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을 받다.
"과연 하성군이 그리하였단 말이냐?"
"예. 전하. 덕분에 소신은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곤장을 맞을 뻔하였습니다."
"그래. 잘 알겠다. 수고가 많았으니 그대는 그만 돌아가 쉬도록 하라."
"예. 전하."
얼굴에 조금 붓기가 있는 선전관이 나가고 나자 명종과 중전 심씨는 마주 앉았다. 세자의 장례로 정신이 없던 명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친들의 집으로 선전관을 파견하여 상황을 주시하게 했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권력의 냄새를 맡은 날파리들이 각 종친의 집에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려든 곳이 옛 덕흥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다른 종친들은 은밀히 만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고 파견나간 선전관들이 보고한 반면 옛 덕흥군의 집으로 파견나간 선전관은 오해를 받아서 포도청에 끌려갔을 정도로 하성군은 단호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거기다 얼마나 울었는지 하성군의 눈가가 퉁퉁 불어 있어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는 보고까지 받은 명종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런 명종을 지켜보던 중전 심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하성군이 그렇게 우리 세자를 생각해주었다면 정말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과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아직까지도 하성군이 세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니... 우리 세자도 죽기 전에 좋은 동무를 하나 만들어두고 가서 저승길이 조금이나마 편할 것이라 생각하니 과인도 기쁘오."
"하오나 전하. 하성군에게 찾아간 자들은 찾아내서 벌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모리배들이 숨을 쉬고 있다면 우리 세자도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할 것입니다."
평소에 온순한 편이던 중전 심씨도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인지 세자의 상중인데도 하성군을 찾아가 시끄럽게 한 자들을 벌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명종은 고개를 내저었다.
"중전. 세상의 인심이란 다 그런 것이요. 세자가 아니라 과인이 죽었다해도 그럴 자들은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오."
"전하! 어인 말씀이십니까? 그런 망극한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명종이 자신의 죽음을 거론하자 중전 심씨는 놀라서 크게 말했다. 그런 중전을 보는 명종은 안타깝고 슬프기만 했다.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중전이 남편인 자신마저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슬퍼할까를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나올 듯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아는 일이다. 착한 중전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의 일이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일국의 왕인 자신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허허. 중전. 과인은 아직 건강하니 그런 걱정은 아니 하셔도 되오. 또한 하성군은 총명한 아이오. 그런 자들에게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서원군(윤원형)같은 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이라오. 아마도 그런 자들은 나중에 하성군이 알아서 찍어낼 것이니 우리는 그 동안 부(세자)의 일만 생각하도록 합시다."
"예. 전하."
명종은 어느 정도 세자가 요절한지 보름 만에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옛날에는 궁궐에서 왕족이 죽으면 잠시라도 다른 궁전으로 국왕의 처소를 옮기는 경우가 있었다. 처소를 옮긴 명종은 그간 밀린 일을 처리하며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달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왕실에서도 그 슬픔이 줄어가기 시작하자 조정대신들은 본격적으로 명종의 후계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나온 결론은 크게 2가지였는데 하나는 새로운 대군이 태어나기를 기다리자는 의견이었고 하나는 종친들 교육시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명종의 나이는 30세, 중전의 나이는 32세였는데 무려 18년간 세자 부를 제외하고는 자녀가 없었고 또한 여러 후궁도 있었지만 서자도 태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남자 쪽의 문제라는 것을 누가보아도 알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불임은 무조건 여자 쪽의 문제로 여겨서 명종은 창덕궁에서 새로운 후궁들을 간택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역시나 고대하던 아기는 태어나지 않았다.
당시 영의정이며 서원부원군으로 있던 윤원형은 제법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명종이 후궁들에게서도 아이를 얻지 못할 것을 거의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던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을 고심하던 윤원형에게 정난정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대감, 소첩에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난정아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대감, 지금 즉시 하성군에게 매파를 보내어 청혼을 하시옵소서."
"하성군에게 청혼을? 그럼 우리 막내딸을 하성군에게 시집을 보내자는 말이냐?"
