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을 받다.
"뭐라고? 대비마마께서 쓰러져 사경을 헤매신다고?"
"예. 대감. 주상전하께서 아침문후를 하러 들리셨을 때 그만 쓰러지셨다고 하옵니다."
대비 윤씨의 소식을 전해들은 윤원형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하성군을 잘 견제해주리라고 생각하던 대비 윤씨가 병을 얻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할 수 없게 되면서 자신의 계책은 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동시에 윤원형 최대의 방패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와병은 윤원형의 세도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적신호였다. 아니 세도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마저도 위험한 지경이었다.
"대감. 저는 산사로 들어가서 밤낮으로 대비마마의 쾌유와 무병장수를 기원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소첩을 믿고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대감께서는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
"....."
정난정은 대비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망연자실한 윤원형을 격려하고는 바로 한성부 인근의 산사로 들어가서 대비 윤씨의 쾌유를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비 윤씨의 쾌유를 바라는 이는 조선전체를 통틀어 명종과 윤원형등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늘은 전에는 잘 들어주었던 정난정의 정성어린 기도에도 무심하기만 했다.
다시 해가 바뀌어 명종 19년 서기 1564년이 되었지만 겨울이 다가도록 대비 윤씨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명종은 스스로 대비를 간호하는 한편 다시 한 번 전국에 대사면을 단행하여 대비의 쾌유를 기원했다. 또한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탕금을 모두 털어서 곳곳의 사찰에서 불공을 드리게 하였지만 대비 윤씨는 정신을 차린 날보다 잃은 날이 점차 많아지는 듯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대비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이미 창덕궁을 떠나서 한성부를 감싼 성벽을 넘어 조선전체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대비의 쾌유를 바라는 자는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내심 대비가 빨리 죽고 윤원형일파가 숙청되어 명종이 바른 정치를 마음껏 필 수 있기만을 고대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조정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아니었다. 작년 이량의 숙청과 죽음이래 조정으로 대거 그 세력을 확장한 사림들을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윤원형까지 제거하기를 바라는 자들이 많아서 좌의정 이준경이 이에 대하여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대비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대소신료들이 대비전을 방문하여 대비의 상태를 보았는데 이미 가망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명종이 최선을 다하여 수발을 들고 여러 가지 고급약재를 총동원하고는 있지만 반쯤은 저승길을 떠난 듯한 대비의 상태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조정대신들은 가망이 없는 대비의 병환보다도 더 큰 문제로 대비의 병수발을 드는 명종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과 명종의 결제가 필요한 일부 서류가 처리되지 못한 것, 그리고 대비의 치료비로 들어가는 돈이 막대하여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에 따라서 조정에서는 조심스럽게 하성군에게 대비의 병수발을 맡기고 명종을 대비의 옆에서 조금 떨어뜨려두자는 공론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병조 참의의 생각은 하성군을 입궐시켜 대비마마의 병수발을 들게 하자는 말인가?"
"예. 좌상대감. 하성군영감이라면 주상전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종친입니다. 잠시나마 입궐시켜 대비마마의 수발을 맡기자고 청한다면 주상전하께서도 승낙하실 겁니다. 아니 이것은 우리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꼭 밀어붙여야 하는 일입니다. 대비마마의 병수발을 드시느라 주상전하의 옥체가 많이 상하셨다고 합니다. 이대로 지켜만 보다가는 국가대사에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병조 참의의 말에 나도 동감하는 바이오. 좌상대감.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조정중신으로써의 책무를 망각하는 일이외다. 무엇보다도 주상전하의 건강이 염려되니 하성군에게 대비마마의 병수발을 잠시라도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병조 참의 성순의 말에 우의정 심통원등 대다수의 신료들이 찬성을 표했다.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닌 명종으로써는 지금처럼 대비의 병수발과 국사를 돌보는 일을 같이 처리하는 것은 분명한 무리였다. 이에 좌의정 이준경도 공감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대감과 조정대신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직접 주상전하를 배알하고 청을 드려보겠소. 한데 영상대감의 병세는 어떻다고 하오?"
"병세야 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종기를 핑계로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게지요."
"어허, 대사헌. 그래도 자네 윗사람이고 이 나라의 영의정이거늘, 말이 너무 지나치구만. 다음부터 더욱 주의하도록 하게."
