었다. 간혹 서유생의 총병대까지 날라오는 총알도 있었지만 두터운 군복과 철갑 방패에 뜅겨져나갔다.
"마마. 별 위협은 안 되지만 그래도 모르니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나 부상자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던 박수익의 말에 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준비를 했고 조총 사정거리 밖이지만 눈먼 총알에 다치는 병사가 생길 수도 있기에 균은 근처의 궁병들에게 지폭의 발사를 명령했다. 하지만 백명이 모두 발사 했다가는 일대가 쑥대밭이 될 판이라서 약 1개 기(30여명)정도만 화살을 발사시켰 다.
"제 1기만 지폭이 달린 화살을 쏘아라. 적의 살상이 목표가 아니라 교란이 목표이 니 잘 조준하도록."
지폭은 기름을 먹인 종이로 감싼 화약인데 화포가 없는 경비대가 가진 유일한 원거 리 화약무기였다. 유탄처럼 사용하지만 각궁이 아닌 일반적인 조선활을 쓰기에 사 거리는 200미터 이내로 제한되고 또한 죽통처럼 내부에 철부스러기도 못 넣고 화약 의 무게도 제한되어 위력은 약하다. 그러나 지금 왜구의 대열을 무너뜨리기에는 충 분하다 못해 남아도는 지경이였다.
"꽝~! 꽝~!"
전방의 아군만을 바라보던 왜구들은 옆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폭발하자 혼비백산하 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왜구가 있던 자리는 지폭이 터지면서 생긴 연기로 휩싸였다 . 이를 보던 균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적의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제 2기는 적이 도주하지 못하게 약간 뒤쪽으로 일제히 쏴라. 왜구을 아군 총병대 사거리 안으로 밀어넣는거다. "
"꽈과광~!"
지폭들이 일제히 왜구의 후방에 낙하했다. 이번에는 지폭들이 거의 한 곳에 집중되 어 폭발하는 바람에 왠만한 화포가 터진 것 못지않게 큰 폭발음과 불꽃이 치솟았다 . 저정도라면 미친 놈이 아닌 이상은 뒤로 도망가는 놈은 없을 것이라고 균과 매복 부대원들은 생각했다.
"우와~!"
잠시 날아오던 적의 총탄에 방패뒤로 몸을 숨겼던 총병대 병사들은 화려한 불꽃놀 이에 탄성을 질렀다. 이미 화약터지는 것은 지겹게 보았지만 일시에 저렇게 많은 폭약이 사용된 적은 없었고 또한 당하는 적이 왜구들인지라 마음편히 구경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장수들은 혹시나 왜구가 이판사판으로 공격해오지는 않을지 걱정이 컸다.
정확히는 적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까운 노예들이 줄어 든다거나 아니면 더 아까운 소총용 화약의 소모 때문이였다. 물론 그들의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였다.
화약의 연기가 바람에 날아가자 검게 그을린 왜구들이 기침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돌격은 커녕 제 몸도 가누지 못한채 땅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고 어떤자들은 폭발에 놀랐는지 정신을 잃고 멍하게 있었다. 왜장마저 혼란에 빠져있 으니 왜구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마마. 당장 왜인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영장, 조금만 더 기다리시요. 곧 적의 후속대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소. 그들마 저 잡고 배를 빼앗는 것이 목표이지 이미 전의를 잃은 자들을 잡는다고 성급하게 매복부대를 들어낼 필요는 없소."
균의 판단대로 배에 남아있던 이주인 다다무네는 이에히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폭발음이 들리자 기겁했다. 마음같아서는 도주하고 싶지만 물과 식량이 없 었다. 설사 돌아가더라도 이에히사를 잃은 책임을 지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럴 때는 죽더라도 가보는 수밖에 없었고 바로 약 50여명의 잔여병력을 모아서 상륙했 다.
한참을 이동한 다다무네가 본 것은 곳곳에 널부러진 병사들과 망연자실한 이에히사 였다. 그리고 그 뒤로 더 가까이 접근한 삼백명에 가까워 보이는 조선군 조총부대 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부대가 보이지 않으니 다다무네는 착각을 했다.
저 조선군이 자신들의 선발대를 저 꼴로 만들었다고 말이다.
"어떻게? 우리 일본에도 많이 없는 조총부대가 조선에 있다니... 그리고 조선조총 의 위력이 작은 화포에 못지 않다니... 남만상인(서양인)놈들이 먼저 조선에 조총 을 팔아먹었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저렇게 약한 조총이나 비싸게 팔고? "
군데군데 파여진 지폭의 흔적을 조선군이 가진 조총같은 병기가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가뜩히나 기운이 없던 다다무네는 온 몸에서 힘이 다빠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인 조총이라도 300정이면 아무리 명중률이 낮아도 자신과 50명의 병사들을 괴멸시키기에는 충분한 전력이였다. 그 때 옆의 숲에 숨어있던 매복부대가 함성을 지르며 모습을 들어냈다. 그리고는 이상한 발음이지만 일본어로 일제히 외쳤다.
"무기를 버려라! 죽이지는 않는다!"
이제 확인된 적병력만 거의 오백명. 그리고 다다무네의 병사는 오십명. 거기다 다 다무네의 병사들은 대부분 칼이나 창으로 무장되어 원거리 공격은 엄두도 못낸다.
