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을 받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균은 비단을 사양하지도 않고 받았다. 이렇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값비싼 비단을 내리는 명종과 예의상 사양을 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낼름 받아 챙기는 균을 보면서 종친들과 중전은 무척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명종과 균은 무척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궁에서 돌아온 균은 그 비단들을 쓰지 않았다. 명종이 내려둔 비단은 자기의 방에서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잘 보이게 보관하고는 따로 비단을 사서 모든 가족들에게 비단옷을 한 벌씩 지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받은 비단을 안 쓰고 다시 사서 쓰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마도 하사품을 아끼려고 그랬다고 생각하였다.
선전관 심성태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명종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그래서 중전 심씨가 몇 번이나 물어보았지만 명종은 나중에 알려주겠다는 말만하고 자신의 속뜻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 신첩은 도대체 그 귀한 명나라 비단을 하성군에게 주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사옵니다."
"허허허, 중전께서도 비단이 탐이 나서 과인에게 투정을 부리시는 게요? "
"전하. 신첩이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만은 그날의 일이 하도 이해가 되지않아서 밤잠을 다 이루지 못할 지경이옵니다. "
"하하하. 나는 총명한 우리 중전이시라면 다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하하하."
명종은 중전 심씨가 자신의 말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무척 좋았다. 중전에게 한방 먹였다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이 의도한 대로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명종은 그 사실을 기뻐하면서 중전에게 사실을 설명했다.
"마침 세자와 하성군이 삼국지연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소. 중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삼국지연의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의 중국의 역사를 다룬 소설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지만 많은 영웅과 인물을 잘 그려낸 소설이오.
그래서 내가 삼국지의 수십 명이나 되는 각기 다른 군주들중 어느 인물이 가장 훌륭한 군주인가라고 물으니 세자는 촉한의 유비를, 하성군은 동오의 손권을 각기 선택하였소."
"그럼 우리 세자가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삼국지의 최고의 군주라면 한제국의 정통 후계자이며 나중에 사마염의 진을 멸망시키는 유연의 선조인 유비가 아니옵니까? 또한 오의 손권도 위의 조조보다는 낫지만 역시 일개의 제후로 황제를 칭한 자입니다. "
"하하하. 중전의 말도 옳고 세자의 답도 옳소. 하지만 나의 뜻은 그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조선의 군왕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삼국지의 군주는 누구인가라는 뜻이었소."
"네?"
중전 심씨는 명종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어진 입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중전을 보는 명종은 오랜만에 보는 중전의 귀여운 모습 탓인지 아니면 그때 좋은 대답을 들었던 탓인지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을 계속했다.
"먼저 위는 찬탈자이기는 하지만 한제국의 관료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한 황제가 존재했던 국가요. 또한 촉한은 지방군사정권에 가까울 정도로 전문적인 행정체제가 미비하였소. 그리고 동오는 강동의 호족세력이 손씨라는 무력집단을 중심으로 뭉친 국가요.
우리 조선은 뛰어난 무장이시던 태조대왕께서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아서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고 동오는 손권의 형인 손책이라는 용장이 강남호족의 지지를 받아 근처의 약소세력을 무너트리고 세운 나라로 두 나라 모두 강력한 신권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소.
그리고 손권은 강력한 호족세력을 잘 다독이며 삼국중 가장 오래 유지된 오나라의 기반을 닦은 훌륭한 군주요. 당연히 강력한 신권이 존재하는 우리 조선의 군왕들이 가장 배울 것이 많은 군주라고 할 수 있소. 그러니 하성군의 답이 정답이 되는 것이오."
"....하지만 전하. 전하의 의중을 우리 세자는 틀리고 하성군이 맞추었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그리 기뻐하십니까?"
중전은 하성군이 세자보다 낫다고 명종이 평가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배를 아파하며 낳은 자식이 아비도 없이 소금이나 만들어 파는 것에게 뒤진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명종은 중전의 그런 반응을 당연하게 여겼다.
