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을 받다.
물론 이러한 암호문으로의 명령전달 방법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마찬가지 였다. 일단 한성부에서 나주까지만 약 1천리(400km)가 넘는다. 동시에 수많은 하천 들도 건너야 하고 나주에서 비금도까지도 이동시간도 생각해야 한다.
말의 이동속도가 약 시속 30킬로미터로 가정한다면 아무리 준마와 뛰어난 기수가 있다고 해도 교대해주며 전달할 경우에는 최소 2일, 혼자서 쉬고 달리고하며 내려 온다면 최소 3일은 걸려야지 한성부에서 비금도까지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의 역참제만큼 많은 말과 인원을 동원할 수는 없으니 일부 교대를 시켜준다고 해도 평균적으로는 3일에서 4일정도가 소요되는 셈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한성부의 균이'돈 많이 벌었냐? '고 쓰인 문서를 보내면 몇 명의 전달자가 말을 타고 교대로 열나게 달려야 3일 후에 비금도 본단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하루정도의 답장을 쓰는 시간까지 포함하고 다시 전달자들이 땀나게 달려서 균의 손에 '돈이라면 이젠 질렸음.'이라는 답서를 쥐어주는 데 걸리는 시 간이 약 7일 정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균의 지휘력은 한계점에 부딪치게 된다. 또한 비상사태시 비금도의 대처능
력에도 큰 약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해서 비금도일대의 세력을 관장 할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크고 중요한 일이야 자신이 암호문으로 지시한다고 해도 나머지 사한들을 다른 부장들을 통솔해서 관장할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균 은 박수익에게 암호문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고는 홀로 회의장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 에 잠겼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균이 형님, 이제 오셨습니까?"
"오냐, 잘 있었느냐?"
균은 며칠을 본단의 집무실에서 보낸후에야 자신의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곽재우와 삼식이가 균을 무척이나 반겼다. 먼저 균은 삼식이를 다독 거려준 후 자기방에서 곽재우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균이형님께서 세자저하의 교수관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
"그래, 아우는 이 형이 옆에 없던 것이 그리 좋더냐?"
"어찌 그러겠습니까만은 세자저하의 교수관이 되신 것은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습 니까? "
"가문의 영광이라...."
균은 곽재우가 말한 가문의 영광이란 말에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곧 죽어버릴 세 자의 비위 따위를 맞추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후일 조선의 왕위에 오르는 자신의 교육을 받고 있는 곽재우야 말로 가문의 영광이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에게도 내색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균은 슬그머 니 화제를 돌렸다. 균이 떠나기 전에 김호진에게 곽재우의 회계교육을 부탁하고 떠 났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 그간 김부장 밑에서 일은 열심히 했느냐?"
"...예. 형님."
"힘없이 답하는 것을 보니 김부장이 많이 혼을 낸듯하구나. 그래도 우리 비금도의 재정규모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우리 비금도의 재정을 보아하니 어 떤 느낌이 들더냐?"
"비금도의 인구는 한 개의 작은 군현에 지나지 않지만 그 부는 한 개의 도를 능가 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비금도인구는 소폭증가하여 약 1만 6천명수준이었다. 인구 약 1300만~ 1400 만의 조선이 약 300개의 군현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일부 대도시를 제외한 일반 고을의 인구는 4만여 명 수준이다. 그리고 각 고을의 1년 수입은 약 1만냥 전 후인 반면 올해 비금도의 총수입은 무려 100여만냥. 물론 인건비랑 원재료비 기타 투자비등을 빼고나면 완전한 수입은 30여만냥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천지에서 호조(오늘날의 재정경제부)를 제외하고는 이만한 돈을 만져보는 곳은 없다.
