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28)

 청혼을 받다.

어느덧 하성군이 세자의 놀이동무이자 글동무로 지내기 시작한지도 한 달도 더 흘 렀다. 어느덧 세자가 거처하는 자선당에는 이러한 소리들이 예사로 들리기 시작했 다.

"하성군. 이번 한 번만 물러주시오."

"저하, 벌써 세 번째이옵니다. 이미 손을 떼신 이상은 물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본시 장기나, 바둑은 한 수정도는 물려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이건 오목이옵니다. 저하."

오늘도 두 소년은 간단히 오목을 두면서 쉬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차기 국왕으로 자란 세자는 무척이나 지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잠시 후 균은 오목 마저도 한 수 물려주어야 하는 사태를 겪고는 속으로만 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확 연히 계급차이가 나는 세자에게 대들 수도 없는 법이다.

그렇게 세자의 연전연승으로 승패가 가려진 오목에 흥미를 잃어가는 균은 세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으로는 다른 놀이를 물색해봤다. 이왕이면 실내에서 해야 하는 놀이이기에 선택의 폭은 작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바둑, 장기, 알 까기가 고작이다. 투전이라는 놀이도 있다지만 백과사전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에 나 등장한다고 한다.

"저하, 오목은 그만 무르고 알까기나 하시는 것은 어떠시겠습니까?"

"하지만 교수관 송하 등이 근처에 있을 터 위험하지 않겠소."

"어차피 교수관들이야 바둑이나 장기에도 질색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라는 놀이는 고작 투호정도이니 그들의 말만 따라서는 안에서는 서책이나 읽어야 할 것 입니다. "

당시 젊은 사대부들은 바둑이나 장기를 타락으로 인도하는 놀이라고 천시했다. 하 지만 나이가 든 사대부들은 오히려 그런 놀이를 즐기는 경향도 있을 만큼 인기 있 는 놀이이다. 신하들이 권장하는 놀이는 독서와 창작 그리고 투호놀이였는데 실제 로 조선의 왕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주로 조선의 왕들은 투호놀이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사냥이나 격구, 고문서 수집 , 난 키우기, 온천욕 그리고 여색등을 즐겼는데 이런 것말고 보편적으로 많이 즐긴 것은 일반 평민들도 즐기던 장기나 바둑이였다.

그 예를 보면 인종의 경우 세자시절 교수관들이 장기와 바둑을 하지 말고 서적을 써보는 연습을 하라고 권고할 정도로 장기와 바둑을 즐겼고 연산군은 워낙 장기와 바둑은 물론 위에 예시한 거의 모든 취미를 다 가져서 신하들이 질색을 했다. 원래 의 선조역시 장기와 바둑을 즐긴듯하며 공식문서인 교지에 '이번 인사는 장기나 바 둑처럼 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남긴 왕이다.

하지만 왕실에 대한 신하들의 지적이 많은 지라 세자도 장기와 바둑을 하면서도 교 수관들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였고 오히려 한술 더 뜬 균의 바둑알까기에 질겁하면 서도 그 재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세자는 계속되는 균의 유혹에 넘어가서 알까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균은 곧 알까기에도 흥미를 잃었다.

"어어어..., 이러면 아니 되오."

"저하. 떨어지려는 돌을 잡으시면 어떠하옵니까?"

균은 자기 밖에 모르는 꼬마를 보면서 기가 찼다. 전생이라면 벌써 뺨을 때려주었 겠지만 지금은 계급이 깡패라는 조선중기의 그것도 법도가 지엄한 왕궁 안이다. 균 은 부글거리며 끓는 속을 다스리며 조용히 세자를 타일렀지만 세자는 막무가내였다 . 조선의 왕세자이고 국왕의 외동아들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자기 밖에 모르는 듯해 서 균은 입맛이 썼다.

'저게 왕이 되면 정말 조선은 망할지도 몰라. 이제 살날이 1년도 안 남았기에 망정 이지... 그냥 빙고나 할 껄 그랬나? 아니야, 저 놈이라면 빙고라도 사기칠 놈이야.

그래 맞아. 한 칸에 숫자를 2개씩 써넣고 하나만 맞아도 지울 놈이지. 암.'

이렇게 균이 세자가 빨리 죽기만을 속으로만 기원하며 매번 지고 있는 알까기를 겨 우겨우 하고 있는데 누구인가 밖에서 외쳤다. 그 즉시 알까기는 바둑으로 변신했다 . 아무리 균이 투덜거려도 두 소년은 의외로 손발이 잘 맞았다.

"세자저하, 소신 송하이옵니다. 이제 석강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교수관. 나의 몸이 좋지 않으니 오늘 석강은 하루 쉬는 것이 좋겠소."