사실 자신도 조금 그랬기 때문이다.
"허허허. 중전. 그렇게 열 내실 필요가 없을게요. 그래서 과인이 두 번째 질문을 한 것이오. 손권의 신하중 누가 가장 명신이냐는 질문을 하였으나 속뜻은 너는 손권의 신하중 어떤 이를 본받아서 과인과 세자를 섬기겠느냐는 뜻이었소. "
"전하, 그렇다면 하성군이 주유나 육손 같은 대도독들을 본받겠다고 했던 것은 아니옵니까? 그렇게 대공을 세우는 인물이 되어서 전하와 우리 세자를 받들겠다고 하여 비단을 내리신 것이옵니까?"
"허허허. 중전. 그랬다면 내가 비단을 내리지 않았을께요. 하성군이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황개라는 늙은 장군이었소. "
"황개라면 손씨 3대를 모두 섬긴 장군이 아니옵니까? "
"중전의 말씀이 지당하오. 황개는 손견때부터 손씨를 섬긴 장수로 손견이 죽고 그의 아들 손책이 영지도 병사도 없이 떠돌 때도 변함없이 손씨를 섬긴 충신이오. 그러나 손씨가 강동을 얻자 호족세력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그다지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는 못하지만 적벽대전때 노구를 이끌고 어린 주유에게 매를 맞는 고육지계를 펼치며 조조군에 화공을 가하는 대공을 세운 충장이오.
비록 주유나 육손같이 높은 직책에 올라 오나라의 전군을 호령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그 공이 어찌 주유보다 적다하겠소. 하성군은 이 황개처럼 과인과 세자가 어려울 때도 충성을 다하며 나중에 큰 보답을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을 말한 것이오. "
중전은 명종의 말을 대부분은 이해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보아도 세자보다 하성군이 뛰어나게 보였다. 하성군은 세자보다 1살이나 어린데도 명종의 숨은 뜻을 다 파악한 것이다. 본시 군주보다 너무 유능한 신하는 이익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법이였다. 이때 중전의 눈을 보고 속뜻을 읽은 듯한 명종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비단을 내렸소. 그러나 하성군이 자기 방에서 햇빛이 안 드는 곳에 잘 보이게 보관하고 제 가족들에게는 다른 비단을 사서 입혔다고 하오. 과인과 하성군의 속뜻을 아시겠소? 참고로 비단은 햇빛에 색이 잘 변한다오. "
"... 전하의 의중은' 너도 이 비단 같은 권력이 주어지면 햇빛에 잘 변하는 비단처럼 변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하성군은 '함부로 전하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사용하지는 않고 전하의 은혜는 자기 방에서 언제나 보며 기억하겠으며 잘 보관된 비단처럼 그 뜻은 변하지 않겠다.' 라는 것으로 보이옵니다. "
"중전의 말이 지당하오. 대강 그런 뜻이오."
"하오나 전하. 그 어린 것의 심계가 너무 두렵습니다. 나중에 우리 세자에게 해가 되지는 않겠는지요. "
"하하하. 중전. 너무 걱정이 심하시오. 나는 이미 여러 번 지금보다도 어린 하성군을 만나보았소. 하성군은 서원군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며 과인이 써보라고 명한 익선관을 끝내 사양할 정도로 충성심이 깊은 아이오. 거기에 소금장사를 한다고 한성부에 있지도 않으며 제 아비인 덕흥군도 죽고 외가인 정세호대감과의 관계도 소원하여 정치적인 지지세력이 없소.
