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을 받다.
이처럼 균에게 한방을 먹은 분에 윤원형은 더 이상 매파를 보내지 않았다. 이미 명종의 직접적인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그것도 자신이 감독책임자가 된 상황에서 어설프게 일을 강행하다가는 자신의 치부만 보여주는 꼴이 된다. 하지만 그대로 넘어가려니 균의 세력과 능력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균과 협력하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지만 아니라면 균을 철저히 파멸시켜야 뒷탈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윤원형은 균을 견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은 바로 대비 윤씨를 움직이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윤원형은 즉시 채비를 갖추고 다시 창덕궁에 입궐하여 대비 윤씨를 찾아가서 균과 자신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어서 말했다. 윤원형의 거짓말은 최대한 대비 윤씨의 권력욕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고친 말이었다.
마침 하나밖에 없던 손자 순회세자를 잃은 후 그 좋아하던 불공마저도 몇 달째 하지 않은 채 뒷방 늙은이처럼 낮잠과 사색으로 시간을 보내던 대비윤씨에게 윤원형이 전한 말은 충격과 분노 그 자체였다. 대비 윤씨는 윤원형의 말을 듣자마자 놀라서 말했다.
"그러면 덕흥군부인이 난정이가 제의한 혼사를 거부하였단 말이오?"
"예. 대비마마. 제 처의 태생이 미천하여 그 배에서 태어난 제 막내딸은 종실(방계의 왕족가문)의 며느리로는 불가하다고 하였나이다. 이 말을 들은 제 처가 눈물을 흘리는데 소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주상전하께서 제 처에게 정경부인의 품계를 내리신 이후에 이처럼 홀대를 당한 것은 처음이옵니다."
"어허! 이런 고얀 것을 보았나? 주상께서 친히 정경부인으로 인정한 난정이의 신분이 비천하다고 혼사를 거부하다니...."
윤원형이 이렇게 거짓을 고하자 예상대로 문정왕후는 크게 노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번 일는 하성군으로 대표되는 종친들이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가문과 세력에 반발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지금껏 그 누구도 윤원형과 정난정의 자녀들과 혼인을 거부하기는커녕 스스로 청했는데 이번 일은 자신의 절대 권력에 대한 정면 도전행위였다. 특히 친손자를 잃어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는 더욱 괘씸한 일이었다.
"내가 주상을 한 번 만나봐야 될 것 같으니 서원부원군은 그만 집에 돌아가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세요."
"예. 대비마마."
분을 참지 못하는 대비 윤씨를 보는 윤원형은 속으로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못해도 하성군에게 불벼락이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하성군이 명종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대비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한 번 호되게 당한 하성군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윤원형은 생각했다. 그러면 윤원형은 보다 더 자신의 앞날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윤원형은 어제와는 달리 무척 기쁜 표정을 지으며 창덕궁을 나섰다. 그리고는 준비된 남여에 타고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 무렵 균도 다른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비금도에서 비정기암호문이 도착한 것이다. 균은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정기적인 보고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박수익이 첨부하는 비밀보고서까지 받아서 비금도의 상황을 상세히 아는 편이라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비정기 암호문의 전달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독해보니 그다지 균 자신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하성군 마마님께 보고드립니다. 싸츠마지부의 보고에 따르면 시마즈가문내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현재 시마즈가의 병력들이 곳곳으로 집결중입니다. 또한 시마즈가에서 본 도에 대하여 소총과 화약공급을 늘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성군마마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수석부장 황재훈-'
'이건 필시 시마즈의 대명교체가 임박했다는 말이다.'
현 시마즈가의 가주 다카히사는 원래 종가출신의 가주가 아니다. 이 때문에 1526년 가주가 되었지만 다른 가문의 반발로 실제로 시마즈가의 가주로 전권을 장악한 것은 1540년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시마즈가 내의 다른 세력들이 존재하는 바람에 시마즈가가 완전히 통일된 것은 그의 아들인 요시히사때인 1577년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뛰어난 무장과 무역으로 인해 충실한 재정을 자랑하던 시마즈의 큐슈통일이 늦어지고 결국 히데요시의 원정군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무척 다르다. 균이 넘겨준 소총으로 인해서 시마즈본가는 일본 내의 최고의 소총을 다수 보유하게 되었다. 그것도 비금도와의 밀무역을 통해서 비밀리에 보유하게 되니 시마즈 다카히사는 다른 세력에 비해서 우세한 무력을 손에 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주의 자리를 유능한 아들인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넘겨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원래의 역사보다도 2년이나 빠른 모습이다.
