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을 받다.
"음~~."
"어마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주상이오?"
"그러하옵니다. 어마마마.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명종은 어머니인 대비 윤씨가 정신이 드는 듯하자 무척이나 기뻐서 울먹이 면서 말을 했다. 잠시 정신을 차린 대비는 아들 명종을 바라보다가 놀란 듯 잠시 눈이 커졌다가 다시 원래의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힘은 없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상, 이 어미가 떠날 시간이 다 된듯하구려."
"어마마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어마마마께서는 곧 태어날 소자 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혼례를 치르고 왕실이 번창하는 것까지 보시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실 때가 아니옵니다."
명종의 간절한 말에 대비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는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명종에게 말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가 있다면 죽는 때도 있는 것이오. 이미 주상의 뒤에는 나를 기다리는 이가 둘이나 와 있다오. 그러니 주상의 말대로 주상의 아이 들이 태어나서 자라는 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오."
대비의 말에 명종은 즉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 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명종의 머릿속에는 저승사자는 곧 죽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던 어릴 적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저승사자가 하나라 면 그 저승사자에게 사정하거나 또는 도망쳐서 살아날 수 있지만 둘이상이 라면 절대로 죽음의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대 비가 본 저승사자들은 기필코 대비를 데리고 가겠다는 염라대왕의 뜻인 것 이다.
그러한 생각에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명종의 모습을 보는 대비는 아직도 제 눈에는 아이처럼 보이는 아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제 서른이 넘은 아 들이지만 대비의 눈에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어린 명종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이제보니 주상이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구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주 상의 눈에 그들이 보이겠소? 주상. 이 어미가 죽기 전에 부탁이 두 가지 있소."
"어마마마. 말씀만 하시옵소서. 소자가 무엇이든지 해드리겠나이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 같은 모습을 소자에게 한 번만이라도 보게 해주시옵 소서."
"주상, 너무 많은 것을 이 어미에게 바라시는구려.... 주상. 이 어미가 죽으면 조정의 신료들이 분명 내 동생을 탄핵할 것이오. 비록 지은 죄가 커서 처벌이 불가피 하겠으나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게 주상이 배려해주시 오. 미우나 고우나 주상의 외숙이 아니겠소?"
"예. 어마마마."
대비의 부탁은 곧 유언이었다. 그러한 대비의 유언을 듣는 명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작년에 하나뿐인 아들을 데리 고 간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친어머니마저도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하고 있 었다. 대비 윤씨는 정치적으로 명종의 부담꺼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든 든한 정치적 후원자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 셨다.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보면서 대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몸 도 점차 굳어지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을지도 모 르기에 대비는 최선을 다하여 말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대비의 말은 더욱 작아지고 말소리도 떨렸다.
"그... 그리고, 내가 죽으면 꼭 하... 하성군에게 세... 세자의 위... 위 를 주도록 하...하시...시오... 그....그 것만이......."
대비가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조용해지자 옆에 있던 어의가 즉시 대비 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목에서 맥은 뛰는지 코로 숨은 쉬는지 등을 살펴 본 어의는 명종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들고 있 던 것들을 옆으로 치우고는 조용히 말했다.
"대비께서는 승하하셨습니다."
"어마마마!"
명종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대비전의 상궁나인들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 아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대비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에 급히 소덕당 으로 오고 있던 중전 심씨도 소덕당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눈 물을 흘리며 주변 상궁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시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 기 위해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재촉했다.
역시나 자리에 잠시 누우려는 순간에 울음소리를 들을 균도 빠른 걸음으로 대비전인 소덕당에 도착해서 슬퍼하는 명종과 중전을 보았다. 대비전의 모 습을 본 균도 눈물을 흘렸지만 명종이 불쌍하게 여겨져서 흘린 눈물일 뿐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적대시하던 대비의 죽음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그래서 균은 겉으로 슬퍼하는 모습만을 보였을 뿐 순회세자때처럼 진심으 로 슬퍼하지는 않았다.
명종 19년 4월 6일 늦은 아침에 대비 윤씨가 세상을 떠났다.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연산군 7년(1501년)에 태어난 그녀는 17살 나던 해 중종의 제2계비로 간택되어 중종과의 사이에서 의혜, 효순, 경순, 인순의 네 공주 와 경원대군을 슬하에 두었다. 뒤에 남동생인 윤원형과 협력하여 결국에는 경원대군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조선 제 13대 왕인 명종이다. 이후 그녀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으로 조선을 통치하였다.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된 이후에도 많은 간섭을 하여 사실상 죽을 때까지 조선을 통치한 최고 권 력자였다.