비금도의 수입은 이제 크게 두 곳으로 양분되었는데 하나가 천일염의 국내판매로 인한 수입이고 또 하나는 시마즈와의 교역에 의한 수입 이였다. 아직은 천일염의 판매수입이 크다고는 하지만 균이 마음먹고 시마즈와 교역한다면 오히려 이쪽이 주 력이 될 정도로 이익이 컸다. 그래서 단순히 유황등을 공급받으려는 계획에서 벗어 나서 앞으로 주력사업으로 확장하려는 생각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어린아이이고 양반인 곽재우였지만 지난번 균이 상경하면서 김호진에게 맞 기고 가버리는 바람에 보게된 엄청난 재정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군 현도 되지 않는 작은 섬 하나가 일개 도를 능가하는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처음에 는 숫자를 잘못 써둔 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창고에 쌓인 물자 들을 보면서 곽재우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그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바로 상업입니다. 형님의 비금도상회는 좋은 소금을 싸게 만들고 왜국의 물품을 받아드려 조선본토로 판매하고 또 조선의 물품을 왜국이 판매하여 엄청난 차익을 남겼습니다. 그 수입으로 이 섬의 수많은 백성들이 부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렇다면 너의 생각으로는 상업과 농업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 하느냐?"
"비록 지금 보이는 상업의 이익이 크기는 하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 농사는 천하 의 근본이라고 했으니 농업입니다. 또한 비금도의 수입역시 왜국의 사정에 따라서 감소하고 증가할 것이니 안정적인 재정확보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역시나 1년간을 같이 살았지만 곽재우의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지난 1년간 균은 엄청난 기밀이 아닌 이상은 곽재우에게 다보여주고 그 성과를 과시했다. 그래 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시찰을 돌아다닐 때도 꼭 같이 하여 곽재우가 균의 친동생이 라는 소문이 비금도를 떠돌았다.
그렇게 강력한 균의 군대와 엄청난 자금력, 그리고 잘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건만 고정관념이 남아있는 곽재우는 주저없이 농업을 선택했다. 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열 살짜리 꼬마가 이정도인데 고지식한 선비들에게 상업의 필요 성을 인식시키고 나가서 조선의 발전을 이룩하려면 얼마나 힘들지 모를 일이다.
"안정적인 재정확보에 문제가 있다... 그럼 올해에만 30만냥의 돈이 남아서 돈을 쌓아둘 창고를 짓고있는 비금도보다 농사를 중시하다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다 굶어죽는 조선이 더 안정적인 재정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옵니다. 하나 조정의 재정부족은 대비마마의 지나친 불사와 척신들의 부패로 인한 것이고 가뭄은 이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경고입니다. 만일 주상전하께서 마음 을 가다듬고 바른 정치를 해나가신다면 다 잘 해결될 것입니다."
"제 스승의 글은 많이 봤구나...."
균이 아는 한 저 내용은 조식의 단성소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하다. 거기서 조식은 왕이 제대로 정치를 하지 않아서 나라꼴이 이모양이고 간신들이 활개를 친다. 그 러니 더 일이 커지기전에 정신차리고 새사람이 되어라.' 라는 글을 올렸다. 두 사제 모두 임금만 정신차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같이 신권이 강한 나라에서 임금만 정신을 차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나라의 체질을 바꾸지 않는다면 조선의 역사는 거의 그대로 흘러서 많 은 백성들이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된다. 하지만 13세기말에 안향이 주자학을 전래하 여 연구한 이래 약 300년간의 조선주자학은 사대부들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았 다. 학문이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주자학은 뿌리를 내렸다.
이런 주자학에 물이 들어 있는 곽재우를 보면서 균은 평소에 하는 표정인 살짝 웃 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을 했다.
"과연 임금이 정신을 차린다고 나라가 바로 서겠느냐?"
"그렇습니다. 임금은 나라의 아버지이고 백성들은 자식들입니다. 아버지가 바른 뜻을 세운다면 자식들은 꼭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경국대전을 읽어보았느냐?"
"네? 그것은 법전이 아니옵니까?"
균이 난데없이 세조때 편찬되기 시작하여 성종때 완성된 경국대전의 이야기를 꺼내 자 곽재우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경국대전은 유교경전이 아니고 명의 대명령과 대명률을 기초로 만들어진 법률서였다. 이 경국대전이 완성되어 조 선은 법치국가라 할 수 있었고 성종은 자신의 시호에 이룰 성을 쓸 수 있었다.
