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228)

 청혼을 받다.

"주자왈 물위금일불학이유래일하며 물위금년불학이유래년하라. 일월서의라 세불아연이니 오호로의시수지건고. 명심보감 권학 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자께서는 이 문장의 뜻을 풀이해 보십시오."

" 주자가 말하기를, 오늘 배우지 않고서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올해 배우지 않고서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날과 달은 흘러가서 세월은 나를 위하여 더디 가지 않는다. 아! 벌써 늙었구나. 이것은 누구의 허물인고."

"잘 하셨습니다. 세자저하. 그럼 이번 주강(낮에 하는 공부)은 그만하고 잠시 쉬었다가 저녁수라를 드신 연유에 석강을 열도록 하겠나이다."

세자가 해석을 마치자 교수관으로 세자의 오후공부를 주관하던 이조판서 이량이 주강의 종료를 알려주었다. 그제서야 세자의 안색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녁식사를 한 후에 먹어야 하는 쓴 약을 생각하니 다시 안색이 나빠졌다. 그래서 그 약을 준비한 이량에게 말해보았다.

"알겠소. 그런데 이판 대감. 오늘도 그 탕제를 먹어야하오?"

"예, 저하. 요즘 저하의 옥체가 미령하시어 신이 특별히 준비한 탕제이옵니다."

"하나, 요즘 영상대감도 좋은 약제라고 하여 아침나절으로 다른 탕제를 먹고 있는데……."

"신도 들어서 알고 있사오나 두 약제 모두 보약이라서 많이 드시면 드시수록 좋다고 알고 있나이다. 이미 내의 양예수가 검토한 후이니 안심하고 드셔도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알겠소. 이판대감. 하긴 어마마마의 외숙이신 이판대감께서 그런 생각까지 안하실 분이 아니지요. 그럼 이판대감께서도 그만 물러가도록 하세요."

"예. 저하."

명종의 시험이 다가올수록 윤원형과 이량은 세자에게 많은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평소에는 가끔씩 하던 석강은 물론 거의 하지 않던 야대까지도 매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약한 몸에 피로까지 겹친 세자는 나날이 안색이 좋지 않아지고 자리에 눕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윤원형과 이량은 앞을 다투어 좋은 약재를 구해서 세자의 몸보양에 최선을 다하는 실정이었다.

세자가 몸이 많이 상했지만 국왕 명종은 그 사실을 제대로 몰랐다. 세자의 건강을 담당하던 내의 양예수가 의도적으로 세자의 병세를 양호하다고 거짓보고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양예수가 세자의 병을 혼자서 완치시켜서 그 공을 탐하고자 하였고 또한 두 세도가가 주는 돈과 약재를 횡령하여 상당한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세자는 원래 건강하지 못했던 몸에 과중한 학업스트레스와 피로, 그리고 보약이라는 이름의 온갖 약재로 인해서 나날이 몸이 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운동부족같은 왕족 특유의 악재까지 겹치고 명종이 더 이상 후사가 없자 왕손을 빨리보기 원하는 왕실어른들에 의해서 세자빈과의 합궁까지 이루어지는 등 건강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러한 악재들로 세자 부에게는 올해 봄이 태어나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다. 공부 때문에 놀 시간도 없는데다가 놀이동무인 하성군도 궁내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생겨도 풀 수가 없었다. 작년에 맛 본 하성군과의 재미있던 나날만 눈에 선할 뿐 눈앞에 쌓여있는 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해 7월초 드디어 명종 앞에서 세자가 배운 내용을 암기하는 시험이 치루어졌다. 시험이라고 해야 세자가 글공부를 하는 비현각에서 명종이 보는 앞에서 세자와 교수관들이 원래하던 대로 공부를 한 후 명종의 질문을 답하는 수준이었다.

"영상과 이판 모두 그간 세자를 교육시키느라 고생이 많았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얼마간 세자의 공부를 구경하던 명종은 일단은 예의상 세자의 스승인 윤원형과 이량을 치하한 후 본격적으로 세자에게 문제를 내렸다.

"그럼 과인이 세자에게 묻겠노라. 명심보감 치정 편을 한 번 암송해보거라."