하지만 지나친 불사와 각종 사화를 일으켜 조선의 혼란을 초래하였고 흉년 마저 도래하여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동생인 윤원형의 횡포로 인 하여 그 이름에 더욱 먹칠을 하였다. 손자인 순회세자를 먼저 잃어 대가 끊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경계하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에게 세자 위를 주라는 말을 남기고는 창덕궁 소덕당에서 죽음을 맞이하니 그녀의 나 이 64세였다. 역사에 비해서 정확히 1년이나 빠른 죽음이었다.
명종을 능가하던 조선의 최고 권력자 문정왕후의 죽음은 작년의 순회세자 때 보다도 더욱 큰 충격을 불러왔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간섭에서 벗어났 지만 생모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문정왕후을 잃고 심각한 정신적 공황에 빠 졌다. 아무리 문정왕후가 명종의 뜻을 꺾고 엄하게 대하였으나 명종을 위 해서 벌인 일들이 태반이었다. 이에 명종도 알게 모르게 문정왕후에게 의 지를 하는 버릇이 있었으니 그녀의 죽음으로 입은 그의 충격은 윤원형 못 지않았다.
하지만 윤원형은 권세의 유지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윤원형의 계획대로라면 문정왕후가 죽더라도 순회세자의 세자빈 윤씨와 결탁하여 계속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순회세자가 죽고 세자빈 윤씨는 순회궁이라는 이름의 과부가 되어버린 이상은 그의 계획은 무용지 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그간 친하게 지내던 조정의 중신들이 모두 윤원형과 손을 끊어버렸고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인 하성군에게 청혼을 강요하여 관계가 나빠졌으니 윤 원형으로는 마땅한 우호세력이 없는 입장에 빠진 셈이다. 아직 정 1품의 영의정의 벼슬과 역시 정 1품에 해당하는 서원부원군의 봉작도 가지고 있 으며 많은 재산과 노비를 거느린 그였지만 대비라는 안전장치가 풀린 왕권 이라는 최고의 권력에 독자적으로 대항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명종이외에도 적이 많았다.
"대비마마께서 승하를 하셨다고....?"
"예. 대감마님."
"하..........."
문정왕후의 사망소식을 접한 윤원형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제는 다 끝난 일이었다. 지난 18년간 조선을 뒤흔들었던 권세는 사라지고 이제는 목숨을 보존하기 급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어느새 급히 산사에서 올라온 정난정이 앉아 있는 윤원형을 보고는 달려와서 다시 일으켜 주었다.
"대감. 정신 차리세요. 대감."
"다 끝났다. 난정아. 다 끝났어."
"아닙니다. 대감. 주상전하는 대감의 조카가 되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대 감을 미워하신다고 해도 그렇게 박하게 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굳게 먹으시옵소서. 이제부터가 더 중요한 때 이옵니다."
"주상전하야 그렇다고 해도 사림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이제 곧 벌떼처럼 사림 놈들이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를 쳐 죽이라고 앞 다투어 말할 것이야. 조정에 있는 자들도 우리와 관계를 끊기 위해 같이 우리를 욕할 것이고. 이제... 우리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대감!"
울먹이는 정난정의 말과 함께 조정내의 최대세력인 윤원형의 몰락이 예고 되는 가운데 명종은 문정왕후의 장례절차도 주관하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웠 고 균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이번에는 명종의 병수발을 들었다. 그 리고 왕실이나 조정대신모두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균은 대비에게서 해방되나 싶더니 연이어 명종의 병수발을 들게되어 죽을 맛이었지만은 그리고 자신과 명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병수발을 들어서 궁 안의 많은 이들에게 호감을 샀다. 특히 내명부의 최고 수장인 중전 심씨는 하성군에 대한 좋은 말들을 주변상궁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하성군. 몸이 많이 상했구려.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하세요."
"아닙니다. 중전마마."
"하성군의 몸도 이젠 하성군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전하을 향하는 하 성군의 그 충성된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나 하성군의 건강도 이 나 라를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니 이번에는 내 말을 듣도록 하세요."
