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28)

 청혼을 받다.

"균아, 이 어미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게 저...."

균은 거의 들통 난 이상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균의 말을 듣고 난 후 어머니 정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정난정이 보낸 매파 같지만 그래도 대충해서 그냥 넘겨 달라 이 말 이냐?"

"예. 어머님. 아직 소자의 힘으로는 윤원형을 압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조금 참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안 된다고 좋은 말로 넘겨주십시오. 비록 지금은 우리 집안이 수세이지만 대비마마가 승하하시면 소자가 기필코 본때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참으셔야 합니다."

"그래 네 말을 잘 알겠다."

균은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밖에 있던 매파를 어머니와 만나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균은 같이 할 수 없기에 근처에서 조용히 방안의 기색을 살폈다. 두 사람이 하도 조용히 이야기를 하기에 균은 대화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험악한 분위기는 아닌듯했다.

"그러니까. 내 셋째 아이와 서원부원군댁의 막내따님을 혼인시키자는 말이오?"

"예. 군부인마님. 서원부원군댁의 막내따님이라면 장안에서 소문날 정도로 인물도 아름답고 가진 재주가 많아서 서원부원군께서도 특히 아끼시는 따님이십니다. 인물, 품성, 재능, 가문 모두 흠집을 곳 하나 없는 신부감이지요. 군부인마님의 며느리감으로는 이보다 더 나은 신부감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 아직 우리 균이는 고작 열두 살이오. 가끔은 어린애처럼 구는 아이인데 벌써 혼인을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소."

"열두 살이면 충분히 사내노릇을 할 수 있는 나이지요. 옛날부터 일곱 살만 되어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하여 남녀아이를 같은 방에 두지 않았는데 이제 열두 살이면 충분히 혼례를 올릴만한 나이입니다."

"하지만 아직 손위의 아이들도 장가를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셋째 아이부터 장가를 들 수 있겠소? 나는 먼저 큰 아이의 혼사가 더 급하지 셋째는 아직 장가들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이야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어머니 정씨는 균의 예상보다도 잘 거부하고 있었다. 아직 손위의 두 아이가 장가를 가지 않았는데 셋째가 장가를 간다는 것은 당연히 곤란한 일이었고 충분한 거절사유가 되었다. 하지만 매파에게도 비장의 한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첫째 도련님과의 혼인을 어떻겠습니까? 첫째 도련님이면 서원부원군댁의 막내따님과 나이차이도 더 적으니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정경부인(정난정)마님께서는 군부인마님의 세 아드님중 누구와도 혼인할 용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

정난정은 혹시나 균이 혼인을 거부할까바 많이 고민을 했다. 윤원형에게 큰소리 쳐났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한다면 보통의 낭패가 아니었다. 그래서 균과의 혼사를 끝까지 거부하면 균의 형제들과의 혼사를 추진하라는 밀명을 내린 것이다.

물론 윤원형과 정난정의 입장에서는 하성군 균과 혼인을 맺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은 일이지만 아직은 어린 아이라는 핑계로 거부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그 다음의 방법으로 균의 형제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 균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목숨이라도 보전하던지 아니면 형제들 간의 분란을 일으키는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혼인관계는 대등한 관계라면 동맹의 의미였지만 이번처럼 균이 약세이고 윤원형이 강세라면 시집을 온 윤원형의 딸을 균이나 어머니 정씨도 함부로 대하기는 어렵기에 충분한 분란의 소지를 안겨줄 수 있었다. 이 경우 균은 그동안 연기해서 따둔 명종의 점수를 많이 까먹게 된다. 따라서 윤원형으로써는 강력한 신흥적대세력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한 수 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정씨는 난데없이 큰 아이 하원군 이정과의 혼사를 추진한다는 말에 특별히 거절한 말을 찾지못하여 다음에 의논하자는 말로 간신히 일을 미루었고 매파는 웃으면서 균의 집을 떠났다. 어머니 정씨는 즉시 균을 불러서 제반사정을 이야기하고 대책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균은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정말 어머님께서 화를 내신다거나 결례에 해당하는 일을 아니하셨습니까?"