"하오나 저하."

"오늘은 무척 피곤하오. 그만 물러가시오."

"....."

송하는 글공부를 지지리도 싫어하는 세자에게 치를 떨 지경이었다. 태종대왕의 양 녕대군도 지금의 세자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교수관이 세자를 체벌 할 수 없기에 보고를 올려 명종이 세자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명종은 외아 들인 세자를 끔찍이도 아껴서 잘 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송하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저하, 석강에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 하성군."

"저하, 하루 쉬시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이오나 먼 훗날에 필히 후회하실 일입니다.

거기에 석강을 준비한 시강원 교수관들의 노고도 허사가 되옵니다. 정 피곤하시면 교수관들에게 말해서 빠르게 끝내도록 할 것이니 채비를 하고 일어나심이 좋겠습니 다. "

"...하성군이 그리 생각한다니... 알겠소. "

균이 보기에 세자가 조금 기분이 상한 듯하지만 상관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비 유만 잘 마추어주고 잘 놀아주기만 해도 금방 헤헤거릴 것이다. 단지 다른 이가 보 기에는 세자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충신으로만 보이면 된다.

당연히 지금의 이 행동은 밖에서 웃고 있을 송하의 입을 통해서 명종과 중전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만큼 왕위는 균에게 가까워진다. 또한 다른 교수관들 역시 자신을 좋게 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조금 덜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래서 균 이 충신인척 석강에 나가기를 간청한 것이다.

'역시나 주상전하께서 칭찬하신대로 하성군은 나중에 충신이 되겠구나. 이는 세자 저하와 이 나라에 좋은 일이로다. 요즘 하성군도 가끔씩 석강에 참석하고 하루 종 일저하와 시간을 보내느라 피곤한 듯하니 내일부터는 너무 어려운 구절을 물어보지 않아야 하겠구나. '

역시나 다년간 숙성된 균의 연기를 밖에서 목소리만 듣던 송하는 완전히 속았다.

균의 연기력을 간파하려면 거의 기로소에 들 정도로 조정의 녹을 받아먹은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지경인데 이제 겨우 당하관인 송하가 그것도 방밖에서 알아낸다 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일이였다. 또한 균이 어리숙한 세자를 속이는 것은 일도 아 니었다.

아무튼 균은 세자를 달래면서 비현각의 교수관들에게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벌써 며칠째 석강에 연달아 참가하여 세자와 교수관들과 가상의 국정운영에 대한 토론에 열을 올렸다. 언뜻 보면 무척이나 정열적으로 세자의 교육에 임하는 듯하지만 이 역시 균이 의도하는 행동이었다.

즉 열심히 세자를 위하는 척하다가 자신이 과로로 쓰러지는 척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명종과 중전에게 점수도 많이 딸 수 있고 요양을 간다는 핑계로 추운 한성부 를 떠나서 따뜻한 남쪽 섬인 비금도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게 보이는 방법이었다. 이윽고 균의 예상대로 명종에게 이 사실이 보고 되었다. 그런데 균의 몸 상태까지 보고되었다.

"그래. 요즘 세자의 학문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

"예, 전하. 하성군께서 세자저하의 놀이동무일 뿐 아니라 글동무로써도 훌륭하게 임하고 있사옵니다. 저번에는 석강을 피하려고 하는 세자저하에게 간청해서 참석하 게 만들고는 퇴궐도 하지 않고 늦게까지 저하와 저희 교수관들과 함께 토론을 하였 습니다."

"이런... 기분 좋은 소식이기는 하나 아직 어린 하성군이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늦 게 퇴궐하고 일찍 입궐함은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을 텐데... "

"하긴 소신이 보기로도 하성군영감의 안색이 나날이 안 좋아지는 것이 전임교수관( 당하관급 이하의 교수관들. 세자의 교육에만 전문적으로 매달림)들 모두가 걱정하 고 있사옵니다. "

세자의 학업태도와 진도를 보고하기위해 강녕전에 들어온 송하의 말에 명종의 용안 은 어두워졌고 덩달아 송하의 얼굴도 근심에 찼다. 그러자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중전 심씨가 대책을 말하였다.

"전하. 하성군에게 내의원을 통해서 보약이라도 내리심이 어떠시겠습니까? 혹여 어 린 하성군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우리 세자의 심려가 무척 클 것이고 여기 교수관들 도 여러모로 힘이 들 것입니다."

