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전의 새로운 주인.
당시의 점심은 지금의 점심이 아니다. 점심이라는 말은 조선초기부터 있었지만 실제로 아침, 점심, 저녁의 하루 세 번 식사가 정착된 것은 조선 말기이다. 그래서 명종과 균이 먹은 점심은 낮것상 이라하여 간단한 식사였다. 먼저 기미상궁인 기미를 한 후에 명종의 식사는 균이 한 번 더 기미를 했다. 왕세자가 가진 책무 중에 하나가 이렇게 부왕의 식사를 기미하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낮의 교육인 주강이 시작된다. 역시나 형식적인 교육일 뿐이고 명종은 정무를 처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다음에는 지방관으로 파견되거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신하들을 접견하여 신하들을 격려하고 해당 지역의 사정을 듣고 주요사항을 논의한다. 그러다보면 벌써 늦은 오후가 된다. 해가 지기 전에 하는 일이 바로 내금위에 암구호를 정해주는 일이다. 물론 숙직하는 신하들의 이름도 꼼꼼히 확인한다.
그다음은 저녁 교육인 석강이다. 조강, 주강, 석강중 왕이 그나마 잘 지키는 것이 석강이지만 현재 명종은 잘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명종에게 공부를 하라는 말을 하는 간 큰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 결재가 밀려있는 상황에서 명종에게 공부하라고 했다가는 명종의 분노이전에 동료들에게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명종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 다음은 다시 저녁수라시간이다. 식사를 마친 명종은 다시 밀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밤늦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균이 다 질릴 만큼 엄청난 업무량이었다. 하루 종일 명종이 하는 일을 비켜보다가 대비와 명종, 중전에게 저녁문안인사를 올리고 자신의 처소인 자선당에 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시(저녁 9~10시)였다. 균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일도 오늘처럼 갑시(새벽4~5시)쯤에 일어나서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그나마 명종은 지금도 밀린 업무가 있어서 일을 해야 한다던데... 휴~! 어떤 미친놈들이 이런 3D업종이 좋다고 반란을 일으키는지... 나중에 태조나 태종, 세조같은 사람들 만나면 꼭 물어봐야지.'
대궐에서의 첫 하루는 듣던 것 보다 더 심했다. 이미 비금도를 다스려본 경험이 있는 균이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칠만큼 많은 업무를 다루는 명종을 보니 한숨만 새어나왔다.
거기에 들리는 말로는 다른 방에도 명종이 보아야 할 서류가 산을 이룬다고 하니 균은 그제서야 명종이 자신을 예상보다 일찍 세자로 맞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균이 생각하기에는 며칠 데리고 다니다가 대리청정이라는 이름으로 산더미의 결재 서류를 떠넘기고 자신은 좀 쉬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균의 온 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이런 일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온 몸에서 힘이 빠진 것이었다. 힘을 잃은 균의 몸은 궁녀들이 준비한 이부자리 로 비교적 정확히 넘어졌다. 그리고는 눈이 스르르 감겨졌다. 그렇게 균은 임시(밤 10~11시)쯤에 들어오는 밤참도 못 먹어보고 경복궁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그래도 다음 날의 균은 어제 일찍 잠이 든 덕분에 악몽을 꾸지 않고 일어나서 일과를 쉽게 반복했다. 아직은 어수룩한 모습이 많은 세자지만 어제의 경험 탓인지 자신과 명종의 하루일과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나자 균은 새로운 일과에 잘 적응해 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세자가 궁의 생활에 적응이 빠르다고?"
"예. 전하. 세자저하께서는 마치 궁에서 살았던 사람인냥 빠르게 적응하고 계시옵니다. 저희 동궁전의 상궁나인들도 모두 저하의 총명하심에 놀라고 감탄하고 있사옵니다."
"허허허, 양상궁. 원래 세자는 몇 달이나 궁에 출입하던 아이가 아니냐? 거기다 총명함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고. 양상궁의 마음에 세자가 꼭 드는 모양이구나."
"송구하오나 전하. 저하께서 일국의 세자로써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아시는 듯 한 분이십니다. 아직 세자로 책봉되신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도 족히 몇 년은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보신 것처럼 행동을 하시니 일국의 세자로써 타고나신 분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동궁전을 새롭게 책임지게 된 양상궁이 균에게 내린 평가를 받은 명종은 기쁘면서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역대의 임금들이 부족한 순회세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먼저 데리고 가고 총명한 하성군이 세자가 되도록 도와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순회세자는 주변 상궁나인들과 내관들에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명종이 너무 아낀 나머지 고집이 세고 자신만 아는 아이로 성장하여 훈육을 맡은 내관과 상궁이 크게 걱정하였다.
