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전의 새로운 주인.
어느덧 건강을 회복한 명종은 다시 정무에 돌입했다. 그간 원로대신들이 많은 일을 처리해두었지만 국왕만이 처결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서 명종의 결정을 기다리는 문서들이 방 하나를 가득 매울 지경이었다. 도승지 강욱이 매일 가져다주는 문서들만 해도 하루에 처리하기 곤란한데 그 것 말고도 더 있다는 사실에 명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이기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정무를 보았다.
하지만 대비의 와병과 자신의 병으로 반년이 넘게 쌓인 일거리는 명종이 휴일을 모두 반납하고 하루 종일 최선을 다해서 처리해도 줄어들 생각은커녕 되려 늘고 있었다. 이는 이량의 숙청과 윤원형의 퇴보로 인해 많은 관직의 주인이 바꾸었고 억울하게 죽거나 파면 조치된 이들을 다시 복권시키는 일들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과로를 하는 지아비를 지켜보던 중전 심씨가 명종을 찾아왔다.
"중전이 이 시간에 이 곳까지는 무슨 일이오?"
"지아비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이 어찌 시간과 장소를 가리겠나이까? 바쁘신 전하의 용안을 한 번 뵙고자 왔을 뿐입니다."
"하하하. 중전이 꼭 여염집(일반 백성들의 살림집)의 아낙네 같은 말을 하시다니 이거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구려."
연일 계속되는 정무에 지친 명종은 가벼운 중전의 말에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중전은 그런 명종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웃음이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명종이 처음으로 웃은 것이었다. 현재 명종이던 중전 심씨이던 웃고 살만한 낙이 없었다. 어린 자식은 죽고 며느리는 과부가 되어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으며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집안의 어른이던 대비가 죽고 나자 명종은 더욱 기운이 없어보였다.
명종의 웃음이 그치자 중전 심씨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중전 심씨의 입장에서는 사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나 명종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미묘한 문제였다. 바로 명종을 대신할 세자책봉에 관한 문제를 말한 것이었다. 중전은 정색을 한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전하. 신첩이 외람된 말씀이오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아마도 중전께서 꺼내실 이야기는 세자책봉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오. 그렇지 않소. 중전?"
"예. 전하."
명종의 얼굴도 어느덧 굳어졌다. 현 상황에서 세자를 그것도 종친 중에서 양자를 들여세우는 일은 법도에도 없는 일이다. 명종이 다시 아이를 얻어서 세자로 삼는 것이 가장 좋지만 수많은 후궁들이 그렇게 노력해도 임신한 후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종친출신의 세자의 탄생은 왕권에 제약을 가지고 온다. 사람들이 세자가 아무리 실권이 없다고 하여도 뜨는 해라 하고 명종이 아무리 젊고 건강해도 지는 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문정왕후의 유언이 있었는데도 명종이 내심 이 문제를 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과인도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오. 하지만 지금의 때가 좋지 않아요. 조금 미루었으면 하오."
"하오나 전하. 신첩은 전하의 옥체가 미령하심이 걱정이 되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옵니다. 요즘 들어 전하께서 다시 정무를 돌보시느라 옥체가 상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니 전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심이 옳을 듯 하옵니다."
"중전도 과인이 몇 해를 넘기지 못하리라 생각하시오?"
"신첩은 두렵사옵니다. 밤마다 울고 있는 순회궁(전 세자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또 전하의 정무에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두려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나이다. 신첩이 믿고 의지할 분은 이제 전하밖에 안계십니다. 어린 아들을 작년에 잃고 대비마마를 올해 잃고 세상천지에 사람은 많아도 이젠 전하와 신첩 둘만 남았습니다."
중전 심씨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과부가 된 며느리를 볼 때마다 그리고 다시 정무로 건강을 해치는 남편을 볼 때마다 여린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피어났다. 그녀의 나이 이제 33세 아직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었다. 중전 심씨에게는 권력보다도 남편이 더욱 소중했다. 남편인 명종과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다면 왕위 따위는 누가 계승하든 상관이 없는 그녀였다.
울고 있는 중전의 모습을 본 명종은 고개를 돌려서 중전의 모습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다. 자신은 이 나라 조선의 왕이다. 이는 중전의 남편이라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자리였다.
자신도 하성군에게 세자위를 주고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이미 어머니 문정왕후덕분에 권력이란 것에 대한 정은 다 떨어지고 없었다.