"명도선생이 왈, 일명지사가 구존심어애물 어인에 필유소제니라. 당태종어제에 왈, 상유휘지하고 중유승지하고 하유부지니라. 폐백의지요 창름식지하니 이봉이록이 민고민지니라.하민은 이학이어니와 상창은 난기니라. ........ 포박자가 왈, 영부월이정간거정확이정전이면 차위충신야니라. "

"오호~, 우리 세자가 공부를 무척 열심히 했구나. 그러면 그 뜻은 무엇인고?"

명종은 예상과는 달리 세자가 대답을 잘하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저 두 세도가를 몰아내는 것은 약간의 시간만 더 있다면 결국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저 둘의 세도를 무너트리는 것보다는 자신의 뒤를 잇게 될 단 하나뿐인 세자의 학식이 더 깊어지는 것이 더욱 기쁜 일이었다. 가뜩이나 하성군과 비교되어 걱정했는데 그 걱정을 해소시켜 주는 세자의 모습이 장해보였다.

명종이 기뻐하자 옆에 있던 윤원형과 이량도 한숨을 돌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들의 예상보다도 세자가 답변을 잘해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세자가 암송하는 부분을 듣던 윤원형은 잠시후 기뻐하던 표정이 얼굴에서 사라졌다. 명심보감 치정편이라면 정치의 근본은 공정함과 청렴함이라는 내용의 글이다. 명종은 세자의 입을 빌려서 자신과 이량의 허물을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주상전하가 이 숙부를 쳐낼 생각만 가지고 계신다니....'

이렇게 윤원형의 얼굴에 근심이 보이는 반면 이량의 얼굴은 기쁨만이 가득했다. 이로써 자신의 세도를 지켰다고 생각하니 근처에 아무도 없다면 춤이라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에도 기쁨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창백한 얼굴로 바뀌더니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외쳤다.

"저...저하!"

"세자저하!"

"세자저하께서 혼절하셨다. 어서 어의를 부르라."

순식간에 서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글을 잘 암송하던 세자가 갑자기 정신을 읽고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명종이 체통을 잃고 서둘러 달려와서 쓰러진 세자를 안았다. 다행히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세자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급히 달려온 어의등이 침을 놓아서 급한 고비를 넘겼지만 세자는 자리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곧 세자는 내관들의 등에 업혀 처소인 자선당으로 옮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중전 심씨와 대비 윤씨도 급히 세자의 처소인 자선당으로 달려왔다. 중전 심씨는 외동아들인 세자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간호를 하기 시작했다. 강인한 할머니인 대비 윤씨마저도 하나뿐인 손자의 상태를 보고는 근래에 보인 적이 없던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세자빈 윤씨가 옆에서 훌쩍거리며 울었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당장 명종마저도 정신을 반쯤 잃고 맥없이 세자의 상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당장 궁내는 바쁘게 움직이는 내관과 궁녀들로 인해 부산해졌다. 내의원전체에는 비상이 걸렸고 전국의 사찰에는 세자의 완쾌를 비는 불공이 행해졌다. 동시에 조정중신들은 급히 대궐로 입궐했고 중신들의 부인들도 사찰을 찾아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리고 몇몇 기관들은 그 임무를 포기하고 세자의 괘유를 위한 임무들을 명령받았다. 동시에 대궐과 한성부전체의 경계병력에 비상경계령이 하달되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헉~!"

마침 낮잠을 즐기고 있던 균은 악몽을 꾸다가 일어났다. 두 번 다시는 보기 싫던 최영이 자신 앞에서 빙그레 웃는 꿈을 꾼 것이다. 어렸을 때 최영에게 끌려갈 뻔했던 균에게는 그보다 더한 악몽은 없었다. 악몽 때문인지 땀을 많이 흘린 균은 냉수를 한 그릇 마시고 놀란 마음을 달랬다. 그것도 모자라서 냉수를 한 잔 더 마시는 순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대문을 열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성군 영감, 속히 입궐하시라는 주상전하의 하교가 계셨습니다. 소관을 따라서 어서 입궐할 채비를 차려주십시오."

"......"

