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228)

 청혼을 받다.

균이 한성부로 다시 올라간 지도 한참이 지났다. 하지만 균은 세자의 서연이 다시 시작되었는데도 대궐로 입궐할 수 없었다. 바로 영의정이며 세사시강원의 수장인 윤원형의 견제 때문이었다. 윤원형이 이미 작년 겨울에 문정왕후를 움직여 자신의 아들을 세자의 동무로 삼아서 자신의 권력을 다음 대까지 확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윤원형의 아들은 세자랑 친해지기는커녕 동궁전의 궁녀에게 행패를 부리고 세자에게 이상한 놀이나 가르쳐서 세자와 교수관들 모두의 미움을 샀다. 현 세자빈 인 윤씨는 윤원형일파의 사람인지라 많이 지원을 해주었지만 이미 미운 털을 받기 시작한 그의 평판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윤원형의 아들은 어린 세자를 꼬셔서 대궐 담을 넘어 한성부시내를 활보하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사용했지만 찬 새벽공기를 맞은 세자가 입궐후 심한 고뿔에 걸 려서 들통나고 말았다. 원래라면 엄청난 치죄를 받을 일이었으나 문정왕후의 도움 으로 간신히 입궐을 금하는 정도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윤원형은 이를 빌미로 하성군의 입궐까지 막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현재의 적인 이량도 결코 무시할 만한 적이 아닌데 하성군이라는 새로운 적을 만든다는 것 은 자신의 몰락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자사(세자시강원의 겸임교수관, 정1품의 영의정이 겸직한다.)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아예 세자의 동무를 두지말 기를 명종에게 청하고 하성군의 입궐을 막았다.

하지만 갈수록 세자의 글공부는 미진하여 어느날 명종의 앞에서 이루어진 서연에서 세자는 교수관들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경악한 명종은 세자의 보육책임 을 물어 동궁전의 내관들에게 벌을 내리고 영의정이자 세자사인 윤원형과 빈객(정 2품 겸직교수관)으로 있던 원계겸, 이량을 불러 이 문제를 질책했다.

"요즘 들어 우리 세자가 글공부를 게을리 하여 교수관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 니라고 하오. 이 어찌된 일이오? 어찌 그대들이 문제를 삼은 하성군이 있을 때보다 더 세자의 공부가 미진하단 말이오? 내 이미 동궁의 내관들을 벌하였으나 앞으로도 세자의 공부에 큰 문제가 있을 듯하니 당장 내일부터 하성군을 입궐시켜 글공부를 돕게 함이 옮을 것이오. "

"하오나, 전하. 이는 일시적인 일이옵니다. 대개 어릴 적에는 보통 양반사대부의 아이들도 책읽기를 게을리 합니다. 어제 세자께서도 잠시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라 사료되오니 조금 시일을 두고 지켜봄이 옳다고 생각하나이다.

"

"소신이 아침에 세자저하께서 서연을 하심을 보았을 때 저하께서 눈을 딴 곳으로 두지 않고 부지런히 읽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하께서 참석하시니 긴장되어 그런 실수를 하였다고 사료되오니 전하께서는 조금 더 지켜보신 연유에 일을 처리하심이 옮은 줄 아뢰옵니다."

명종의 질책에 당사자인 윤원형은 물론이고 윤원형의 숙적이자 명종의 외척인 이량 마저도 하성군의 입궐을 반대하였다. 조선에서 1,2위를 두 세도가가 이렇게 같은 의견을 제시한 적은 거의 없었다. 견원지간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는 두 사람이 뜻 을 맞추자 명종도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경들의 생각이 그러하니 조금 시일을 두고 지켜보겠소. 하나 얼마 후에 과인이 직접 세자의 학문을 알아볼터니 경들은 세자의 공부를 돕는 데 최선을 다하시오."

"예. 전하."

'이량, 네 놈이 과인의 총애가 하성군에게 향할 듯하니 이를 막아보겠다고 감히 과인의 뜻을 거역하다니... 안 그래도 네 놈의 비리와 악행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것일 뿐이거늘 네 놈이 그 것도 모르고 날 뛰다니 과인이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

명종은 한 발 물러서서 잠시나마 세자의 교육을 그들이 원하는 데로 맡기기로 했다 . 자신이 아는 한 세자는 글공부를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고 결국에는 외척인 그 들의 신망만 깎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세자의 공부가 미진함을 탓하고 하성군을 시강원의 고위직으로 임명하여 이량을 대신하는 윤원형 의 견제세력으로 성장시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처럼 속으로 분을 삭이고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주는 척 한 것이었다.