하나 아직 어린 하성군에게 전부 떠넘기기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아직 최고의 척신 윤원형의 세력이 남아있고 계속되는 흉년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제 한 몸 편하자고 왕위를 넘겨주는 것은 왕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행위였다. 그래서 최소한 하성군에게 넘기려면 제 손에서 나라를 안정시킨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명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날 명종은 상참에 참가하여 조정대신들로부터 여러 가지 보고를 받았다. 상참은 매일 편전에서 열리는 왕과 당상관이상의 관리들 그리고 사관, 언관등이 참여하여 주요국정과제를 의논하는 자리이다. 조참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 참상관(종6품 이상)이상의 관리들까지 모두 모여 국왕을 배알하는 행사였다.
오늘의 상참은 다른 날과는 달리 편전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이 윤원형의 죄상 26가지를 열거하며 탄핵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직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윤원형이지만은 이러한 죄상이 공개되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명종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전하. 신 대사헌 이탁, 대사간 박순등 삼사의 대간들이 아뢰나이다. 서원부원군 윤원형은 지난 을사년의 사화때 무고한 충신들을 무고하여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은 충신들이 수가 헤아릴 수가 없사옵니다. 또한 정미년에 벽서사건을 일으켜 그나마 남아있던 충신들의 씨를 말리고 그 자리를 자신의 심복들로 채워 국정을 문란하게 하였나이다.
서울 장안에 큰 집만 15채에 남으로부터 함부로 강탈한 전답이 일개 군에 이르고 남의 자녀를 강제로 잡아다가 노비로 부리니 그 원성이 하늘을 노하게 하였나이다. 또한 종친들의 봉록을 중간에서 가로채 종친들이 궁핍한 삶을 견디다 못하여 천한 일을 하게 하였으며 함부로 염전을 경영하고 그 값을 높이 받아서 한성부의 백성들이 소금 값을 대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삼가 신들은 서원부원군의 죄상을 주상전하께 알리어 국법의 지엄함과 주상전하의 위엄을 조선 천지에 알리고자 하나이다. 영명하신 주상전하의 밝고 오르신 판단을 기다리오니 전하께오서는 서원부원군 윤원형을 삭탈관직하고 전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먼 곳으로 위리안치 시키시옵소서."
"....."
삭탈관직은 그 사람의 관직을 빼앗는 벌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공직에 있었던 기록마저 삭제하는데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치는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에게는 명예를 빼앗은 조치였다. 위리안치는 귀양 중에서도 큰 벌로 아예 탱자나무의 가시로 울타리를 쳐서 다른 사람을 일절 못 만나게 하는 조치였다. 거의 대역죄인에게나 하는 조치로 보통의 귀양자들은 귀양지의 서당훈장노릇을 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그래서 귀양지에서 개인문집을 작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삼사가 청하고 있는 윤원형의 처벌은 사형을 제외하고는 거의 최고의 형벌이었지만 워낙 윤원형의 죄가 많은 지라 그 정도도 명종의 외숙인 점을 감안해서 낮추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삼사의 공격은 윤원형으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윤원형의 처 정난정은 본시 천한 출신으로 서원부원군의 첩이 된 후 본부인 김씨를 사사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나이다. 또한 요망한 요승 보우를 문정왕후께 천거하여 이 나라의 병권을 유명무실하게 하여 오랑캐의 침략을 초래하였으며 지나친 불사로 내탕금을 소모하여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중들은 이 얼굴에 살이 올랐습니다. 정난정은 임진강에서는 굶어죽는 백성들 옆에서 흰 쌀밥을 지어 물고기에게 먹였다고 하니 어찌 그 죄가 적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오서는 인정에 휘둘리지 마시옵고 이를 크게 벌하여주시옵소서."
"......"
도저히 명종이 막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명종이 윤원형을 원망어린 눈길로 바라보아 윤원형이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땀만 흘리고 있는 처지였다. 명종의 마음으로는 바로 처형하고 싶지만 자신의 외숙이었고 어머니 문정왕후의 부탁도 있는지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종은 이를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이 분위기에서 시간을 안 끌었다가는 둘이 죽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서원부원군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 그 죄상이 다 밝혀지지 않았고 또한 명백하다고 볼 수도 없으니 다음에 논의하도록 합시다. 단 서원부원군의 행실에 문제가 많은 듯하니 이 나라의 최고관직인 영의정의 관직에서는 물러나야 할 것이오. 경들도 그렇게 알고 과인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럼 다음 논의를 하도록 합시다."
