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28)

 청혼을 받다.

명종17년 서기 1562년 가을철의 조선. 하지만 가을의 풍성한 수확은 온데간데없었 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한 수확량의 감소와 탐관오리, 부자지주들의 횡포로 일반 적인 농민들은 수확한 햇곡식을 대부분 빼앗겼다. 추석제사상에 올릴 곡식도 부족 할 지경이니 내년의 보릿고개가 걱정될 뿐이다.

이러한 농민들을 보면서 상경하는 균은 점차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재력을 총 동원하면 조선의 모든 백성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한 수의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조금만 더 참는다면 조선의 모든 백성 들을 마음껏 구원할 수 있기에 소탐대실의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 부러 그들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을 타고 한성부로 향했다.

비참한 조선농민들을 보면서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보려 균은 올해 있었던 좋은 일 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작년이 총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고 내실을 다 진 해였다면 올해는 남명학파와의 제휴, 시마즈와의 교역개시등 그 내실을 바탕으 로 여러 우호세력과 연계한 해였다.

이정도면 자신의 마음에는 차지 않지만 최소한의 독립적인 세력기반은 완성되었다 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지난 1년 반의 세월동안 균의 세력은 성장했다. 단순히 군사 력만 비교해도 재작년의 고작 수십 명의 치안대에서 작년에는 오백 명의 경비대로 성장했고 올해도 대대적인 모병을 통해서 1천명의 병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쯤 신규병력을 모집하고 훈련하느라 임꺽정과 서유생이 정신이 없고 소 총과 화약의 수출물량과 자체소비물량을 무기공방이 소화하지 못해서 매일 야근일 것을 생각하니 지금 유유히 한성부로 올라가는 균은 그들의 고생에 내심 미안해졌 다. 거기다 이제 시작이었다. 최소한 균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전까지는 음지 에서 고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느끼는 바였지만 한성부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평탄한 평야지대인데도 길은 언제나 부실하고 화적 때의 출몰은 매년 늘어나 균의 한성부 행을 막았다. 이 제 말을 타는 것이 어느 정도 늘고 벼룩 등에 대한 대처법이 발달해서 여행이 불편 한 것은 없지만 이런 치안의 부재현상을 지켜보는 균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다행히도 균은 호위 병력으로 최정예병사 십여명를 이끌고 왔다. 그래서 덤비던 화 적패들은 다 최영앞으로 보내주었지만 이들 중 대부분이 선량한 백성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마음은 내심 편치 못했다. 그래도 화 적들이 다른 선량한 백성들을 해치게 하는 것보다는 낮기에 균은 마음을 다잡아먹 고 명을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려서야 균과 하인으로 위장한 호위대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로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수도인 한성부마저도 흉년의 여파로 물가가 많이 올라서인지 일반 사람들의 얼굴에는 시름이 가득했다. 거기에 가을의 쓸쓸함마저 겹쳐서 인구 20만의 대도시 한성부는 황량한 느낌마저 들었다.

균이 먼저 들린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숙부 정인기의 집이였다. 올해 초에 정인 기가 지도현령으로 나가는 바람에 태어난지 몇 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없어 서 홀로 외로이 지내는 자신의 막내 외숙모를 먼저 찾은 것이다. 물론 엄청날 정도의 선물을 싸들고 찾았다.

"숙모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래."

"...."

간단한 인사치레를 제외하고는 균과 숙모사이에는 별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숙모의 입장에서는 자기 서방을 빼앗아간 조카가 마음에 들리는 없다. 그것도 첫 아이가 태어나 부부간의 금슬이 가장 좋을 때 빼앗아 갔으니 속으로는 원망을 할지도 몰랐 다. 균은 아무래도 분위기가 안 좋은 바람에 보고 싶어하던 제 사촌여동생도 못보 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모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

균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하긴 자기가 숙모입장이라도 반기지 는 않을 것이었다. 제 서방이 집안일을 제처두고 조카 돕는다고 난리인데다가 이제 는 아예 그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서 아기 첫 돌은 물론 이번 추석 때도 못 오는 상 황이니 아무리 선물을 싸들고 와도 제 서방보다 좋을 리는 없는 것이다.