"예. 좌상대감."
이제는 대놓고 윤원형을 비난하는 대사헌 김귀영에게 이준경이 주의를 주었지만 주의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한 작년만 해도 다른 이들이 김귀영을 비판하려고 난리였겠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다. 윤원형의 권력기반이던 대비가 사경을 헤매는 요즘에는 윤원형의 후광으로 벼슬길에 오른 자들도 그런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거나 오히려 그런 말을 하여 윤원형과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요즘 조정의 이러한 모습을 자주 보았던 이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비전이 소덕당으로 향하면서 생각을 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더니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윤원형의 권세도 이십년을 채우지도 못 하는구나. 쯧쯧쯧.'
이렇듯 창덕궁에서 대신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균은 무척이나 여유있었다. 비록 예상보다 빠른 정치변화로 인해 비금도에 직접 내려가서 돌보기는 힘들지만 황 수석부장과 여러 부장들이 잘 움직여주고 있었다. 왜국의 시마즈가 역시 시마즈 요시히사가 무사히 가주직을 상속받고 내부체제정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며 비금도에 수출하는 수출품의 가격을 더욱 인하하는 등의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아직 군사력의 증강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숙련기술자가 적고 그나마 다른 일에 투입되는 바람에 하루에 2정정도의 총이 생산되며 한 정은 시마즈로 보내지고 한 정만이 경비단의 손에 쥐어지는 바람에 경비단이 보유한 소총이 고작 1천여 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성부일대의 조선군의 전력에 비해서는 우세한 전력인데다가 자신이 반란을 생각하지 않고 있기에 군대가 늘어날 시간은 충분했다.
또한 최강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대비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윤원형과 정난정이 각각 집과 산사에 틀어박혀 꼼짝도 못하는 지경이며 명종은 역사대로 많은 후궁들을 거느리면서도 공주하나 얻지 못하고 있으니 균이 특별히 걱정할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작은 후원을 감상하며 거닐고 있었다.
'대비가 갑자기 쓰러져서 몇 달째 못 일어나고 있다니 ... 좋은 소식이기는 하지만 너무 빨라지면 곤란한데... 이대로라면 대비가 거의 1년의 차이를 두고 먼저 죽게 생겼으니 현 주상의 사망도 대비의 죽음 2년 뒤인데 그렇다면 1566년에 즉위를 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여유 있게 지내는 시간도 줄어들겠군. 그전에 체력단련이라도 해둘까?'
쓸데없이 시간이 많이 남은 균은 미래를 대비해서 운동이나 더 할려고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빨리 커서 컴퓨터 게임을 하겠다는 망상덕분에 아기 때부터 많은 운동을 했고 그 후에도 운동을 하는 버릇을 들여 지금도 간단한 운동을 하고 있는데 더 운동하겠다고 법석을 부리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쉽다. 특히나 요즘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이 많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균은 다시 유유히 후원을 걸어 다니며 자신의 취미가 고상한척 나무들을 감상했다.
"균이 오라버니!"
'벌써 어머님이 낮잠을 주무실 시간이던가? 이제 편한 시간은 다 지나갔구나.'
진이가 빠른 걸음으로 균이가 있는 후원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균은 곧 자신만의 생각에 벗어나서 제 동생을 맞았다. 그런데 진이 뒤로 정집사가 역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어서 균은 진이가 사고를 치고 자기에게 수습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집의 가장은 균이었기에 어머니 정씨도 균의 말에는 대체로 따라주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이유가 아니었다.
"오라버니, 대궐에서 사람이 나왔어요."
"도련님, 대궐에서 선전관이 나와서 도련님을 찾습니다."
"대궐에서?"
진이의 말과 어느새 따라온 정집사의 말을 듣고는 균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선전관을 맞았다. 승전선전관 심성태는 균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는 명종의 명을 전했다.
'하성군은 즉시 창덕궁으로 입궐하여 대비마마의 병시중을 들도록 하라.'
