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228)

 청혼을 받다.

죽은 세자 이부는 '순회' 라는 시호를 받아서 순회세자라는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이는 명종이 직접 내린 것으로 하나뿐인 자식을 기억하려는 명종의 마음이 담긴 시호였다. 그렇게 명종 등의 왕실가족들은 무척이나 슬퍼했지만 그의 장례는 예상과는 달리 검소하게 치러졌다. 이미 흉년으로 백성들의 고충이 큰 상황이라서 큰 장례식을 열기에는 무리가 따랐고 또한 더 이상 죽은 세자를 중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명종의 유일한 적장자인 왕세자 이부의 사망은 조선의 모든 정치세력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즉 지금까지의 후계구도와 그에 따른 권력구도에 일대변혁을 예고하는 사건인 것이다. 현재 명종의 나이 갓 30세 젊은 군주이기에 또 다른 대군의 탄생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명종이 지금까지 얻은 아이가 죽은 세자 하나였기에 기대하는 사람은 적었다.

거기에 명종은 아직 젊은 군주이지만 몸이 허약하여 자주 자리에 눕는 경우가 많았다. 순회세자가 죽기직전에도 이미 고뿔에 걸려서 고생하였고 세자가 죽은 후에는 내의원에서 강제로 탕제를 먹게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이는 명종역시 세자처럼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신하들 사이에서는 명종의 다음 후계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말이 조심스럽게 오가는 실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현 국왕의 형제들인 제 11대 국왕 중종의 서왕자(후궁소생의 왕자)들이 왕위에 가장 우선권이 있지만 현 국왕 명종은 그 형제들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데다가 아직 30살의 젊은 왕이고 더욱이 뛰어난 왕재는 이미 문정왕후에 의해 제거되어 사실상 서왕자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아들들이며 명종의 조카에 해당되는 종친들이 차기조선국왕으로 물망에 올랐다. 각 정치세력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지지하는 종친들이 약간은 다르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아니 사실상 확정적인 인물이라면 바로 하성군 이균이었다.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이미 명종의 총애를 받는다는 점과 죽은 세자의 좋은 친구였다는 점, 종친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몸이 건강하다는 점 등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특히나 아버지인 덕흥군이 죽은 후라서 양자로 들여 세자를 삼기도 편하고 또한 외가와의 관계가 소원하여 외척세력의 영향력이 적다는 장점도 있었다. 거의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다. 따라서 유력한 양반들은 세자의 상이 끝나는 대로 하성군과의 연결을 위한 준비로 부산했다.

하지만 이처럼 뜨는 해가 있다면 지는 해도 있는 법이다. 하성군이 차기왕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평가되어 눈치 빠른 자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고민하는 사이 윤원형과 이량의 집에는 그 많던 청탁인사가 줄어들어 거금을 싸들고 가도 삼일을 기다려야 얼굴 한 번 볼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사실상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이량의 경우에는 함부로 한약을 써서 세자의 병세를 악화시켰다는 의혹과 함께 전에 벼슬을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 들통 나서 정치적인 입지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윤원형과 양예수는 모든 책임을 이량에게 전가하는 상태였고 실제로 양예수가 알고 있던 약재와 이량이 알고 있던 약재가 달랐다는 사실까지 들어났다. 물론 독약은 아니었지만 세자의 체질에는 전혀 맞지 않는 약재였다.

사실 중전 심씨의 외숙이며 명종의 지원으로 권력을 유지하던 이량이 고의로 세자의 병을 약화시켰을 가능성은 없지만 이미 자식을 잃고 분노한 명종의 판단은 그렇지 않았다.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언론을 담당)에서 이량의 허물을 탓해도 보호하던 명종이 삼사의 청을 받아드려 이량, 이감, 신사헌, 권신, 이정빈, 윤백원, 홍천민등 이량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선 것이었다.

표면적인 숙청이유야 이량이 조정내의 사림세력을 숙청하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다가 중전의 아버지인 심강과 그의 아들 심의겸의 탄핵을 받고 밀려난 것이지만 실제로는 명종의 분노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서 조정내에서 이량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되었고 이량은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사림들이 등용되어 사림의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때 최대의 적으로 성장했었던 이량의 갑작스러운 몰락에도 윤원형은 기뻐하지도 못하고 몸을 사려야 했다. 윤원형 역시 세자의 죽음에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비 윤씨가 살아있어서 명종이 아직 칼을 들어대지는 못하지만 손자를 읽고 실의에 빠진 대비 윤씨는 정치에 관심이 크게 줄었다. 따라서 대비 윤씨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윤원형의 권세도 같이 줄어들 수밖에는 없었다.