"그렇단다. 하나 네 말을 믿고 이번에는 일부로 참았다마는 까닥하면 네 큰 형이 장가를 들게 생겼다. 혼인을 해서 정난정의 여식이 들어오면 우리 집안에 큰 해가 될 것인데 따로 생각한 것이 없느냐?"

"어머님이 잘 처리하셨습니다. 앞으로 그 매파가 이 곳에 다시올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어머니 정씨는 균이 저렇게 태평하게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균이 정도의 아이라면 이번 혼사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이인데 태평하다 못해서 잘 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일단 어머니 정씨에게 별 일 아니니 안심하라고 한 후 방을 나온 균은 정집사를 불러서 무엇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대충 이번 일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던 정집사는 균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무엇을 사러가는 것처럼 차리고는 하인 네 명을 데리고 대문을 나섰다.

지난번에 등장했던 선전관 윤정우는 한참후에야 얼굴에 붓기가 빠져서 다시 각 종친들의 동향감시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야 절대로 하성군의 집은 피하고 싶었지만 지난번 사건의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하성군의 집은 돌아가면서 감시하도록 하여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성군의 집 근처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 비단옷을 입은 늙은 여인 하나가 그 살벌한 하성군의 집앞에 가서 당당히 말을 하더니 잠시 후 웬 상자를 등에 진 짐꾼 하나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무척 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그 여인은 웃는 얼굴로 짐꾼은 빈 지게를 멘 채 하성군의 집을 나섰고 호기심이 생긴 윤정우는 그녀의 뒤를 쫓기 위해서 숨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조심스럽게 따라가던 때에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 이봐!"

윤정우가 뒤를 돌아보니 꿈에도 잊지 못할 떡대 네 명과 그 떡대를 지휘하던 중늙은이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장을 보러 가는지 네 떡대는 지게와 막대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을 보더니 지게는 저만치 내팽개치고 두 손으로 막대기를 잡았다. 순간 겁이 난 윤정우가 발뺌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 무슨 일인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게요?"

"요놈 잘 만났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 근처에서 얼쩡거려? 애들아 이놈이 정신이 들 때까지 매우 쳐라."

"예. 집사어른."

"이... 이보시오. 사람을 잘못 보았소. 억!"

"눈가에 멍자국이 선명한데 거짓말까지해. 오늘은 포도청에 넘길 필요도 없다. 그냥 여기서 잡자. 더 세게 쳐라."

"퍽! 퍽!"

"으악~!"

그런데 떡대들이 윤정우를 폭행하고 있지만 저번보다는 약하게 때리고 있었다. 그래서 윤정우는 정신을 잃지 않은 채 정집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집사는 균의 명령으로 매파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는 자를 골라서 살짝 두들겨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상세히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잘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신 맞고 있는 윤정우은 몸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자신이 미행에 성공했더라도 알 수 없는 귀중한 정보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전하. 신 선전관 심성태이옵니다."

"어서 들라."

이곳은 창덕궁 희정당. 명종의 현재의 처소였다. 대전내관이 고하지 않고 스스로 조용하게 고한 심성태가 스르르 하고 조심스럽게 열리는 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와서 명종에게 절을 한 후 목소리를 낮추어서 고했다.

"전하. 오늘 덕흥군의 집에 서원부원군이 보낸 매파가 다녀갔다고 하옵니다."

"서원부원군이? 하면 누구에게 청혼을 넣었단 말이냐?"