비공식적인 명종의 어명이었지만 명종 스스로가 여러 종친 중에서 하성군의 우위를 입증한 최초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균은 명종이 자신을 대비의 병시중을 들게 한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난감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 대비 윤씨는 자신을 아끼는 명종의 어머니기도 하지만 자신을 적대하는 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아무튼 왕명을 어길 수 없는 균은 채비를 갖추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전하 하성군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지난번 순회세자때처럼 균은 병자가 누워있는지라 큰 절은 생략하고 허리를 크게 숙여서 예를 취한 후 자리에 앉아서 명을 기다렸다. 명종은 그간의 대비의 병수발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었는지 순회세자의 죽음때 보았던 모습보다도 더욱 수척해보였다. 옆에 같이 앉아있는 중전 심씨의 얼굴도 수척하지만 명종은 당장 누워서 간병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하성군은 그간 잘 지내었느냐?"
"예, 전하. 전하의 하혜와 같은 성은에 힘입어 별 탈 없이 잘 지냈사옵니다."
"그래? 잘 지내었다니 다행이로구나. 오늘 과인이 너를 부른 것은 하나 부탁할 것이 있기 때문이니라. 과인이 지난 몇 달간 대비마마의 환후를 돌보았으나 그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과인의 정성이 부족하여 하늘을 감복시키지 못하여 그렇다고 생각하노라. 그래서 네가 과인을 대신하여 대비마마의 수발을 정성을 들여 해주었으면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전하. 맡겨주시옵소서. 소신이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그래 고맙구나."
균의 대답을 듣고 나서 명종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중전과 함께 소덕당을 나섰다. 하지만 명종은 그간 얼마나 건강을 해쳤는지 위태위태하여 좌우의 내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모습까지 지켜본 균은 헬쓱해진 명종의 얼굴과 5년 전 죽은 친아버지 이초의 얼굴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애써 머리에서 지우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 대비의 병시중을 들었다.
병시중이라 하여도 병자의 수발을 모두 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옆에서 병자의 요청을 들어주고 간단한 수발을 들어주는 정도에 불가하지만 많은 시간을 정신을 거의 잃고 사는 대비와 보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일은 궁녀들과 의관 ,의녀들이 해주지만 대비에게 먹이는 죽은 먼저 맛을 보아 독이 없는지 확인한 후 직접 떠먹여주어야 했고몸에 열이 나서 물수건이라도 올린다면 자주 갈아주어야하는 것도 균의 몫이었다.
물론 방에는 병자인 대비뿐만 아니라 의관등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지만 이야기를 나눈다던지 할 수 없기에 균의 지겨움을 풀어주기에는 부족했다. 잠도 가끔씩 새우잠을 자거나 조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불을 깔고 자는 날이 며칠에 한 번 정도였으니 균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대비가 빨리죽기를 기원하며 겉으로는 부지런히 수발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척 피로해진 균은 대비의 옆에서 졸다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 두 명의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서 문루는 없고 석문만 있는 곳을 지나서 거리를 천천히 따라서 내려오는데 주변에 지나는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못한채 그들을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참을 내려온 그들은 어느덧 어떤 대궐의 문 앞에 서서 그 문의 현판을 바라보았다. 이 때 균의 시선도 그들처럼 그 현판을 향했는데 거기에는 돈화문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돈화문이라는 현판을 보는 순간 균은 꿈에서 깨어났다. 낮이라서 그런지 방안은 밝았고 균의 뒤에 있던 사람들 역시 균처럼 졸지 않고 잘 대기하고 있었다. 균은 먼저 대비의 숨을 살폈다. 대비는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고 균은 실망했다. 꿈에 저승사자가 나타나기에 대비의 목숨을 거두어갈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균이 내심 아쉬워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는 명종이 방으로 들어섰다. 균은 즉시 일어나서 자신의 자리를 명종에게 내주었다.
"하성군이 열심히 수발을 들고 있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오늘 와서 보니 하성군도 많이 피로한 듯 하구나. 대비마마의 병세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하니 궁내의 처소로 돌아가서 조금 쉬거라. 오늘은 과인이 대비마마의 곁에 있고 싶다."
"예. 전하."
예고도 없이 찾아온 명종이 자신이 수발을 맞겠다고 하자 균은 아까전의 꿈이 자꾸 생각나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하지만 명종의 재촉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대비의 방을 나섰다. 그런데 대비의 방을 나서면서 균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에 균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소덕당 근처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