그런 옛 기억을 떠올린 명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뛰어나고 충성심이 높아도 단지 조카일 뿐인 균과 언제나 모자란 모습만 보였으나 제 친자식인 순회세자가 더욱 비교되는 모습에 한숨이 나온 것이다. 순회세자가 살아서 지금의 균처럼 행동한다면 얼마나 좋을 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다 막혀왔다. 이러한 명종의 상황을 지켜보던 제조상궁이 양상궁을 질책했다 "양상궁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망극한 말을 입에 담는 게요? 비록 자신이 섬기는 주인이라고 하나 그렇게 좋은 점만 말씀을 올린다는 것은 아랫사람으로써 바른 도리가 아니오."
"하오나 제 말은...."
"둘 다 됐느니라. 양상궁."
"예. 전하."
제조상궁이 명종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고 양상궁을 질책했지만 명종은 그러한 제조상궁과 양상궁의 행동을 제지하고 다시 균이 동궁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양상궁은 아까 전에 제조상궁이 한 말을 반박하려는 듯이 세세한 일화들을 늘어놓았다. 거의 다 균이 이래서 좋은 주인이고 세자라는 내용의 이야기들이었다.
"한 번은 생각시(아기나인) 하나가 세숫물을 실수로 저하께 엎지르는 죄를 범했나이다. 어린 생각시가 어찌할 줄 몰라서 울상을 지는 것을 보신 저하께서는 '요즘 목욕할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몸이 간지럽다.' 고 하시며 아예 목욕을 하시고 그 생각시의 죄를 슬그머니 덮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아침문안이 조금 늦은 적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어찌 세자저하로써 바른 행동이라 하겠소? 그 생각시 하나 때문에 주상전하와 중전마마께서 귀중하신 시간을 잠시나마 지체하셨으니 결코 바른 행동이 아니지 않소?"
"아니다. 제조상궁. 세자의 행동이 바른 것이다."
"예? 전하. 하지만 전하의 귀중한 시간이..."
"앞으로 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자가 자신의 아랫사람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날 세자는 많이 늦지도 않았고 과인과 중전도 그리 기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시에게는 일생이 달린 문제니라. 또한 손쉽게 상궁에게 명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죄를 덮어주었으니 그 총명함도 칭찬받을 만하다. 아무리 세자가 명해도 상궁들이 생각시에게 벌을 내릴 것이 아니냐? 그 죄를 아예 없게 만들어 버렸으니 그 생각시는 세자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것이다. 그러니 세자의 행동이 상책이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명종은 다시금 균의 총명함을 생각했다. 일부로 의도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문안에 늦어 자신이 질책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균의 행동들이 일부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양상궁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단지 균의 평판이 무척 좋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럼 요즘 세자는 쉬는 시간을 무엇으로 보내는가? 혹시 책을 읽어 학문을 닦는가?"
"전하. 송구스럽사오나 저하께서는 틈만 나면 밖에서 다른 전각을 바라보시거나 아니면 일찍 침수(잠)에 드시옵니다."
"그럼 세자가 글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말인가? 어허~ 이런! 아직 학업에 신경을 써야 할 나이이거늘... 혹시 양상궁은 세자는 무슨 전각을 자주 바라보는지 아는가?"
"저하께서는 주로 비현각을 보시나 가끔은 이곳 강녕전 일대를 멍하게 바라보시고는 슬픈 표정을 지으십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슬퍼 보이는지 곁에서 모시는 궁녀들도 안타까워하신다고 하옵니다."
"....그게 정녕 사실인가? 양상궁?"
양상궁에게 균이 쉬는 시간에 하는 일을 듣고 있던 명종은 처음에 글공부를 안 한다고 할 때는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균이 비현각과 강녕전을 주로 본다는 말을 듣고는 감정이 복받치는지 말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예. 전하. 틀림이 없는 사실이옵니다."