"예. 대감. 소첩이 생각하기로는 하성군은 분명히 다음 보위를 잇게 될 종친입니다. 비록 주상전하께서 후궁을 더 들였다고는 하나 결코 좋은 소식이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감께서 하성군을 사위로 맞는다면 현 주상전하와 대비마마께서 승하하신 뒤에 대감께서 새로운 주상전하의 장인이 되시어 계속 세도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정난정의 말을 들은 윤원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 혼인관계만큼 든든한 관계는 없다.
옛날부터 혼인관계를 혈맹이라고 하여 각 세력간의 협력에 많이 쓰이던 방법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전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과 그의 29명의 부인이다. 그러다가 윤원형은 다른 생각이 미쳤는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성군은 나로서도 함부로 건들다가는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나의 말로 함부로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또한 세자로 책봉될지도 모르는 하성군이 그간 사이가 소원하던 우리와의 혼인을 쉽게 수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오나 대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옵소서. 대감의 세도은 조금 쇠퇴하였기는 하지만 아직 조선천하에서 감히 대감의 세도를 능가하는 자는 없습니다. 하옵고 하성군은 차기 보위에 가장 근접한 자이나 아직 확정되지도 않았고 세력도 없습니다. 대감과 하성군이 손을 잡는다면 대감은 임금의 국구(장인)으로써 계속하여 세도를 누리게 되고 하성군은 다음 보위를 확실히 차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성군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그렇게 함부로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만 있어도 보위에 가까운 하성군이 어찌 우리와 혼인을 맺고 주상전하의 눈 밖에 나려고 하겠느냐? 역시나 힘든 일이다."
"대감. 아직 대비마마께서는 건재하십니다. 제가 나중에 입궐하여 대비마마께 말씀을 드리면 주상전하도 반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또한 주상전하께서도 뒤를 이을 하성군이 너무 세력이 없다면 나중에 정치를 하면서 고생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아실 것이니 그렇게 나쁘게 만은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지금부터라도 더욱 몸을 사려서 주상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히지만 않는다면 전하의 외숙부이시며 후계자의 장인이 되는 대감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니 한번 시도할 만한 일입니다."
"....과연 듣고보니 하성군도 달리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구나. 그럼 난정이 네가 좋은 매파를 구해서 한번 청혼을 넣어보거라."
"예. 대감. 패물도 넉넉히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정난정의 말을 들은 윤원형은 그간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폈다. 듣고 보니 하성군이 쉽게 거부할 혼사가 아니었다. 잘만 된다면 자신은 임금의 장인이 된다. 조선 왕실은 친척인 종친에 대해서는 조금 엄하게 간섭하였지만 외척에 대해서는 많은 특혜를 주어서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종친들이야 종친부의 실권은 젼혀없는 벼슬을 가지고 그 녹봉으로 한양에서만 생활한 반면 외척들중에서 먼저 왕비의 아버지는 당장 부원군(정1품 공신)의 칭호와 함께 영부사(정1품관직. 다른 고위직책과 겸하는 경우가 많다.)의 관직이 떨어진다. 동시에 다른 친인척들도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는 것이 기본이다. 현재의 세도가인 조선삼흉 역시 모두 대비와 왕비의 가족이다.
그래서 윤원형도 한번 하성군과 혼인을 맺을 생각도 해보았는데 지금까지 하성군의 행동을 보아 한마디로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런데 정난정의 말을 들으니 성사될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대비 윤씨가 죽으면 같이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한 번 청혼이라도 해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윤원형은 즉시 동의했다.
윤원형에게는 정난정과의 사이에 많은 자식이 있었는데 천한 신분의 어미를 두었지만 윤원형의 세도가 워낙 강했던 지라 모두 양반사대부들의 자녀와 결혼을 하였다. 대부분 결혼을 하였기에 윤원형에게는 시집을 안 간 딸이 하나 있었는데 제 어머니인 정난정을 닮아서 상당한 미소녀였다. 그래서 평상시 윤원형이 자랑하고 아끼던 딸이었지만 하성군과의 혼인은 가문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서 아무런 언급없이 바로 매파에게 언질을 주었다.