"중전의 말이 옮소. 어린 것에게 너무 무리를 시키는 것 같구려. 보약도 하사하고 잠시 쉬게 하는 것은 어떻겠소? 갑자기 답답한 궁에 들어와서 너무 몸을 혹사하니 잠시 휴식을 주는 것도 좋겠소. "

"하지만 이제 곧 한겨울입니다. 그때쯤에는 우리 세자의 서연(세자가 하는 공부)도 멈추어야 하니 그때까지만 세자의 글공부를 돕게 하고 겨울에는 쉬게 했다가 내년 봄에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과연, 중전의 말씀이 지당하오. 과인도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잠시 잊고 있었구려 . 허허허. 어차피 하성군도 가끔씩은 전라도에 내려가야 할 것 같으니 중전의 말대 로 봄, 가을에만 불러들이고 여름, 겨울에는 내려가게 하면 좋을 것이오. 경의 생 각은 어떠한가?"

"그간 세자께서 지루해 하시기는 하겠으나 하성군영감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으니 전하의 분부가 지당하다고 사려 되옵니다. "

균의 생각은 거의 다 맞았지만 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아무리 엄청난 교육을 받는 세자라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처럼 서연이 중단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나 명종은 순회세자의 건강을 염려하여 서연을 중단시키는 경우가 많 아서 신하들의 빈축을 샀다. 그러니 균이 지금처럼 열성적으로 안 해도 겨울이나 여름에는 같이 쉬게 되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열심히 몸을 혹사시킨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런 논의 내용을 모른 채 오늘도 균은 석강까지 소화한 후에 지 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퇴궐을 하려고 왕족과 척신, 상궁들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건춘문으로 향하다가 대전내관을 만났다.

"하성군영감. 하성군영감."

"그대는 대전내관이 아닌가? 주상전하를 호종해야하는 자네가 건춘문에는 무슨 일 인가?"

"예, 영감. 사실은 주상전하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전하께서? 그래 무슨 말씀을 계셨는가?"

"예. 실은 주상전하께서 내일부터는 추운 겨울이니 세자저하의 서연을 내년 봄까지 중단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서연이 중단되니 하성군영감은 특별히 입궁할 필요는 없고 그간 수고하였으니 푹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년 봄에 다시 서연이 시작되면 입궐하여 다시금 세자저하를 지금처럼 잘 보필해 달라고 하시고 또 내일쯤 내의원에서 영감 댁으로 최상품의 약재로 만든 보 약을 지어 올릴 것이니 이를 마시고 빨리 원기를 회복하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

균은 몸이 굳었다. 점차 추워지는 한성부의 날씨도 그렇겠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언제쯤 쓰러질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예 몇 달을 푹 쉬다가 오라 는 말을 들으니 온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그럼 지금껏 열심히 퇴궐도 안하고 한 일들이 다 삽질이란 말인가?'

갑자기 온 몸에 몇 달간 쌓인 피로가 몰려왔다. 그리고 추운 날씨와 분한 마음에 온 몸이 떨려왔다. 균은 눈을 감고 마음을 달랬다. 그 모습을 보던 대전대관은 이 렇게 생각했다.

'주상전하의 성은에 하성군영감이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 역시나 주상 전하의 말씀대로 나중에 훌륭한 재상이 되어 이 나라의 기둥이 되실 분이다. '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다 보답한 것 같지 않은 내가 부끄럽네. 내 대신 대전내관이 수고해주게. "

균은 겨우 마음을 달래고 대전내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 한 균의 목소리는 추운 날씨와 어울려 무척이나 떨렸다. 대전내관은 너무 감격하여 목소리가 떨리는 균을 보고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균에 게 인사를 하고 명종에게 하성군의 대답과 자신이 느낀 점을 알려주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균은 간신히 건춘문을 나선 후 남여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남여를 맨 두 호위병들은 오늘따라 균이 힘을 많이 주어서인지 무거운 남여를 매고 겨울밤에 땀 을 뻘뻘 흘리며 인달방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온 균은 피로가 몰려온 탓인지 3일동안 깨어나지 않고 제방에서 내리 잠 만 잤다. 하지만 균의 손해는 아니였다. 이미 균은 세자의 유일한 동무이고 유능하 고 충성스런 신하로 찍혀버렸다. 비록 내년에도 다시 이런 고생을 해야겠지만 균의 입지는 상당히 성장하였다.

오죽하면 이 소식을 들은 윤원형이 자신의 막내아들을 세자의 겨울철 놀이동무로 보내겠다고 문정왕후에게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윤원형의 아들은 제 아비를 닮아 서 품행이 바르지도 못하고 또한 균만큼 놀이문화에 달통한 인물이 못되어 세자와 교수관들의 미움을 사서 한달만에 쫒겨났다.

이러한 일 이후에 장안의 사람들은 공공연히 세자가 즉위하면 하성군은 최소한 도 승지는 확보했고 육조판서는 기본이며 삼정승은 시간문제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차세대의 세도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세도가인 윤원형과 이량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소문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