더욱이 종친인지라 중요한 관직을 맡기도 힘드니 우리 세자가 여러모로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신하가 될 것이오. 또한 중전도 보셨겠지만 둘의 사이가 무척 좋으니 삼국지의 손책과 주유처럼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임금과 신하가 되리라고 과인은 생각하고 있다오. "
명종의 말에 중전 심씨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러고보니 아무리 뛰어나도 종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못했다. 고작해야 실권이 없는 직책이나 맞으면서 세자를 뒤에서 보좌한다면 분명히 득이 되는 일이다. 거기다 세자와 상성도 잘 맞는 듯하니까 더욱 득이 되는 일이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신첩의 생각이 짧은 듯하여 부끄럽사옵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굴다니... "
"아니오. 종친들은 뛰어난 자가 없고 정작 뛰어난 자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여 그런 것뿐이오. 만일 근처에 제대로 학식을 쌓은 자가 있다면 충분히 이해했겠지만 종친 중에서는 하성군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인물이 없는 듯하오. "
명종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원래 종친이나 부마 등은 관직을 하지 못한다. 그 자체가 실권은 없지만 관직이기 때문이다. 즉 하성군이라는 것도 일종의 벼슬자리이다. 하지만 예외 없는 규칙은 없는 법. 종친도 벼슬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 7대 왕 세조이며 단종때 영의정을 지냈다. 종친계의 벼슬이 있지만 겸임하면 별문제는 없다. 단지 다른 신하들의 빗발치는 공세를 막아야한다.
명종은 이번에 하성군을 시험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는 종친을 찾아서 이량을 대신하는 세력으로 양성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좀 세력이 커지면 겸직금지를 내세워 실권을 빼앗아버릴 공산이였다. 하지만 하성군의 총기만 확인했을 뿐 자신을 대신해서 윤원형과 대립하다가 토사구팽당할 인물은 찾지 못했다. 거기다 하성군은 나이 때문에 세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여러가지 부정사건으로 이미 조정내의 윤원형일파의 전성기는 끝나고 조금씩이나마 감소하는 이 때에 자신을 대신해서 윤원형을 끌어내릴 만한 인물을 못 구하는 명종의 가슴은 무척 답답했다. 그래서 종친 중에서도 찾아본 것인데 성과라고는 역시 하성 군뿐이다. 그래서 명종은 하성군의 총기를 확인했다는 것을 위안삼아 울적한 기분을 감추고 있었다.
"도련님, 왜 저렇게 좋은 비단을 놔두시고 비싸게 사서 옷을 지으셨습니까?"
균이 하사받은 비단을 자기 방에 보관한 채 가족들에게는 다른 비단으로 옷을 입힌 것을 본 정집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거기다 균은 비단을 방 한쪽 햇볕이 안 드는 곳에 보관했다. 오래 보관하려면 창고에 넣어두는 곳이 좋을 꺼라는 말에도 균은 요지부동 이였다.
균은 한동안 벽에 비단을 걸어둔채 유심히 바라보고는 했다. 수십 필이 되는 많은 비단이 풀어졌다가 다시 정리되어 방 한쪽에 쌓여졌다. 사실 균은 명종이 난데없이 삼국지 이야기를 하기에 헌제의 옥대 밀조처럼 뭔가 비밀리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보통 비단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하나 다 살펴보고 벼라별짓을 다해도 안 나오니 비단산다고 들어간 많은 돈과 비단을 검사한 자신의 노력이 아까웠다. 혹시나 해서 벽에 걸고 보고 어두운 곳에서 불에 비쳐보아도 글자 비슷한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걸 비싼 걸 주상전하가 왜 그냥 내려주었지? 나한테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
균은 의아했다. 자신은 삼국지이야기를 하기에 이를 이용해서 명종에게 자신은 충신이 될 테니 잘 봐주세요라고 아부를 한 것인데 이렇게 이유없이 비단을 내릴 줄은 몰랐다. 자기에게 별 아쉬운 것이 없는 명종이 밀조도 없이 비단을 내리다니...
균은 고민에 빠졌다.