덕분에 균만 널널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언제 어명으로 대궐에 입궐해야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비금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설사 분위기를 다 잡고 왔는데 또 내려간다면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균은 박수익이 준비한 연락체계를 가끔 점검하고 아직 다 읽지 못한 백과사전을 읽어서 자신의 지식을 늘리거나 간단한 체력단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때쯤 윤원형과 이량의 본격적인 견제로 처음처럼 균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많 이 줄었지만 균은 이들의 방문도 다 거부하고 자신이 정치세력을 만들 뜻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만일 자신이 작은 정치세력이라도 갖추게 된다면 유력한 양반 들이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힘이 있는 양반들에게 있어서 유능한 왕이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는 정적에 불과 하다. 그런 양반들에게 있어서 성군이란 자신들의 막대한 이익에 욕심을 내거나 도 전하지 않고 골치 아픈 정치업무를 대신 처리해주는 자이지 결코 백성들의 이익을 생각하여 자신들의 세력에 도전하려는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편하게 왕위에 오르려면 머리가 적당히 좋고 정치세력이 없어서 뒤에서 조종하기 쉬운 자로 보여 야 했다.

그래서 균은 그런 자들이 자신을 오판할 수 있도록 연기를 했다. 다른 종친들보다 는 조금 똑똑해서 명종의 관심을 받지만 정치적 후원세력도 없고 뛰어난 인물은 아 니라서 적당히 조종하기 쉬운 인물로 보여지기 위한 연기였다. 이미 명종의 관심을 충분히 끌어냈으니 신하들의 반대만 막으면 세자의 죽음후 왕위는 자신의 것이었기 에 가끔씩 유력한 자들의 초대를 받으면 작은 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감추어 그들의 경계심을 풀어주었다.

예를 들어 '나날이 나라의 재정이 줄어서 국고가 텅 비어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 냐' 라고 상대가 물어오면 '임금과 신하가 모두 뜻을 바로세우고 솔선수범하여 절약하고 백성들을 격려하여 농사를 중시한다면 하늘이 이를 알아주어 곧 국고가 풍족할 것입니다.' 라고 답하여 자신이 유교적 학문은 깊으나 현실은 모르는 듯 행동하였고 또한 '북방과 남방에서 오랑캐들이 국경을 침범하는데 이를 어떻게 하 였으면 좋겠냐' 물어 오면 '한성부를 지키는 번상병(지방에서 올라오는 오위도총 부의 병사)들을 돌려보내지 말고 그 번상기한을 늘려서 많은 군대를 국경에 파견해 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런 부담을 양반들이 아닌 백성들에게 지우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모습에 일부 뜻있는 충신들은 무척 실망하였지만 상당수의 세도가들이나 땅을 많이 가진 자들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 실질적인 왕위계승서열2위이자 나중에는 현 세자를 보필할 중요한 신하가 될 하성군마저도 현실에 어둡고 자신들의 권익을 빼앗지 못할 인물로 보이기에 자신들의 가문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균이 자신의 본심은 깊이 감춘 채 뛰어난 연기로 유력한 양반사대부들의 우 려와 견제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사이에 윤원형과 이량은 세자의 교육에 힘을 쏟았 다. 원래 가끔씩 교육을 하는 겸임교수관에 불과한 그들이 앞 다투어 자신의 직무 마저 포기한 채 강의를 계속하니 원래의 전임교수관들은 권력에 밀려서 찬밥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겨우 저녁시간이 되서야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덕분에 세자의 교육시간 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현 세자 부는 아버지 명종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궁궐에서 운동량이 부족해서 인지는 몰라도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역대의 다른 왕세자들보다도 공부시간이 짧았고 명종의 우려 때문에 서연을 중단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어서 많은 신하들의 빈축을 샀다.

일반적으로 세자의 아침공부는 전날에 배운 내용을 전부 암기하여 교수관의 합격을 받고나서 다음 공부를 시작한다. 정조처럼 머리가 좋아서 교수관을 골탕 먹이는 일 로 취미를 삼았던 특이한 경우는 제외하고는 보통은 전날 배운 것을 모두 암기하는 것만 해도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윤원형과 이량은 경쟁적으로 세자의 교육에 열을 올려서 세자는 3일 전에 배운 내용까지도 암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다지 엄하지 않던 전임교수관 들은 보기도 힘들고 옆에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었던 하성군 역시 반년이나 보지 못한채 엄하게 다스리는 윤원형과 이량등의 교육은 세자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

혹시나 명종에게 부탁하면 이런 지경에서 벗어날까 싶어서 간청을 하였지만 명종은 아직 윤원형등과 약속한 시일이 되지 않은지라 부득이 세자를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 이렇듯 명종 18년 그 해의 봄은 세자에게 있어서는 지옥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오라버니 뭐하세요?"