균은 자신의 계획대로 강해지는 시마즈를 보면서 기쁘기도 했고 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시마즈가 예상대로 규슈와 그 일대를 평정하고 일본 본토세력과의 완충지대가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균의 예상을 벗어나서 너무 커진다거나 조선에 흑심을 품어 오히려 조선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이었다.
균은 일단 은혜를 배풀어두는 의미에서 적당량만 더 넘겨주라는 답장을 작성했다. 그 정도쯤이야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수치는 아니었기에 곧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수없이 시마즈가 일본을 통일해 버리기라도 하면 난감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영 찝찝했다.
완성된 암호문을 다 작성하고 봉한 후 방을 나서려던 균은 다시 암호문을 꺼내어서 뒤에 몇 마디를 더 붙친후 다시 잘 봉하여 대기하고 있을 연락꾼에게 넘겨주었다. 균으로부터 답장을 받은 연락꾼은 추워지는 날씨탓인지 하얀 입김을 뿜어대며 한성부 밖에 준비된 마필을 향해서 바쁘게 걸어갔다.
조선 국왕의 하루는 해가 뜨기 이전부터 시작된다. 명종도 해가 뜨기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중전과 함께 대비 윤씨에게 아침 문안을 올리기 위해서 대비의 처소인 소덕당으로 향했다.
"대비마마. 주상전하와 중전마마께서 드셨사옵니다."
"드시라고 하라."
명종과 중전 심씨는 대비 윤씨에게 같이 큰 절을 한 번 올렸다. 하지만 대비 윤씨는 아침부터 심기가 좋지 못한 듯이 얼굴 곳곳에 주름이 많이 생긴 채 아들부부의 절을 받았다.
"어마마마, 간밤에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이 어미는 어제 잠을 이루지 못했다오."
"예? 어마마마.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꿈이라면 잊기라도 하겠지만 불행히도 현실이라오. 주상."
원래는 당장 명종의 거처인 희정당으로 달려가서 따지고 싶었던 대비 윤씨였지만 이렇게 명종이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말하는 것이 더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제서야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것이었다.
"어마마마, 소자가 어마마마께 심려를 끼쳐 드린 일이라도 있사옵니까?"
"이 어미가 듣기로 덕흥군부인이 서원부원군의 청혼을 거부하였다면서요? 거기다 주상께서는 그 청혼이 잘못되었다고 덕흥군부인을 편들었다고 들었소만 은...? "
"예. 어마마마. 요즘 들어 조정대신들과 종실간의 혼담이 오가는 경우가 많아 소자가 이를 하지 말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한데 덕흥군부인이 서원부원군부인을 천한 자라서 혼인을 맺을 수없다고 하였다는데 그것도 주상이 알고 있소?"
명종은 그제서야 어머니 대비 윤씨가 화가 난 이유를 알았다. 윤원형이 거짓을 고했던 것이다. 덕흥군부인의 뒤에는 총명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하성군이 있다. 명종은 하성군이 그만한 실수를 할 가능성은 윤원형이 돈을 싫다고 말할 확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인 대비 윤씨는 언제나 윤원형의 말만 듣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일단 명종은 사실을 알려주고 대비 윤씨를 달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마마마. 소자는 순회가 죽은 후 조정대신들과 종친들 간에 만남이 자주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 종친의 집에 선전관들을 파견하여 그 동향을 감시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종친 중에서 가장 많은 방문을 받았던 집은 옛 덕흥군의 집이오나 하성군이 순회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방문을 사절하여 뜻을 이룬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데 서원부원군은 이런 집에 매파와 값비싼 선물을 보내어 청혼을 하였고 덕흥군부인은 하성군의 나이가 어림을 들어 거부하니 이번에는 하원군이라도 좋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녕 정략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소자는 이 사실을 선전관으로부터 듣고 모든 조정대신과 종친의 혼인을 막은 것이지 덕흥군부인을 편든 것은 아니옵니다."
"음... 그러면 주상이 편을 든 것은 아닌 것 같소만 덕흥군부인이 서원부원군부인을 천한 신분이라고 하였다는데 이는 주상이 친히 정경부인의 품계를 내린 것에 반하는 처사가 아니겠소? 이는 주상을 능멸한 것과 같으니 덕흥군부인에게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이오."