"세자도... 세자도... 아직까지 순회를 잊지 않고 있었다니... "
비현각은 세자가 공부하는 곳으로 약 2년 전에 균이 순회세자랑 같이 공부하던 곳이다. 그때 균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서는 몸을 무리하게 혹사시키며 순회세자의 공부를 돕는 삽질을 하였고 순회세자는 마음에 맞는 균을 만나서 한때나마 즐거워하던 즉 균과 순회세자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그러다보니 명종에게는 순회세자와의 옛일을 추억하며 쓸쓸히 비현각을 바라보거나 자신과 중전이 있는 강녕전일대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일을 안타까워 해주는 균을 생각하니 마치 제 친자식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명종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동궁전으로 향했다. 도저히 말로만 그런 모습을 전달받기보다는 한번만이라도 그런 균의 모습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과연 양상궁의 말대로 균은 비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종이 자신의 거둥을 알리지 못하게 하고 멀리 숨어서 보는데도 한참이나 비현각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균은 얼마 후 고개를 돌려서 강녕전과 교태전일대를 잠시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자신의 처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세자책봉례와 평소 때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무척이나 힘이 빠진 듯한 모습에 명종은 감동을 받았다.
명종과 중전도 이제는 많이 잊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거의 생각도 안하는 순회세자를 그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세자가 안 보이는 곳에서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을 보고는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강녕전과 교태전을 바라보면서 명종 자신과 중전 심씨를 걱정하는 모습까지 보자 명종은 이렇게 생각했다.
'비록 내 핏줄은 이어받지는 못했지만 죽은 제 형을 저토록 생각하고 제 양부모를 각별히 생각하여 주니 어찌 다른 핏줄이라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순회는 잃었으나 대신 하늘이 내게 좋은 자식을 내려주신 것이다.'
명종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느끼며 중전 심씨가 있는 교태전으로 향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 중전을 생각하니 명종의 마음은 감동과 기쁨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구 설레였다.
한편 자신의 처소로 돌아본 균은 그 슬픈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비현각과 강녕전을 볼 때마다 계속 한숨만 나왔다. 대궐내에서의 자신이란 허울좋은 세자의 신분만 있을뿐 전적으로 명종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입장이기에 앞으로의 앞 날을 제대로 예측하고 대비할 수 없는 균에게는 불안한 것이 많았다.
'명종은 나에게 언제부터 대리청정을 시킬까? 그러면 지금보다도 자유시간은 줄어들 텐데... 휴~! 요즘 강녕전만 보아도 한숨이 나오니... 하긴 세자시강원이 구성되어 비현각에서 속성으로 세자교육을 받는 것보다는 그래도 낳다. 그 생각만하면 벌써 머리가 깨어질 것 같아. 남명 조식도 장난이 아닌데 퇴계 이황이 교수관이라니... 그러다가는 정말 머리에 금이 가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차라리 힘들어도 대리청정이나 시켜주면 좋겠다.'
이황은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경연관으로써 즉위후 1년간 세자교육을 받은 선조의 스승이었다. 남명 조식과 라이벌간인 퇴계 이황은 남명 조식이 벼슬길을 고사한 반면 이미 중종때부터 벼슬길에 오른 현재도 유력한 신하들중에서 하나였다. 역사의 시간은 어긋났지만 균의 학문스승으로 임명될 가능성은 십중팔구였다. 그 경우 균은 매일 두통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기에 차라리 정무를 돌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균이 이황과 대리청정을 겁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명종은 중전 심씨를 찾아가서 그 이야기를 상세히 해주었다. 어느덧 중전 심씨도 감동을 받았는지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런 중전을 보던 명종이 말했다.
"이만하면 아예 세자에게 양위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이오. 원래는 대리청정과 동시에 세자시강원을 구성하여 세자의 인성교육에 1년정도 투입한 후에나 양위를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그렇 필요가 없어졌소. 그러니 당장 내일부터 대리청정을 명하고 세자에게 국사를 돌보는 일을 일부 맡기어 빨리 국정을 바로잡고 중전이 원하는 데로 조용한 곳에서 같이 쉬도록 합시다."
"예. 전하. 신첩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세자가 우리 순회를 그렇게나 생각해주는 착한 심성을 가졌는데 어찌 전하께 딴 생각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시고 전하는 요양에만 힘쓰시면서 세자의 일을 조금만 도와주시어도 이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룰 것입니다."
"중전의 말씀이 극히 지당하오. 하지만 조금만 더 참으시오. 아무래도 세자책봉을 명나라에서 인증을 받는 시일 동안은 내가 국정에서 손을 뗄 수없으니 대리청정중에도 과인의 일이 많을 것이오. 그러다 세자가 명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그때부터는 우리 한 번 재미있게 살아봅시다."