어느덧 균이 집 근처에 다다르자 멀리서 비단옷을 입은 소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 다. 균이 아는 한 이 근처에서 비단옷을 입고 뛰어다닐만한 소녀는 균의 유일한 여 동생 진이밖에는 없었다. 특히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소녀라면 더욱 그랬다.

"균이 오라버니~!"

전생이였다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진이지만 조선시대라면 양반집 딸 아이답게 조숙하게 걸어다니며 수를 놓거나 한글이나 한문을 공부해야 할 텐데 진 이는 어릴 때 자유분방한 균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는지 일반 평민들의 딸들보다 도 더했다. 하지만 균의 눈에는 귀엽기만 한 동생이었다.

"그래 우리 진이구나. 그런데 다 큰 처녀가 이렇게 뛰어다녀서야 되겠니? 앞으로는 어머니처럼 천천히 걸어다니거라."

"네. 오라버니."

그래도 작년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해서 균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1년 반만에 보는 집이지만 특 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홀로 집안을 이끄시는 어머니와 병약한 두 형, 집안의 몇 안 되는 하인들까지 3년 전 아버지 이초가 죽은 이래 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오랫만에 보는 막내아들이 몸성히 잘 자라준 것에 감사셨고 두 형들도 동 생의 귀가를 무척이나 반겼다. 더욱이 균에게서 생활비로 다시 수천냥을 건네받은 정집사는 막내도련님의 고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균은 가족들과 떨어져서 걱정을 주는 것이 미안했지만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꾹 참았다.

그래도 아직 추석까지는 며칠이 남은지라 얼마 안 되는 기간이라도 밖에 나가지 않 고 가족들과 어울려 지냈다. 사실은 밖에 나갈 일이 없기도 했다. 두 형들도 잠시 서당에 안 나갈 정도라서 단 며칠의 짧은 기간 이였지만 균의 가족들은 오랜만에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비싼 물가와 주위의 눈 때문에 추석차례를 간소하게 지낸 균의 가족들은 바로 경복 궁으로 입궐했다. 명종이 추석명절을 핑계 삼아서 종친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정 확히는 균을 부르고 싶어했다. 하지만 대비 윤씨의 엄명이 있는 상황이라서 이렇게 같이 입궐시키는 방안밖에는 없었다.

"허허허, 오랜만에 한가위기도 해서 그대들을 불렀소. 자!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 고 마셔봅시다. 무산군대감, 어서 과인의 술을 한 잔 받으시오. "

"예. 전하."

"허허허. 그대들도 음식들이 식기전에 어서 들도록 하시오."

"예. 망극하옵니다. 전하."

역시나 대궐의 수라상이라서 그런지 음식들이 화려했다. 이번에 명종이 제법 신경 써서 종친들을 대접하는 듯 했지만 오히려 균은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지 금은 그나마 가을철인데도 굶주리는 백성들이 허다한데 정작 내년 봄의 보릿고개에 는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다.

'하! 여기있는 음식만 잡곡으로 바꾸어 죽을 쑤어먹으면 최소한 한 마을사람들이 굶어죽지는 않을 텐데...'

균은 한숨을 내쉬고는 조금씩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균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명종이 보았다. 명종도 대강 균의 한숨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종친들의 대부분이 넉넉하지 않게 사는지라 이런 날이라도 잘 먹으라고 일부 러 좀 과하게 차린 것이었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고 종친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역시나 균은 세자 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처지였다. 다른 종친들이 끼어들려고 해도 세자가 상대를 안해주니 자연스레 두 사람만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어느덧 균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세자저하, 알까기는 여기서 하면 제가 무척 곤란합니다. "

"궁녀들이나 내관들과 해보았지만 역시 하성군만한 재미가 없었다오. 그럼 그것은 나중에 하고 우리 간단하게 할 놀이가 없겠소? "

"그...그게..."

할 놀이야 많다. 하지만 상당수가 세자와 신체접촉을 요하는 놀이이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자의 손에 작은 상처라도 나면 끝장이다. 그러다가 하나 좋은 놀이가 생 각났다. 신체접촉은 물론 멀리서 본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놀이. 바로 끝말잇 기였다.

"방저원개."