더욱이 세자의 죽음후 건강이 갑작스럽게 나빠지는 대비 윤씨를 보는 윤원형의 가슴은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대비 윤씨가 죽는 날이 바로 자신과 정난정이 죽는 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원형은 자신의 권세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다.

"난정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아직도 대비마마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다니... "

"이는 필시 대비마마께오서 돌아가신 세자저하을 잊지 못하셔서 잠시 자리에 누우신 것뿐이옵니다. 대감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

이량의 몰락과 대비의 와병을 지켜보고 불안해하는 윤원형을 보고 정난정은 안심을 시키려고 좋은 말을 했다. 하지만 자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대비가 환갑을 넘긴지도 몇 해나 지나서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비마마도 이제 그 춘추가 예순하고도 셋이다. 지금 당장 승하하신다고 한들 누구하나 놀랄 사람이 없다. 거기에 하나뿐인 손자를 잃어서 삶의 의욕마저 크게 상실하셨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 고?"

"대감, 이럴 때일수록 심기를 굳건히 하시어야 합니다. 대비마마께서 자리에 누워계시지만 아직 위독하신 것도 아닙니다. "

"설사 이번에 자리에서 일어나신다고 하여도 나이가 많으신 대비마마가 승하하실 날이 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나를 안 좋게 보시는 주상전하께서 가만히 계시지만을 않으실 게야. 나도 이량이처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지겠지."

"대감...."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너도 보았지 않느냐?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뇌물을 싸들고 찾아와서 아부하던 자들로 온 집안이 마치 시장바닥 같았던 때는 이미 가고 지금은 흔한 방문객 하나도 없이 온 집이 썰렁하지 않느냐? 역시나 옛날 사람들의 말대로 권력이란 허무한 것이구나."

"....."

정난정 역시 이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자신들의 권력과 부는 줄어든 것이 없다. 대비윤씨도 살아있고 윤원형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벼슬을 가지고 있으며 윤원형이 밀어준 자들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자신들의 앞날을 맑다고 하지 않는다. 그 반증으로 그 많던 청탁들이 세자의 죽음이후 말라버린 샘물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세자의 죽음으로 윤원형이 입은 타격은 예상보다 크다. 먼저 세자의 사망에 주원인이 되는 무리한 서연을 강행했다는 이유로 간접적이나마 세자의 죽음에 연관이 되었다. 동시에 권력의 기반이 되는 대비 윤씨의 상황도 좋지 않아 그 전만큼 많은 지원을 받기는 불가능해졌다. 또한 총력을 기울여 자기친척의 딸을 세자빈으로 만들어서 대비의 사망이후에도 장기집권을 노렸지만 그 노고가 아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죽은 세자 이부는 2명의 세자빈이 있었다. 첫째가 황씨이고 둘째가 지금의 윤씨인데 이중 황씨는 건강이 나빠서 세자빈의 자리는 윤씨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두 세자빈 모두 따지고 보면 다 윤원형의 친척들의 딸들로 내명부를 관장하는 대비 윤씨의 적극적인 지지와 윤원형의 엄청난 노력으로 두 번이나 자신의 가문에서 세자빈을 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음대의 중전이 되어 자신의 집권을 도와주어야 할 세자빈 윤씨는 이제 청상과부가 되어 산사에 들어가 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공이나 올려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윤원형과 정난정은 역시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해야하며 다른 대책을 생각해내느라 밤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반대로 아직 세자의 장례절차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하성군 이균의 인달방 자택에는 균을 한 번이나마 만나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관직이 없거나 낮은 자들이 태반이었는데 균이 이끌고 온 호위대와 정집사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 그러니까. 하성군 영감을 한번만 뵙게 해주시오."

"영감께서는 다른 일로 바쁘시니 다른 날 오시지요. "

"어허! 그게 벌써 며칠째 하는 이야기요? 내가 영감을 뵈려고 충청도에서 산 넘고 물을 건너서 힘들게 올라왔소. 이렇게 힘들게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다니 이런 경우가 천지간에 어디 있겠소? "

"허허허, 그것 참 신기하구만. 어떻게 충청도에서 올라온 사람이 충청도 사투리를 하나도 쓰지 않다니... "

"하하하.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거 정말 대단하구려. 하하하."

사람들 가장 앞에 서서 균을 만나게 해달라던 자칭 충청도양반이 충청도 사투리를 하나도 쓰지 않음을 다른 사람들이 꼬집자 충청도양반도 부끄러움을 아는지 얼굴이 빨게 져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 뒤 사람이 다시 균을 만나게 해달라고 정집사에게 매달렸다.

"나는 이조참판을 지내신 홍문위영감의 자손인 홍무상이라고 하오. 하성군 영감을 만나야겠으니 어서 문을 여시오."