"하오나 주상전하의 병시중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사옵니까? 소신 이 계속 병시중을 들 터이니 중전마마께서 소신을 믿고 맡겨주시옵소서."
"하나 이러다가는 하성군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겠소. 여봐라. 밖의 내관 들은 들어와 하성군을 처소로 안내하거라."
거의 서너 달째 병수발을 들자 균의 둥글던 얼굴이 갸름하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중전 심씨가 강제로 균을 쉬게 하는 조처를 취해주었다. 중전 심씨 역시 속마음은 순회세자가 죽은 후부터 하성군에게 가 있었다. 자신이 생 각하기에 남편인 명종의 건강을 보았을 때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기는 힘 들고 또한 지금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하여도 국사를 돌보기도 힘들다고 생 각했다.
그래서 중전 심씨는 아예 하성군을 양자로 들여 세자로 삼은 다음 원로대 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리청정을 시킨 후에 명종의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대리청정을 취소하고 나빠지면 아예 양위를 하고 조용한 별궁에서 유유자 적하게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중전 심씨는 시어머니인 문정왕후와는 달리 권력보다 하나뿐인 남편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남편과 같이 오래 살 수 있다면 그깟 권력 따위는 없어도 좋았다. 그러기에 남편의 짐을 대신 지게 될 하성군의 건강을 걱정해준 것이다.
이렇듯 서원부원군 윤원형의 몰락과 하성군 이균의 득세가 예상되는 가운 데 한성부에는 소문이 하나 펴졌다. 창덕궁에서 시작된 소문이 외출 나온 궁녀와 출퇴근을 하던 무수리에 의하여 퍼진 것으로 대비의 죽음때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소문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하성군이 대비의 병시중을 들 때는 대비의 병세가 양호했는 데 하성군이 대비전을 나서는 순간 대비의 숨이 끊어졌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민간에는 자손을 두고 있는 사람이 죽을 때는 그 자손중에 저승사자 가 두려워 하는 이가 있어 그 자가 방을 벗어나지 않으면 저승사자가 사람 의 영혼을 데리고 갈 수 없다는 속설이 있어서 하성군이 대비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또한 대비가 죽으면서 하성군을 세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긴 사실도 어디 서 누출됐는지 한성부에 퍼지면서 하성군이 명종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소 문으로 변하여 한성부에 펴졌다. 포도청에서는 소문의 진상을 수사하였으 나 그 근원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균의 어머니인 덕흥군부인의 해명과 포도 청의 수사로 소문이 잠잠해지기 무섭게 또 다른 소문이 펴졌다.
이번에는 역술가들이 퍼뜨린 소문으로 하성군이 대비와 혈연적으로 관련이 없더라도 하성군의 기운이 왕성하고 그 기상이 남다른 큰 인물이라면 감히 잡귀는 물론 저승사자도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는 옛날부터 사람 들이 믿어오던 말로 동시대의 인물인 오성 이항복의 일화에도 나타나는 이 야기이다.
이항복의 일화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어느 집의 새신랑이 귀신 때문에 죽기 직전이었는데 신부가 과부로 죽기는 싫다고 하며 용한 점쟁이를 협박해서 이항복이 있으면 귀신이 못 온다는 것을 알아낸 후 이항복을 제 신랑과 같 이 있게 하자 귀신이 '당신처럼 위대한 인물앞에서는 나 같은 잡귀가 어 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다. 그러니 이 방법을 가르쳐준 점쟁이를 잡아가겠 다.' 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물러났다고 한다.
따라서 하성군의 기상이 얼마나 남다르고 기운이 왕성하면 저승사자가 피 했겠느냐는 소문이 번지기 시작하였는데 일부 눈치 빠른 역술가들이 인달 방에 왕기가 서린다는 거짓예언을 서슴치 않아서 오히려 균이 곤란해 했다 . 아직은 명종이 살아있기에 균이 너무 두각을 보이는 것도 곤란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균의 병간호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명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명종이 보는 하성군은 죽은 아들의 하나뿐인 친구였고 자신을 대신해서 대비의 병수발을 들어주고 또한 자신의 병수발도 최선을 다하여 들어준 재능이 빼어나고 충성심이 깊은 조카였다. 거기에 대비역시 하성군의 간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하성군을 세자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 으니 명종의 결심을 굳히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