매일 종친들의 동향을 선전관들을 파견하여 감시하게 한 명종은 오랜만에 들려오는 제법 굵직한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현재 세력이 줄었기는 하지만 윤원형의 움직임은 명종으로써는 가장 먼저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거기에 내심 후계자로 생각하는 하성군의 일이 겹친 이상 이 일의 중대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예. 전하. 원래는 매파가 덕흥군부인에게 하성군과 서원부원군의 막내딸을 혼인시키기를 청하였으나 나이가 어리고 손위의 형제들이 아직 미혼인 점을 들어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하오나 다시 매파가 이번에는 하성군의 큰 형인 하원군에게 혼인을 청하자 덕흥군부인이 거절할 마땅한 이유가 없어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하여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서원부원군의 행태가 나날이 가관이로다. 이제는 하성군에게 빌붙으려는 것인가? 그런데 과인이 아는 바로는 이번에 덕흥군의 집을 감시하는 선전관은 윤 선전관이 아니더냐. 어찌하여 윤 선전관은 안 보이고 승전선전관이 보고하는가?"

"전하. 송구스럽사오나, 이번에 윤 선전관이 매파를 뒤따르다가 덕흥군댁의 하인들에게 발각당해 지난번의 모리배로 오인 받아서 몰매를 맞았다 하옵니다. 그리하여 고변을 받고 출동한 포도청의 포졸들에게 간신히 구출되어 의원의 치료를 받고 있사옵니다."

"이런 일이 있나? 덕흥군의 가풍이 그리도 난폭하단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윤 선전관은 미행에 실패하고도 어찌 그리 알아냈는가?"

"소신이 듣기로는 몰매를 맞는 중에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고 하옵니다. 아무래도 서원부원군의 청혼으로 덕흥군의 집 분위기가 나빠졌는데 운이 나쁘게도 윤 선전관이 그 앞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다가 흥분한 하인들에게 맞은 듯 하옵니다."

"허~, 이런 일이 있나? 승전선전관은 나중에 윤 선전관에게 푸짐한 상을 내려 그 노고를 치하하도록 하라."

"예. 전하."

명종은 심성태의 보고를 받고는 윤원형의 행동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순회세자가 죽은 이래 윤원형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전보다는 조금 나은 행동을 조정에서 보여주고 있어서 명종이 그 죄를 약간이나마 감안하려 했는데 그 뒤로는 하성군을 노리고 있었다니... 명종에게 있어서 윤원형이란 존재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만 다시금 인식시켜준 꼴이었다.

다음날 창덕궁 선정전에서 어전회의가 열려서 조정중신들이 참석하여 국가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하여 논의를 했다. 그리고 어전회의가 끝나기 바로 전에 명종이 조정 대신들에게 한마디를 했다.

"과인이 들기에 요즘 들어 종친들과 통혼하려는 조정대신들이 많다고 들었소. 하나 이러한 행동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오. 만일 앞으로 이러한 소문이 사실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면 과인이 친히 그 죄를 다스릴 터이니 경들은 몸가짐을 바로 하여 과인의 뜻을 어기는 이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과인은 요즘 정무가 바빠서 이를 감독할 시간이 없소. 그러니 영상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겠소. 만일 과인의 어명을 따르지 않고 경거망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영상께서 과인에게 알려주시오. 영상대감 아시겠소?"

"예. 전하."

"그럼 과인은 영상대감만 믿을 터이니 수고해주기를 바라오. 오늘은 이만 회의를 마칩시다."

명종은 일부러 그 책임을 윤원형에게 떠 넘겼다. 아무래도 왕명을 받은 책임자가 그 왕명을 어기는 것이 그냥 핑계를 대고 어기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명종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하성군과 명종을 욕하느라 바빴다.

'이런 어떻게 알았을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는데, 아무리 하성군의 집 근처에 주상의 눈이 있다고 하여도 정확한 사실을 알아내려면 약간의 시일이 걸리거늘. 설마. 하성군이 알린 것인가? 아니 내가 감시하라고 보낸 놈들은 하성군이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심부름하는 하인 따위가 구중궁궐안의 주상에게 소식을 전하기도 힘들 터, 그렇다면 하성군이 이미 궁내에 세력을 구축했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놈이다. 어린 아이의 가죽을 뒤집어 쓴 여우라고 해도 저 나이에 그만한 세력 얻기란 불가능한데... 하성군 역시 만만하게 볼 놈은 아니었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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