"영감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시는 중입니다. 그러니 다른 날 다시 오시지요."

"어허! 내말이 말 같지 않은가? 어디서 중인 나부랭이가 양반 앞을 막는 것인가? 어서 문을 열고 영감께 안내하지 못할꼬? "

"어디서 감히 큰 소리를 치는 게요! 여기가 하성군 영감의 자택임을 모른 것이오. 이건 다 하성군 영감의 명이거늘 하성군영감께서 자신의 명을 어긴 자들을 좋아할 것이라 믿었소? 당장 돌아가시오. "

이번에는 위압형이었다. 하지만 호위대 10명은 비금도의 경비단에서 고르고 고른 최정예의 병사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문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큰소리치는 양반도 큰소리만 칠뿐 감히 들어갈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다.

"애들아 모셔 다 드려라."

"예! 집사어른."

"어허 이게 무슨 무뢰한 짓이냐? 놔라! 이놈들아!"

하도 고함을 지르자 집안까지 들려서 자기주인들의 심기를 거슬릴까 우려한 정집사의 명에 의해 소리만 질러 양반은 두 명의 호위병에게 그대로 끌려갔다. 한 명이 아예 끌려가자 모여 있던 자들은 조금 조용해졌다. 하지만 균의 집 앞에서 실랑이는 계속 벌어졌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는 자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한 명이 명종의 밀명을 받고 사복을 입은 채 숨어있던 선전관이었다. 선전관은 그런 광경을 보면서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역시나 주상전하의 말씀대로 저런 역적 같은 놈들이 많이 있었다니... 아직 안타깝게 요절하신 세자저하의 시신에 채 온기가 가시지도 않았거늘. 거기다 숙연하게 보내야 할 날에 마치 시장바닥같이 시끄럽다니... 하성군영감은 무엇을 하기에 저런 작자들을 그냥 놓아두고 있는 것인가? 설마 세자저하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아닌가? '

그렇게 선전관이 저런 무리들을 몰아내지 않고 있는 균마저 욕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대문이 열렸다. 만나고 싶어 하던 모여 있던 무리들은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하성군 균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저..저런. 하성군영감이 눈이 퉁퉁부었구만. "

"소문에 세자저하의 친구라고 하더니 진짜 울고 있었던 모양일세."

"빨리 우리는 떠나세. 아무래도 하성군 영감에게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아~."

"이...이봐. 같이 가세~. "

선전관의 귀에 들리는 말 이외에도 선전관의 눈에는 정말 눈이 퉁퉁 부운 하성군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많이 울었는지 궁에서 볼 때와는 달리 안색도 안 좋았고 무엇이 분한지 몸까지 떨고 있었다. 역시나 자신처럼 저런 자들에게 분개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하성군의 말도 들려왔다.

"그대들은 이 나라 조선의 신하들인가? 아니면 이곳저곳을 떠도는 철새 떼들인가? 아직 세자저하의 시신에 온기가 가시지도 않았거늘. 저하를 생각하면서 경건하고 조용해야할 도성 한복판에서 무엇이 즐겁다고 떠들어대는 것인가? 이 곳은 그대 같은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니 당장 사라져라. 아니면 즉시 포도청에 연락하여 그대들을 다 하옥시키고 그대들의 죄상을 주상전하께 고하리라. 정집사. 하인들을 동원해서 머뭇거리는 자들을 모두 잡도록 하게."

"예. 영감. 얘들아!"

균의 호통소리와 정집사의 고함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거드름을 피우고 팔자걸음을 걷던 양반들은 체면도 불구하고 뛰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선전관은 저렇게 많은 양반들이 달아나는 진기한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 광경에 잠시 정신을 파는 사이에 선전관의 주위에는 웬 떡대좋은 장정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또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못된 놈을 보았나. 내가 특별히 시간을 주었거늘 그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다니. 당장 저놈을 포박하여 일단 포도청으로 넘겨라. 내 꼭 주상전하께 고하여 저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어어어. 자...잠깐만."

선전관이 어어어하는 사이에 약간의 구타가 가해지고 선전관은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몸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균의 호위병들에게 잡혀서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가끔씩 버둥거리는 선전관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균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균이 집안에 들어서자 부엌에서 계집종 하나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셋째도련님. 도련방에 있는 고추은 이제 치워도 되겠습니까? "

"오냐. 이제는 필요 없으니 치워도 된다. 그런데 정말 눈물이 흐를 만큼 매운 고추이더구나. 덕분에 많이 울었단다."

"예, 도련님. 쇤네들도 눈물을 쫙 빼고 있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가서 일 보거라."

균은 계집종을 보내고 자신의 방에 앉아서 한껏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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