균은 손에 들고 있던 물그릇을 떨어드렸다. 이제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라서 자신이 필요한 서연은 곧 중단된다. 거기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입궐하라는 이야기는 곧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한 세자의 수명은 얼마남지 않았다. 그리고 염라대왕 최영의 꿈까지...

'세자의 명이 다했구나....'

"영감, 위급한 일이옵니다. 속히 채비를 차려주십시오."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균은 신속히 자신의 관복을 차려입고는 선전관을 따라서 남여를 타고 대궐로 향했다. 균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했다. 어느덧 균은 선전관의 안내를 받으며 자선당으로 향했다.

"주상전하. 하성군 입시이옵니다."

"....어서 들게 하라."

목이 메어오는 명종의 허락이 떨어지고 균이 세자의 방에 들어섰을 때 방안에는 어의와 내관 외에도 명종과 중전 심씨 그리고 세자빈 윤씨가 있었다. 중전 심씨와 세자빈 윤씨는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고 명종역시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였다. 균은 명종에게 목례만 취한 후 구석에 앉아서 멀찍이 누워있는 세자를 바라보았다. 벌써 안 본지 반년도 넘은 세자는 균이 척보기 에도 가망이 없어보였다.

어떻게 보면 현 왕실가족 모두 무척이나 불행한 사람들이다. 대비 윤씨는 천신만고 끝에 제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권력을 잡았는데 손자 때의 대가 끊어져서 다 헛수고가 된 셈이고 세자빈은 하나뿐인 남편을 잃고 이제는 산사에서 비구니로 평생을 살아야하는 운명이며 명종과 중전은 하나뿐인 자식을 먼저 잃고 자손이 끊어지는 비극을 맛보아야 한다.

그런 비극적인 가족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균은 조용히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분위기를 타서인지 아니면 어린 생명이 사그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인지 아니면 기뻐서 우는 건지는 균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관복을 조금씩 적시어가는 눈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세자의 방이었지만 가끔씩 훌쩍이는 중전과 세자빈,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어의와 내관들이 내는 작은 소리를 빼고는 세자의 가쁜 숨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방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날 명종은 중전과 세자빈의 건강을 우려해서 교대로 간호하도록 명을 내렸다. 하지만 자신도 잠을 한숨도 못 잔채 강녕전 자신의 침소에서 눈물만을 흘렸다. 이미 대비 윤씨는 자신의 처소 근처에 준비된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었고 당상관급 이상의 고위관리들은 이리저리 좋은 약재를 구하러 다니거나 궁내의 궐내각사에서 대기 중이었다. 하성군 이균은 어느새 탈수증세를 보일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라 근처의 빈방에서 쉬게 하였다.

다시 다음날 명종은 영의정 윤원형, 좌의정 이준경, 우의정 심통원등을 불러서 대사면을 단행하여 세자의 위중한 병세를 돌려보자는 말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이가 있으면 하늘이 왕족에게 병을 내려서 경고한다고 믿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세자의 병세가 위중하니 옥문을 열어서 죄가 없는 이들을 풀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 마음이 망극하여 그러는 것이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주상전하의 마음이 망극하신데 신들이 어찌 감히 다른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당장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하들은 단 한 마디의 반대를 하지 않고 즉시 대사면을 준비했다. 이미 조정의 업무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세자의 병세가 위중함이 도성전체에 퍼지어 한성부역시 침울한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준비되었던 대사면이 단행되었지만 세자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세자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명종은 물론 모든 왕실가족과 대소신료들이 동궁전으로 모여들었다. 균은 고작 종 이품관에 지나지 않는지라 세자가 보이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있다가 명종의 명으로 그나마 가까운 자리에서 세자를 지켜보았다. 이제 세자는 숨쉬기도 어려운 듯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바쁘게 움직이던 어의의 손이 순간 멈추었다. 그리고는 명종과 중전 심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부...부야............."

하나뿐이던 자식을 잃은 어미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대신들과 밖에 있던 궁녀들까지 그 울음소리에 동참했다. 이제 명종도 애써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대비 윤씨는 충격에 몸을 떨었고 세자빈 윤씨는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균도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흐느꼈다.

명종 18년 서기로는 1563년 7월 6일 새벽. 왕세자 이부가 경복궁 자선당에서 졸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