집 뒤쪽의 정원에서 몸 풀기 체조를 하던 균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진이가 제법 공손하게 물어왔다. 균의 영향을 받아서 또래의 양반집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자란 진이었지만 이제는 9살이나 먹은데다가 어머니 정씨의 집중적인 훈육으로 상 당히 조신해졌다. 하지만 이미 아기때부터 균에게 받은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진이구나. 너무 책만 읽다보니 몸이 찌부둥하구나. 그래서 몸을 좀 풀고 있 었단다."

"오라버니는 참 이상하게도 몸을 푸세요. 하인들도 오라버니가 이상한 행동을 많 이 한다고 쑤군거리던 걸요?"

균은 귀엽게도 말을 하는 제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이는 제 오빠가 쓰다듬어주자 '헤헤헤' 하며 좀 체면 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이런. 아직 우리 진이가 어머니에게 혼이 덜난 모양이구나. 벌써 말만한 처 녀가 되어서 이렇게 조신하지 않게 웃음을 흘려서는 되겠니?"

"그럼 '후후후' 됐나요? 오라버니."

진이가 입을 모아 '후후후' 하고 웃는 모습을 보자 균의 얼굴은 무척 환해졌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짓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 해질 만한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짜 웃음이었다. 균은 다시 한번 어린 여동생 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진이야. 오라버니랑 오목이나 한 번 두지 않겠니?"

"네. 오라버니!"

그렇게 균은 어머니 정씨가 사이좋은 오누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것도 모른 채 몸 풀이체조를 하다가 말고 동생 진이랑 놀아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 간이 흐르고 나니 서당에 다니던 큰 형 이정과 작은 형 이인이 돌아왔다. 두 형제 는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나서 바로 균의 방으로 향했다.

"아니. 하원군영감과 하릉군영감이 아니십니까? 어인 일로 이 누추한 방에 오시었 는지요."

"거야 하성군영감이 우리 어여쁜 동생과 재미난 놀이를 한다고 해서 구경삼아 왔 소이다."

균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잘 대답하는 균의 두 형 정과 인도 이제는 15살과 13살의 나이였다. 큰 형인 정의 경우에는 어머니 정씨가 곧 혼처를 알아본다고 할 만큼 나 이가 들었다. 하기는 이제 내년이면 만 16세로 호패를 받게 되는 나이었다. 네 남 매는 어울려서 알까기를 시작했다. 형제자매들과 이대 이로 편을 먹고하는 알까기 는 세자와 놀 때와는 비교도 할 수도 없이 재미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밤이 되자 진이는 잠을 자러 건너갔고 세 형제는 옹기종기 모여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년 큰 형님도 성년에 이르시니 어머님께서 빨리 혼처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요즘 입버릇처럼 말씀하십니다. 혹시나 마음에 두시는 낭자라도 있으십니까?"

"혼처라.... 어린 동생을 고생시키고 자신은 편안히 글공부나 하러 다니는 무능한 형이 어찌 처자식을 거느리겠느냐? 무능한 이 형보다는 이미 종이품의 관직을 받고 주상전하께서 총애하는 아우의 혼사가 우선되어야지."

"형님!"

균은 혹시나 큰 형이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서 크게 외쳤다. 하지 만 정은결코 균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종친으로 태어난 자신의 신세를 탓하기 시작했다.

"결코 아우를 탓하는 것이 아니야. 명목상의 가장은 나지만 사실은 우리 셋째아우 가 아닌가? 나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없구나. 어차피 태어나서 종친으로 산다고 한들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느냐? 아우처럼 유능하고 운까지 따라주지 않으면 평생 이 한성부를 벗어나지 못하고 책을 친구삼아서 평생을 보내야하는 것을... 나는 내 자식들까지 그런 생활을 물려줄 생각은 없구나."

"....."

원래 진지하던 큰 형 이정의 말에 평소에 무척 쾌활한 작은 형 이인마저도 기분이 안 좋은지 얼굴이 침울해졌다. 조선의 종친이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이정의 말 대로 균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냥 녹봉을 받으며 평생 책이나 읽고 살다 가 죽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녹봉이라도 제대로 안 나오는 시기에는 그 삶마저 고달팠다.

마침 최근에 정과 인이 다니던 서당에서 문과급제자가 나왔다. 나이는 몇 년의 차 이가 있지만 결코 이정에 비해서 뛰어난 학문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어린 동생은 이미 세자의 친구로써 차기 세도가의 위용을 갖추었고 자신과 비견되는 학문을 가 진 자는 출사해서 벼슬길에 나선다. 둘 다 악의는 없다고 해도 결코 좋기만 한 소 식은 아니었다.

균은 차마 위로할 수 없었다. 이제 명종 18년이다. 역사대로라면 곧 세자의 수명은 다하게 되고 자신은 유력한 왕위계승권자가 된다. 또한 몇 년 후에는 명종마저 세 상을 떠나고 균이 조선의 국왕이 된다. 그때가 되면 여기 두 형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러웠다. 전생에서 혼자서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던 균에게는 현재의 가족들이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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