"거기에 보면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를 규정한 구절이 있다. 그것을 읽어 보았느냐 ?"
"아직 저의 학문이 미천하여 거기까지는 읽지 못하였습니다."
"세조대왕실록에는 세조대왕때 우리 조선이 무척 태평성대였다고 적고있다. 그 것 은 아느냐? "
"저도 세종대왕과 세조대왕때의 우리 조선이 변방은 평화롭고 백성들은 살기좋았 다는 이야기를 들어알고 있습니다. "
"허지만 세종대왕때는 백성들의 태평성대이나 세조대왕때는 양반지주들의 태평성 대였다. "
"네?"
균의 말에 곽재우는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가 균의 눈과 마주치고는 놀라서 다시 푹 하고 숙였다. 균도 곽재우랑 같은 나이의 소년인데도 속은 서른이 넘은지라 그 모 습이 귀엽기만 했다. 하지만 다른 이가 보기에는 애늙은이 노릇을 하는 균이 더 귀 엽고 웃겼다. 균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 기해 나갔다.
"너도 알겠지만 세조대왕은 어린 조카인 노산군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당시 집권세 력인 김종서, 황보인 일파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고는 왕위에 올라 제 동생인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노산군마저 사사했다. 그리고는 이에 반발하는 세력을 잠재우기위해서 양반지주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법구문을 집어 넣었다.
그결과 조선의 일반 양민들은 소작을 지어도 반이상을 지주에게 빼앗기는 한편 그 토지에 대한 세금도 고스란히 부담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중한 부담을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하거나 유민이 되어 떠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양반지주들에 게는 지금의 부를 누리게 해준 시대보다 더 태평성대가 어디있겠느냐? "
"....."
"원래 세조대왕도 그렇게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려고 한 것은 아니다. 하 지만 정통성이 없는 왕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국가의 운영에 발언력이 있던 양반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길이었 고 그결과 원래 세조대왕이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던 법조문이 양반지주들의 반발로 지금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는 법조문으로 정해진 것이다.
국왕이 백성들을 위해서 지주들에게 무겁지 않은 작은 짐을 지우려 하였으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많은 양반들이 반발하여 결국 국왕의 바른 뜻이 꺾기고 말았다. 그 렇게 경국대전에 법으로 정해져 지금의 많은 백성들이 토탄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 다. 이것이 아비인 국왕을 따르는 자식들의 바른 도리라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지금의 주상전하께서 바로 뜻을 세우신다고 한들 주상전하가 자신의 이익에 반하 는 명령을 내리면 그즉시 들고 일어나는 자들이 사대부라고 자칭하는 자들이다. 백 성들은 굶어죽어도 자기 곳간의 썩은 쌀 냄새를 즐기는 자들이 양반사대부들이다.
이런 자들이 주상전하의 어명 한마디로 개과천선을 할 수 있겠느냐?
지금의 농업은 그런 양반들이 모든 토지를 가지고 있어서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벗 어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자들이 없는 상업을 택한 것이다. 비록 상 업으로 번 천한 돈일지는 모르나 이 돈으로 백성들을 먹여살린다면 그 가치는 양반 들의 집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돈보다 백배는 더 소중한 것이다. 한데 더는 그런 이 치도 아직 깨우치지 못하다고 옛 성현의 말이나 아무 이유없이 뒤쫓고 있다니 나는 실망이 무척 크다. "
균이 말하다보니 상당히 흥분한 듯했다. 그래서 양쪽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곽 재우를 다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얼굴에 홍조를 띄운 모습은 좀 곤란하게 보였 다. 곧 균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는 얼굴에서 열이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곽재우 도 아무 말 없이 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상업이 농업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너에게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너는 이미 내가 말한 것에 대한 대답을 결정한 것이니 더 이 상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너를 너의 스승님께 보내줄 것이나 다시는 나 를 볼 수 없을 것이다. "
균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이 아니고는 곽재우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 줄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옆에 없어도 단지 비금도에 있는 것만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성리학적 진리의 현실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다. 겉보기에는 유식하게 보이는 말들이지만 이미 많이 궁리해 두었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