선발대 백여명중 대부분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고 용 맹한 소년장수인 이에히사 역시 저항할 의지따위는 보이지 않고 간신히 칼로 몸을 지탱한채 멍하게 서있을 뿐이다.
'아! 기껏 선택한 섬이 조선군 정예병사들이 주둔한 곳 이였을 줄이야. 일본의 당 당한 무사에서 이젠 조선의 노비로 살아야 하는가?'
"...무기를 버려라."
다다무네도 들고있던 일본도를 땅에 던졌다. 싸워도 죽고 도주해도 죽는다. 이제 겨우 16세의 어린 나이로 죽기에는 해보고 싶은것이 너무 많았다. 조선인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살더라도 일단 사는 것이 낮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장인 다다무네가 칼을 버리자 병사들도 차례로 칼을 버렸다.
다다무네가 조선군으로 착각한 경비대는 즉시 대열을 유지한채 왜군에게 다가왔다.
원래대로의 팔팔한 왜구라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겠지만 지친채 싱겁게 무릎을 꿇어버린 왜구들이였다. 왜구들은 차례로 경비대에 포박되었고 곧이어 파견된 병사 들도 무사히 왜선을 장악했다.
먼저 포로로 잡힌 왜구만 약 150여명에 배에 남아있던 왜구들은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고 노를 젓는 자들도 대부분 일본인이고 소수의 중국인들이 존재할 뿐 조선인 은 아무도 없었다. 균은 이들도 모두 포로로 취급하기로 했다. 조선군이라면 중국 인들은 명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지만 이를 균이 지킬 필요는 없었다. 단지 비 금도를 침입하다 잡힌 이민족포로일 뿐이다.
막 아침을 먹고 일터로 나가려던 비금도 주민들은 왜구들을 포박한채 병영으로 복 귀하는 경비대를 보고 모두 환호성을 올렸다. 저렇게 수많은 왜구들을 퇴치할 정도 의 강한 병사들이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였다. 경비대가 지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환호와 감탄이 울려퍼지니 비금도 전체가 떠들썩했다.
일단 병영으로 돌아오는 균은 먼저 포로들에게 식사를 넉넉히 주도록 명했다. 동시 에 경비대병사들도 늦은 아침식사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며칠이나 굶주리던 포로들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식사에 모두 입을 벌렸다. 심지어는 항복한 것이 잘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포로도 있었지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밥만 계속 입안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배불리 먹인 포로들을 임시로 창고에다 넣어 잠을 자게 하고 병사들도 경계병력을 빼고는 모두 자게했다. 하지만 균과 각 부장들 그리고 장수들은 본단회의실에서 뒷 처리를 하느라 눈이 뻘게질 정도였다.
"마마. 승전을 경하드리옵니다."
"승전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소? 거의 패잔병들을 놀라게해서 항복을 받은 것뿐이니 굳이 말한다면 이삭줍기라고 해야겠소. 하지만 수고한 장수들과 병사들에게는 약간 의 상금을 주어서 그 노고를 달래주시오. "
"예, 마마. 한데 포로들이 수백이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생각은 하셨습니까?"
"대부분은 좀 위험한 일에 우리 주민들대신 투입할 것이오. 쓸데가 많으니 포로들 중 다친 자들을 치료해주고 밥을 많이 먹여 빨리 기운을 차리게 하시오. 그리고 냄 새가 많이 나니 전염병을 대비해서라도 빨리 씻기는 것이 좋겠소."
"예, 마마. 석감을 주어 깨끗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포로들중 유식한 자를 골라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몇몇 아이들에게 명과 왜의 말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나중에 왜의 말과 명의 말을 하는 이가 필요할듯 하구려. "
"하오나 특별히 아이들에게 가르칠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우리 비금도의 주 거래대 상은 조선본토가 아니옵니까? 또한 우리가 다른나라들과 함부로 교역하기는 여러가 지로 곤란합니다. "
"박부장, 지금은 필요가 없겠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더욱 성장하면 명이나 왜국과 접촉할 일이 많아질 것이고 그때는 외국의 말을 안다는 것은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다음을 위해서 꼭 양성해 두시오. 그리고 유식한 자들을 찾는 김에 왜국과 명국의 정세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런데 마마. 왜선을 보수하기가 곤란하다고 들었습니다. 포로들중 일부를 빼내서 보수작업에 동원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수백이나 되는 무리이니 노예로는 충분한 수일 것이오. 그 것은 나부장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리고 마마, ...."
이렇게 균등이 포로처리문제로 잠도 못자고 바쁘게 논의하는 사이 이에히사와 다다 무네는 자신의 칼을 빼앗긴 채 창고구석에서 앞으로의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 걱 정을 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대우는 좋았지만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보 나마나 노예로 부려지다가 차례로 죽어갈 것이다.
배가 부르니 자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망할 놈의 류조지놈들에게 복수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듯했다. 또한 남만인(서양인)들이 조선에 강력한 조총을 팔았다는 사실도 알려 시마즈가의 세력이 함부로 조선근해에서 노략질하지 않게 알 릴 의무도 있었다.
친구관계인 이에히사와 다다무네는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힘없이 웃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신세가 처량해서일 것이다. 잠시후 창고로 조선군들이 들 어와서 자고있던 포로들을 깨웠다. 조선군들은 포로들을 차례로 줄을 세워서 무엇 인가를 물어보고는 책에 적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