정난정이 구한 매파는 장안에서도 소문난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 매파의 뒤에는 균의 어머니인 정씨부인에게 선물할 비단과 노리개가 들어있는 상자를 맨 짐꾼이 따라왔다. 매파로써도 상당히 거물급 인사들 간의 혼담이었고 혼사만 잘 된다면 정난정이 큰 집 한 채를 내려주겠다고 약속한데다가 선수금으로 준 돈도 장난이 아니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30년경력을 다하여 혼담을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파는 균의 집 앞에서 배치된 장정들을 보고는 도무지 말을 걸 엄두가 생기지 않았다. 이미 장정 10여명이 대문 앞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저번에 균이 호통을 친 이후에 포도청에서 파견한 포졸들까지 아예 진을 치고 대기하는 상황이라서 마치 병영을 떠올리게 했다. 거기다 가끔씩 아무것도 모르고 접근한 양반네들은 바로 포도청으로 직행해야하는 상황이었으니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었다.
한 참후에야 매파는 용기를 내었다. 그래도 자신은 영의정이신 서원부원군 대감댁의 혼사를 맞고 있는 사람이니 만큼 감히 포졸이나 하인들이 막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어께를 피고 대문으로 향했다. 당연히 장정들과 포졸들이 막아섰다.
"이 곳은 덕흥군부인마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이다. 잡상인은 출입할 수 없으니 당장 돌아가라. 아니면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음음....수고가 많소. 나는 현재 영상대감이신 서원부원군댁에서 나온 아무개라 하는데 덕흥군부인마님을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안내해주시오."
"현재 군부인마님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었소. 그러니 돌아가시오."
"하지만 나는 영상대감댁의 정경부인마님의 말씀을 전해하러 온 사람이오. 그러니 어서 안내하시오."
"어허 이 사람이 어디서 위세를 떠는 게요?"
매파는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지만 장정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간 윤원형의 자식들을 중매하러 다니면 당장 귀빈대접을 받던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매파는 마음 같아서는 더욱 위세를 떨고 싶었지만 자신이 약세라는 점을 잘 알기에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저들 뒤에는 바로 하성군이 있다. 혼인상대인 하성군의 심기를 상하면 좋을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실랑이가 계속되자 어수선한 소리가 집의 본채에 있는 안방까지 울렸다. 마침 안방에는 어머니 정씨와 균이 같이 있었고 마침 균은 어머니를 안마해주고 있었다.
"왠일이냐? 네가 이 어미의 어께까지 다 주물러주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어머님. 소자가 어머님 걱정을 자나깨나 하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소자가 송구스럽사옵니다."
"호호호. 우리 균이가 효자구나. 그런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안 들리느냐?"
"또 저를 만나겠다고 오는 간신배들이겠지요. 저런 자들을 만나면 돌아가신 세자저하께 죄를 지는 것이니 소자는 보지 않을 것이옵니다. 어머님 이번에는 다리도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여자 목소리가 아니냐?"
'헉~!'
균은 어머니의 예리한 지적에 잠시 주춤거렸다. 사실 균이 이렇게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이유는 좋은 뜻도 있지만 매파같이 생긴 사람이 보인다는 보고를 듣고 시작한 것이었다. 균이 생각하기로는 다른 가문에서 자신들과 협력하자는 의미로 청혼을 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그것만큼 확실한 협력방법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거절하면 되지만 현재의 균으로써는 유력한 세도가들과는 최소한 적대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에 균은 적당한 이유로 대고 거절하기로 했다.
하지만 자식의 혼사를 관장하는 것은 바로 부모님. 균에게는 어머니 정씨였다. 그다지 온순하다고 평가하기에는 힘든 어머니가 윤원형등의 청혼을 받는다면 그 자리에서 사생결단이 날 수 도 있었다. 어머니는 윤원형등을 남편을 빼앗아간 원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큰 일이 나서 적대관계가 되는 것 보다는 아예 원천봉쇄가 낫겠다는 생각에 균이 이처럼 어머니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