"개과천선."

"선견지명."

"명경지수."

"수어지교."

"교....하성군. 수어지교라면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성어가 아니오?"

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답게 세자는 자기가 막히자 비장의 특기 말 돌리기로 나왔 다.균은 속으로 잘 걸렸다고 생각했다. 균은 전생에서 삼국지소설, 게임을 많이 한 매 니아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자의 의도대로 끌려가기는 싫었다.

"그러하옵니다. 유비현덕이 제갈공명을 지칭한 말이지요. 자세한 야사는 영명하신 세자저하게서도 아실 것이니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 갑고 소중한 상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수어지교 다음에는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 셨습니까?"

"그게... 그게 말이요."

"세자와 하성군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느냐?"

균은 삼국지이야기로 흐를 뻔한 대결을 세자의 지식을 칭찬하는 듯하며 다시 끝말 잇기의 승부로 돌렸지만 난데없는 명종의 난입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세자는 자신 을 구해준 명종을 무척이나 반기면서 말했다.

"소자. 하성군과 옛날 고사성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

"오! 그래. 허허허. 그럼 무슨 고사성어들을 이야기했는고?"

"삼국지연의의 수어지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그러한가? 삼국지연의라, 유명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지. 그래, 세자와 하성군은 삼국지의 군주들중 누구를 가장 뛰어난 군주라고 생각하는고? "

명종의 갑작스런 질문에 세자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유비현덕이옵니다."

"그 연유는 무엇인고?"

"먼저 유비현덕은 후한제국의 정통을 이은 촉한의 황제이고 인덕으로 많은 충의지 사를 거느렸으며 또한 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죽은 인물입니다. 그의 아들인 유선때 잠시 촉한이 망하지만 유비의 후손인 유연이 다시 한을 세워 역적들을 멸하 니 최후의 승자인 한의 황제 유비가 가장 뛰어난 군주입니다. "

"그래. 우리세자가 참으로 잘 아는구나."

균은 입이 간지러운 것을 참았다.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이 쓴 역사소설이다. 진실이 7이고 거짓이 3이라고 하는 데 그 거짓중에 하나가 사마염의 진을 멸망시키는 한의 유연이라는 인물이다. 원래 유연이라는 자는 흉노족이다. 그러니 유비의 후예가 될 수 없는데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나관중이 촉한의 완전한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 유 비의 후손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래. 그럼 이번에 하성군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소신은 오나라의 손권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오나라의 손권이라? 참으로 특이한 생각이구나. 연유가 무엇인고?"

"예. 손권이 다스리던 오는 제 형인 손책에게서 이어받은 땅이옵니다. 손책은 아비 손견이 죽은 후 모든 기반을 잃고 다시 시작하여 강동을 얻었으나 대신 많은 호족 세력들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두 나라는 강력한 제후세력이 없었던 반면 손권은 호족세력과의 많은 대결 속에서도 삼국중 가장 오래 지속된 오나라를 세우고 그 기틀을 마련하였기에 소신은 그리 생각했습니다. "

명종은 한동안 말을 하지않고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균에 게 계속 물었다.

"그렇다면 손권의 신하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은 신하라고 생각하느냐?"

"황개라고 생각하옵니다. "

"주유나 노숙, 육손 같은 명신들이 있는데 왜 황개를 택했는고?"

"황개는 손견때부터 손씨일가가 힘들고 위험할 때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중 에 늙어서도 고육지계를 위하여 젊은 주유에게 채찍을 맞고도 성치 않은 몸으로 적 벽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상대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최고의 신하라고 생각 하옵니다. "

"하하하. 그래 하성군의 말도 잘 들었다. 세자와 하성군의 말이 모두 다 맞는 말이 구나. 둘 다 어린 데도 훌륭하니 과인이 무척이나 기쁘다. "

명종은 두 소년을 한참이나 칭찬했다. 명종의 용안에는 무척이나 기뻐하는 표정이 보여 주변의 종친들과 중전 심씨도 영문을 모른 채 같이 기뻐하였다. 자리가 파하 자 명종은 하성군에게 명나라에서 직수입된 비단 몇 십 필이나 하사하여 주변의 사 람들이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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