대비 윤씨는 명종이 이미 제반 사실들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을 들자 한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덕흥군부인만은 반드시 처벌하여 아직 자신과 윤씨 가문이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번 명종에게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명종은 덕흥군부인을 처벌할 의사가 없었다. 눈에 가시 같은 윤원형을 위해서 마음에 쏙드는 하성군을 내치는 짓은 이제는 절대 사절이었다. 모후와 윤원형에 의해서 잃어버린 많은 충신들은 명종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내심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하성군마저 잃어버렸다가는 이 나라 조선의 종묘사직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 명종은 대비 윤씨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을 했다. 이는 명종이 생애 최초로 대비 윤씨 즉 문정왕후의 의견에 반발한 것이었다.
"어마마마. 그 당시 전후사정을 아는 자는 덕흥군부인과 매파 단 둘입니다. 어찌 천한 매파의 말만 믿고 종실의 귀부인의 말을 거짓이라 하겠습니까? 또한 매파는 돌아갈 때 무척이나 기쁜 듯 웃고 있었다고 하며 서원부원군부인이 보낸 선물도 받아서 빈 몸으로 돌아갔다고 하옵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서원부원군이 어마마마께 한 말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주상. 그래서 이 어미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오? 당장 주상의 외숙이 수모를 당했거늘 주상은 어찌 먼 친척을 편드시는 게요."
"어마마마. 서원부원군은 어마마마의 손자인 순회의 죽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자 입니다. 또한 우리 순회의 몸에 온기도 다 마르지 않았는데 다른 종친과 통혼을 꾀한 자이옵니다. 이것이 소자의 외숙이자 이 나라의 외척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옵니까? 어마마마께서는 이제 죽은 순회가 생각나지도 않으십니까?"
"주상! 어찌된 말버릇이기에 이 어미에게 언성을 높이시는 게요?"
"주상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죽은 외동아들 순회세자가 생각난 명종은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내던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는 화를 내는 대비 윤씨의 말도 옆에서 말리는 중전 심씨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마마마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소자의 외숙은 순회가 죽자 자신의 권력이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다른 종친들과 통혼하려 발버둥쳤습니다. 하나 어마마마가 그토록 멀리하시는 종친인 하성군은 세자가 죽은 지 한참 후까지 세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었습니다. 어떤 자가 진정으로 이 나라 이 왕실에 충성을 하는 자이겠습니까?"
"주....주상!"
"승하하신 선대왕마마께 시집을 오신후로 어마마마는 윤씨집안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윤씨집안의 사람으로 행동하십니까? 선대왕마마와 죽은 순회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
"전하!"
대비 윤씨는 혈압이 올랐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중간에 낀 중전 심씨만이 어쩔 줄 몰라서 둘의 눈치만 살폈다. 명종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스스로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명종의 30년 인생에 있어 최초로 대비 윤씨의 뜻을 거절한 사건이었다.
대비 윤씨는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 자신 역시 하나뿐이던 손자의 죽음에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외아들 역시 언제나 들어주던 그녀의 뜻을 거절했다. 거기에 믿고 따르던 자신의 동생이 한 자신에게 그 정도로 심한 거짓말을 하였다는 것도 큰 충격이었다.
젊었을 때 자신이 하나뿐이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 유력한 집안의 딸들인 중종의 후궁들에게 멸시당하며 뒤에서 힘들게 세력을 기르고 결국 명종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은 대비가 되어 절대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노년에 이르자 그 권력이라는 놈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궁에 처음 들어와서 힘없는 중전으로 앞의 중전이 남긴 아기(인종)를 기르며 무관심한 남편 중종과 멸시하는 다른 후궁들 사이에 외롭게 살아왔다. 그래서 권력이란 환상에 빠져서 몇 십 년을 달려왔지만 이제 남은 것은 역시나 외로움뿐이었다. 대비 윤씨의 눈에는 조금씩 눈물이 났다. 12살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렸을 때 이후로는 한번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었다.
"어마마마! 어마마마! 무엇들 하느냐 어서 어의를 불러라."
대비 윤씨는 중전의 비명 같은 소리를 들으며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왠지 편안한 느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비 윤씨는 죽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늦게 소식을 들은 명종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추운날씨에 건강이 좋지도 않은 데도 대비 윤씨를 간호했다. 하지만 대비 윤씨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정신이 들었다가 나가는 일들만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