'설..설마, 요즘 내탕금이 궁하니 뇌물 좀 바쳐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
한편 균이 자신의 하사품덕분에 고민에 빠진 줄도 모르는 명종은 어떻게 하면 하성군의 대궐출입을 자유롭게 하여 세자의 친구로서 성장하게 할 것인지 고민중이였다. 당장 어머니인 대비윤씨의 반발을 꺾어야 하는데 뚜렷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렇게 명종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선전관 심성태가 명종에게 고했다.
"전하, 하성군영감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영추문 근처에 계십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
"하성군이? 알겠다. 경회루 근처로 데리고 오도록 하라."
"예. 전하."
벌써 세 번째 개인적으로 만나는 하성군이였다. 그러다보니 장소도 뻔해서 경회루 근처로 정해진 듯 했다. 이윽고 하성군과 선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전관 심성태는 저번보다는 작은 상자를 들고와서 명종 앞에 내려놓았다. 명종의 뇌리에는 2년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성군 이균이 주상전하를 뵙사옵니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 설마 또 돈이냐? "
"지난번 연회에서 소신이 주상전하가 내리신 음식 앞에서 감히 한숨을 내쉰 일이 있었사옵니다. "
"과인은 그때 하성군의 행동이 백성과 이 나라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란 것을 알고 있느니라. 그러니 그만 그 상자는 가지고 돌아가도록 하거라."
명종은 어린 조카인 하성군이 지난번에 많은 돈을 바쳐서 요긴하게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받지않기로 했다. 계속 돈을 받아준다면 들킬 염려도 높고 그 경우 아무리 빈민구제등에 써도 조카의 돈을 갈취한 셈이 되는 자신의 도덕성에 큰 타격이 올 것이다. 비록 하성군이 결례를 범한 것을 사죄하러 온 것이기에 별로 호통은 치지 않고 있지만 마음 같아서는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균은 이러한 명종의 행동이 뇌물받기 전에 한번 빼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가 아니고는 그렇게 비싼 비단을 하사할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성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돈을 남김없이 떨어서 2만냥이 넘는 돈을 만들었다.
"전하, 이번에는 별로 많은 돈은 못 됩니다. 거기에 소신이 집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 바로는 전하께서 꼭 돈이 필요하실 일이 있을 듯 하옵니다. 제가 가지고 있어야 크게 쓰이지 못할 돈이니 전하께서 크게 써주시기를 다시 한 번 청하옵니다."
'돈 달라고 했으면 빨리 받기나 하지. 체면 차린다고 거부하는 척이라니... '
균이 이런 생각을 감춘 채 정중히 상자를 내미는 것을 본 명종은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이 돈을 받아서 대비에게 주는 것이었다. 언제나 불사에 여념이 없는 덕분에 이미 내탕금은 말라버린터 이 돈을 하성군이 챙겨준 돈이라고 한다면 대비 윤씨도 하성군을 달리 볼 것이다.
그렇다면 하성군의 입궐금지령도 유명무실해질 공산이 컸다. 영특한(?) 하성군은 이런 제반사정을 알고는 이렇게 돈을 바치는 것이었다. 궐내에 세력이 없는 하성군이 이정도의 생각을 한다니 참으로 대단했다. 당장 명종은 기쁜 마음으로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하성군에게 말했다.
"며칠 후에 입궐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함부로 전라도로 내려가지 말고 한성부에 있으라. "
"예, 전하."
명종은 저렇게 임금의 고민을 다 생각해서 그 대비책을 제시해주는 훌륭한 신하를 거느리게 될 세자를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 저 나이에 저 정도니 나중에는 분명히 세자의 큰 짐을 덜어주는 신하가 될 것이다. 명종은 멀어져가는 하성군의 뒷모습을 보면서 세자와 하성군이 빨리 자라나서 자신의 힘든 업무들을 대신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몇 년 만 세자와 하성군을 잘 교육시켜고 그 둘이 조정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한다면 지금의 괴롭고 힘든 일들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명종은 미소를 지으며 강녕전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