"신 좌의정 이준경이 아뢰나이다. 송의 인종은 24세의 나이에도 후사를 생각하여 종친을 교육시켰고 고려의 성종과 목종은 모두 훌륭한 군주는 아니었으나 서른의 나이에 이미 후사를 생각하여 후대의 혼란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주상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시고 모든 신들이 도우시니 곧 대군아기씨의 탄생은 있을 것이오나 국본은 반드시 미리 정해야 하는 것이 옵니다. 하물며 최근 들어 종친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여 무지한 자가 부지기수이니 주상전하께서는 이들을 거두어 교육을 시켜 종친의 품위를 되찾고 나아가 종묘사직의 안위를 바로 잡는 길이라 사료되어 감히 아뢰나이다."
"...."
대전이 술렁거렸다. 이준경은 종친을 교육시키자는 말로 희석을 했지만 공개석상에서 세자를 세우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아직 젊은 군주에게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불경으로 비추어 질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기에 중전 심씨도 일부러 울면서 청을 한 것이다. 명종은 세자를 세우는 문제는 국왕의 고유권이기에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경정도의 대신이 말을 꺼낼 정도라면 조정신료들의 논의가 활발하다는 소리였기에 명종은 다르게 생각했다.
"세자를 정하는 일은 이 자리에서 논할 바가 아니오. 하나 좌상의 말처럼 종친들의 무지함이 심하다는 말을 과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그러니 종친중에서 아비를 일찍 여의고 제대로 교육을 못 받은 덕흥군 이초의 세 아들 하원군 정, 하릉군 인, 그리고 하성군 균의 교육을 대신들 중에서 사부를 선정하여 전담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좌상은 이에 대한 준비를 마친 후 과인에게 보고 하도록 하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 날의 상참에서는 윤원형이 영의정자리에서 밀려나고 삼형제의 교육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서 조정은 윤원형일파의 세력이 급속히 줄어들고 이준경을 중심으로한 일파가 그 세력을 확장했다. 당장은 명종의 노여움을 받을지도 모르는 이준경이지만 하성군이 보위에 오르면 공신의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평가였다.
영의정의 자리를 빼앗기고 집에 돌아온 윤원형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언제 자리를 빼앗기고 귀양을 갈지 몰랐는데 영의정의 자리는 빼앗겼으나 명종이 자신들을 지켜주려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도움이었다. 하지만 썰렁한 자신의 집을 보니 한숨만이 나왔다. 윤원형은 방에 들어가서 오늘 상참에서 있던 이야기를 정난정에게 해주었다.
"그렇게 주상전하께서도 우리를 살려보려고 하시지만은 삼사의 탄핵으로 난감한 지경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너나 나나 모두 죽은 목숨이고 잘해야 귀양지에서 죽지 못하여 사는 수준일 꺼다."
"대감."
"이제는 영의정도 아니고 서원부원군이라는 봉작도 빼앗길 테니 그 대감소리도 몇 번 못 듣겠구나.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낮다고 했거늘."
"대감. 우리가 살아날 길은 아직 있사옵니다."
윤원형의 말을 듣고 난 후 정난정은 눈을 반짝였다. 윤원형은 그럴 때마다 나오던 정난정의 지혜를 떠올리고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정녕 살아날 방도가 있다는 말이냐?"
"예. 대감. 문정왕후께서 승하하실 때 주상전하께 남긴 유언이 있습니다. 제가 대비전의 궁녀에게 듣기로는 대감의 안위를 보살펴주고 하성군을 세자로 삼으라는 내용의 유언이셨습니다. 이는 문정왕후께서도 더 이상의 대군아기씨의 탄생이 힘들다는 것을 여기시고 하성군에게 화해의 뜻을 전하신 것입니다. 하성군의 세자책봉을 유언으로 도와주시는 대신 하성군은 우리를 살리도록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설마 그런 뜻이라니...."
"문정왕후께서는 보통의 인물이 아니셨습니다. 하성군의 이름을 처음 들으실 때부터 소첩에게 경계하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대세가 바뀌었음을 알고 대감의 살 길을 열어주시고 승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성군 정도라면 유언의 속뜻을 아는 인물이니 조용히 서찰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시옵소서! 하성군은 분명히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윤원형은 정난정의 말을 듣자 구름이 걷치고 해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미 반쯤은 세자의 위를 차지한 조선의 뜨는 해가 바로 하성군이었다. 하성군이 자신들을 돕는다면 힘을 받은 명종에 의해서 자신들에 대한 처벌은 많이 감소할 것이다. 그렇게 최소한의 삶은 보장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자신을 챙겨주고 죽은 문정왕후의 생각이 나서 윤원형은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은 이용만 해먹은 누님인데 그런 동생을 위해서 죽는 와중에도 그렇게 깊은 뜻을 남겨서 자신을 살리려 했다는 말을 들으니 어릴 적에 같이 뛰어놀 때부터 어린 자신을 챙겨준 누님이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도 역시 거의 환갑의 나이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